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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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배롱꽃 아래에서 당신을… [고두현의 아침 시편]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서안나 : 1965년 제주 출생. 1990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등 출간.이 시에는 많은 이야기가 겹쳐 있습니다. 시인의 경험과 그 속에 깃든 사연이 종횡으로 엮여 있지요. 어느 해 여름, 동료 시인들과 문학 순례를 떠난 시인은 안동 하회마을 인근의 병산서원에 도착했습니다. 병산서원에는 붉은 목백일홍(배롱나무)꽃이 만발해 있었죠.100일 가는 꽃 … 백일홍 → 배기롱 → 배롱목백일홍은 꽃을 한번 피우면 100일 이상 간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나무’라고 부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서 ‘배기롱나무’로 불리다 ‘배롱나무’가 됐죠. 이 나무는 붉은 꽃을 석 달 반 넘게 피워 올립니다. ‘열흘 붉은 꽃 없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과 다르지요. 그 비결은 한 송이가 오래 피는 게 아니라 여러 꽃망울이 이어 가며 새로 피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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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품격(品格)'에 입 구(口) 자가 4개인 까닭 [고두현의 아침 시편]
대나무를 그리면서 정섭 한 마디 다시 한 마디 천 가지에 만 개의 잎 내가 대나무를 그리면서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벌과 나비 수선 떠는 것 면하기 위해서라네. *정섭(鄭燮, 1693~1765): 청나라 서화가이자 문인. 묵죽(墨竹)의 대가인 정섭은 시서화(詩書畵)에 정통했습니다. 독보적 화풍에 뛰어난 시문을 자랑했지요. 그는 대나무를 아주 잘 그렸습니다. 그런데 대나무 천 가지에 만 개의 잎을 그리면서 벌·나비가 몰려들어 수선 떠는 것을 피하려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품격(品格)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판교(板橋)라는 호를 즐겨 써서 정판교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어릴 때 집이 가난해서 늦게야 과거에 급제했고, 44세에 처음으로 지방 관리가 됐습니다. 10여 년의 관직 생활 중 그는 자기 이름보다 백성들의 배고픔을 헤아리는 데 더 힘썼습니다. 어느 해 큰 재해가 들었는데, 모두가 기아에 허덕이다 뿔뿔이 흩어지고 자식까지 파는 참상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요. 그는 관청의 창고를 열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줬습니다. 아전이 “관청 창고를 마음대로 열면 관리로서 죄명을 얻는다”며 만류해도 “상부에 일일이 보고하는 절차를 밟는다면 그동안 백성이 얼마나 굶어 죽을지 모른다. 죄가 주어진다면 나 혼자 받겠다”며 쌀을 풀어 1만여 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결국 사달이 났지요. 권력가에게 미움을 산 그는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때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난득호도(難得糊塗)’입니다. 총명하기도 멍청하기도 어렵지만, 총명함에서 멍청함으로 바뀌기란 더욱 어렵다는 뜻이지요. 그의 품격을 짐작하게 하는 명언입니다.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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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달팽이 뿔싸움'과 긍정의 힘 [고두현의 아침 시편]
술을 앞에 놓고(對酒·二) 백거이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번쩍하듯 찰나에 사는 몸 풍족하나 부족하나 그대로 즐겁거늘 하하 크게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 백거이(白居易, 772~846) : 당나라 시인. 어려서부터 총명해 5세부터 시를 썼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생전에 즐겨 암송한 시입니다. 정 회장은 걱정으로 마음이 졸아들 때 이 시를 읊으며 용기를 냈습니다. 눈앞의 작은 분쟁을 경계하고 호방하게 큰일을 도모하는 지침으로 삼기도 했지요.한 몸에 난 촉수끼리 싸우다니…달팽이는 머리 위에 두 개의 촉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몸에 난 촉수끼리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될까요. 불필요한 분쟁을 의미하는 고사성어 ‘와각지쟁(蝸角之爭)’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달팽이(蝸) 뿔(角) 위에서 싸우는 것처럼 아무 소용도 없는 다툼을 뜻하지요. 에 이와 관련한 얘기가 나옵니다.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혜왕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제나라 위왕이 약속을 깨자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신하인 공손연은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치자고 했고, 또 다른 신하 계자는 백성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라며 반대했습니다. 이에 혜왕이 재상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재상은 도가의 현인인 대진인(戴晉人)을 만나보라고 했죠. 혜왕을 알현한 대진인은 달팽이 우화를 들려줍니다. “달팽이의 왼쪽 촉수에는 촉(觸)씨라는 사람의 나라가 있었고, 오른쪽 뿔에는 만(蠻)씨라는 사람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가 사소한 영토분쟁으로 전쟁을 일으켜 서로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비극에 이르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혜왕이 엉터리 이야기라고 말하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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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아빠의 한 시간'과 행복의 나이테
