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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명작의 바탕은 苦心이 아니라 無心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날이 개다(新晴)이숭인새로 갠 날씨 좋아 초가 정자에 들르니살구꽃 새로 영글고 버들가지 푸르네시가 이뤄지는 건 무심한 곳에 있는데애써 먼지 낀 책에서 영감을 구걸했네.* 이숭인(李崇仁, 1349~1392): 고려 말 문사이숭인의 칠언절구인데, 맑게 갠 봄날 풍광으로 시의 원리를 일깨워주는 시입니다. 여기저기 덧칠하고 꾸며낸 언사가 아니라 비 온 뒤 벙그는 꽃망울과 버들가지 빛깔처럼 맑고 선명한 것이 좋은 시라는 얘기죠.‘뛰어난 시의 바탕은 고심(苦心)이 아니라 무심(無心)’이라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어릴 때부터 글솜씨가 특출하던 그는 일찌감치 이를 체득한 모양입니다. 그 덕분에 16세에 급제해 21세에 태학(太學) 교수가 되고 이후에도 승진을 거듭했지요. 23세 때에는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고려 문사(文士)를 뽑는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나 너무 어리다(25세에 미달) 해서 떠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살아 있는 무심필법(無心筆法)얼마나 뛰어났으면 이색(李穡)이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라고 극찬할 정도였지요. 실제로 명나라 태조가 그의 표문(表文)을 보고 “표의 문사가 참으로 놀랍다”고 했고, 중국 사대부들도 탄복했답니다.명 태조가 그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1386년(우왕 12년) 정조사(正朝使)로 방문했는데, 최고의 환대와 파격적인 예우를 받았습니다. 황제는 고관들과 펼친 경연에서 그의 재질이 단연 돋보이자 관 위에다 백옥을 얹어 문창성(文昌星)을 표시하고 관복 한 벌, 벼루 한 개를 따로 선물했지요. 그 벼루는 지금도 후손인 성주 이씨 종가에 보관돼 있습니다.그러나 격랑의 시절 탓에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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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봄날 완행버스에서 생긴 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빈자리고두현열네 살 봄읍내 가는 완행버스먼저 오른 어머니가 남들 못 앉게먼지 닦는 시늉하며 빈자리 막고 서서더디 타는 날 향해 바삐 손짓할 때빈자리는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라고아침저녁 학교에서 못이 박힌 나는못 본 척, 못 들은 척얼굴만 자꾸 화끈거렸는데마흔 고개붐비는 지하철어쩌다 빈자리 날 때마다이젠 여기 앉으세요 어머니없는 먼지 털어가며 몇 번씩 권하지만괜찮다 괜찮다, 아득한 땅속 길천천히 흔들리며 손사래만 연신 치는그 모습 눈에 밟혀 나도 엉거주춤끝내 앉지 못하고.중학교에 갓 들어간 해 봄날, 남해 금산 입구 버스 정류장. 어머니와 함께 읍내 가는 완행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햇살은 따사롭고 풍광은 평화로웠습니다. 금산 보리암에 올랐다 돌아가는 외지인들이 도란거리며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지요.못 본 척, 못 들은 척 … 얼굴만 화끈쪼그리고 앉아 운동화 끈을 다시 매는 사이에 버스가 금방 왔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오르고, 제 앞으로 서너 명이 따라 올랐죠. 다급해진 저는 한쪽 신발을 미처 다 매지도 못한 채 서둘러 뒤를 따랐습니다.한 발을 막 올리려는 순간, 앞사람 옆구리께로 어머니 뒷모습이 보였죠. 중간쯤에 난 빈자리를 몸으로 엇비슷하게 막고 서서 한 손으로 저를 바삐 부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멀쩡한 자리에 먼지가 묻었다는 듯 부채질을 하고 있었지요.그 모습이 부끄러워 저는 일부러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습니다. 빈자리는 노약자나 임신부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는지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무안해서 어쩔 줄 몰랐지요.그럴수록 어머니의 손짓은 더 바빠졌습니다. 자식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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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과 최고…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 1939년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등 출간.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후회는 꼭 뒤늦게 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삶의 ‘노다지’인 줄 한 참 뒤에야 깨닫게 되지요. 그때 ‘더 열심히 파고들고’ 그 사람에게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하고 뉘우쳐 보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늦게라도 그걸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어쩌면 남보다 빨리 발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땅에서도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이지요. 옛사람들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해서 어떤 일에 미치지 않고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년 전에도 그런 ‘미친’ 사람들이 많았지요. 타고난 재주는 없었지만 남보다 몇십, 몇백 배 노력해 일가를 이룬 인물들…. 그중에 머리가 너무 나빠 고생하면서도 엽기적인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당대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오른 김득신(1604~1684)이 있습니다. 그는 나이 스물이 되어서야 겨우 글 한 편을 지을 정도로 ‘둔재’였지요. 우여곡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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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지배하라…하루 20분의 기적

    20분고두현아침 출근길에붐비는 지하철막히는 도로에서 짜증날 때20분만 먼저 나섰어도……날마다 후회하지만하루에 20분 앞당기는 일이어디 그리 쉽던가요.가장 더운 여름날 저녁시간에 쫓기는 사람들과사람에 쫓기는 자동차들이노랗게 달궈놓은 길 옆에 앉아꽃 피는 모습 들여다보면어스름 달빛에 찾아올박각시나방 기다리며봉오리 벙그는 데 17분꽃잎 활짝 피는 데 3분날마다 허비한 20분이달맞이꽃에게는 한 생이었구나.*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우리는 1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 1년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천왕성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84년이나 걸린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감안할 때, 우리의 일생은 천왕성의 1년과 같다.먼 우주의 행성과 비교하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면 길가에 핀 달맞이꽃을 보자. 달맞이꽃에게는 20분이 한 생이다. 우리 인생은 한 번밖에 없다. 연습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는 일회성의 시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날마다 허둥대며 산다.마음먹고 하루에 20분만 아껴보자. 사흘이면 1시간, 한 달이면 10시간을 벌 수 있다. 1년이면 120시간이나 된다. 120시간은 온전한 5일이다. 남들이 쓸 수 있는 날은 1년에 365일이지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날은 370일이나 된다.날마다 허비하는 시간이 20분뿐일까.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자투리 시간들이 날마다 2시간은 된다. 그 시간을 유익하게 쓴다면 1년에 한 달을 벌 수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