나이 이븐 하즘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와 이마에 팬 내 주름살을 보고는 나이가 몇이나 되냐고. 그럴 때 난 이렇게 대답하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을 헤아리고 그 모든 걸 다 합친다 해도 말이야. 아니 뭐라고요?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또 이렇게 되묻는다네. 그런 셈법을 진짜로 믿으라고요? 그러면 나는 얘기하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내 품에 살짝 안겨 은밀하게 입을 맞춘 그 순간, 지나온 날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그 짧은 시간만을 나이로 센다고. 정말 그 황홀한 순간이 내 모든 삶이니까. * 이븐 하즘(994~1064) : 중세 스페인 시인이자 역사가·법학자 누구에게나 있지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처럼 ‘짧지만 영원한’ 순간의 아름다움! 시인 이븐 하즘은 바로 그 ‘순간’들이 모여 세월의 지층을 이루고, 그 단면에 새겨진 행복의 나이테가 곧 ‘내 삶의 전부’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국에서 이런 질문으로 현상 공모를 한 적이 있는데, 1등은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이’였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집안일을 마치고 휘파람을 불며 아기를 목욕시키는 사람, 작품 완성을 눈앞에 두고 붓에 물감을 묻히는 화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땀을 닦는 외과 의사가 꼽혔습니다. 바닷가에서 평화롭게 모래성을 쌓는 아이의 표정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쉬는 날 한가롭게 집 안 정리를 끝내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목욕시키는 사람은 또 어떤가요. 콧노래나 휘파람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 그림을 그리면서 마지막 ‘화룡점정’의 순간을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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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가려운 데 말고 엉뚱한 데를 긁는 사람
이 가려움 김우태 코뿔소가 씨잉 바람을 가르며 나무둥치를 들이받는 것은 코끝이 불현듯 가려워졌기 때문이다. 벚나무가 송글송글 꽃망울을 매달고 허공을 어루만지는 것은 뿌리가 갑자기 가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동네 할아버지들이 나무둥치에 등을 비벼대는 것도 생이 참을 수 없이 가려워졌기 때문이다. 가려워서 잠 못 이루는 사람들 복권을 긁듯 뼛속까지 시원히 긁어보지만, 긁을수록 온 몸 번져 나는 꽃 반점 가려움은 끝내 재울 수 없다. 하느님도 가려우신지 봄밤 대책 없이 툭툭 불거지는 저 별들 어찌할꼬! * 김우태 : 1964년 경남 남해 출생. 부산대 국문과 졸업. 198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등. 오월문학상 수상. 김우태 시인은 1989년 등단한 이후 28년 만에 첫 시집을 펴낼 정도로 우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학 졸업반 때 처음 응모한 신춘문예에 덜컥 당선된 뒤 오히려 백지가 두려워졌다”며 “막연히 꿈꾸던 시인이 됐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게 겁이 나서 시를 쓰지 못하고 한동안 ‘사막’을 헤매고 다녔다”고 말합니다. ‘시가 내리지 않는 백지는 절벽보다 캄캄하다./새가 깃들지 않는 숲이 사막보다 적막하듯이//모래시계가 열두 번,/사막의 밤을 뒤집을 동안/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떨고 섰는 낙타야!/잔뜩 짐을 진 너의 잔등은/허물어진 사원의 종루(鐘樓)처럼 힘겹게 솟아 있구나.’(‘백지 앞에서’ 부분) 다시 시를 쓰게 된 것은 결혼하고 자식을 셋이나 낳은 뒤부터였지요.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이 완전할 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모자란 상태에서 좀 더 완전에 가까워지기 위해,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쓸 때 쓰게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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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사람을 알아보는 두 개의 눈 '안목(眼目)'
낡은 벼루 구양수 흙벽돌이나 기와가 하찮은 물건이지만 붓과 먹 함께 문구로도 쓰였다네. 물건에는 제각기 그 쓰임이 있나니 밉고 곱고를 따지지 않는다네. 금이 어찌 보물이 아니고 옥이 어찌 단단하지 않으랴만 먹을 가는 데에는 기와 조각만 못 하다네. 그러니 비록 천한 물건이라도 꼭 필요할 땐 그 값을 견주기 어려운 줄 알겠네. 어찌 기와 조각만 그렇겠는가. 사람 쓰는 일 옛날부터 어려웠더라네. * 구양수(歐陽脩, 1007~1072) : 송나라 문인 겸 정치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 살 돈이 없어 어머니가 모래 위에 써준 갈대 글씨로 공부했다. 북송 황제 휘종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림 보는 눈이 유난히 밝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화가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독특한 그림 문제를 냈습니다.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췄다’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되 특히 ‘감춰진 절’을 제대로 표현하라.” 많은 화가가 골머리를 앓다가 희미하거나 작은 절을 그려 놓는 식으로 묘사했지요. 그런데 유독 한 작품에만 절이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절 대신에 깊은 산속 계곡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스님 모습만 있었죠. 이 그림을 본 휘종은 그에게 1등 상을 주었습니다. 다른 화가들은 절과 탑을 어떻게든 화폭에 담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냥 물을 길어 가는 스님 모습만으로 근처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지요.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은 뜻이나 가치를 제대로 찾을 줄 아는 게 곧 ‘안목(眼目)’입니다. 한 단어에 ‘눈 목(目)’ 자가 두 개나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겉으로 보는 눈이고 하나는 속을 비추는 거울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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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최선과 최고…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 1939년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등 출간.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후회는 꼭 뒤늦게 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삶의 ‘노다지’인 줄 한 참 뒤에야 깨닫게 되지요. 그때 ‘더 열심히 파고들고’ 그 사람에게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하고 뉘우쳐 보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늦게라도 그걸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어쩌면 남보다 빨리 발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땅에서도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이지요. 옛사람들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해서 어떤 일에 미치지 않고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년 전에도 그런 ‘미친’ 사람들이 많았지요. 타고난 재주는 없었지만 남보다 몇십, 몇백 배 노력해 일가를 이룬 인물들…. 그중에 머리가 너무 나빠 고생하면서도 엽기적인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당대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오른 김득신(1604~1684)이 있습니다. 그는 나이 스물이 되어서야 겨우 글 한 편을 지을 정도로 ‘둔재’였지요. 우여곡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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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시간을 지배하라…하루 20분의 기적
20분고두현아침 출근길에붐비는 지하철막히는 도로에서 짜증날 때20분만 먼저 나섰어도……날마다 후회하지만하루에 20분 앞당기는 일이어디 그리 쉽던가요.가장 더운 여름날 저녁시간에 쫓기는 사람들과사람에 쫓기는 자동차들이노랗게 달궈놓은 길 옆에 앉아꽃 피는 모습 들여다보면어스름 달빛에 찾아올박각시나방 기다리며봉오리 벙그는 데 17분꽃잎 활짝 피는 데 3분날마다 허비한 20분이달맞이꽃에게는 한 생이었구나.*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우리는 1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 1년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천왕성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84년이나 걸린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감안할 때, 우리의 일생은 천왕성의 1년과 같다.먼 우주의 행성과 비교하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면 길가에 핀 달맞이꽃을 보자. 달맞이꽃에게는 20분이 한 생이다. 우리 인생은 한 번밖에 없다. 연습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는 일회성의 시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날마다 허둥대며 산다.마음먹고 하루에 20분만 아껴보자. 사흘이면 1시간, 한 달이면 10시간을 벌 수 있다. 1년이면 120시간이나 된다. 120시간은 온전한 5일이다. 남들이 쓸 수 있는 날은 1년에 365일이지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날은 370일이나 된다.날마다 허비하는 시간이 20분뿐일까.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자투리 시간들이 날마다 2시간은 된다. 그 시간을 유익하게 쓴다면 1년에 한 달을 벌 수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