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중국 장수 '관우'를 추모하는 사당이 왜 서울에 ?
■아하 ! 이런 뜻이
명나라 장수 진인은 정유재란때 일본군과 싸우다 부상을 당해 한양에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 당시 의료수준으론 생명을 잃을 확률이 높았지만 진인은 짧은 시간에 완쾌돼 전장으로 복귀하죠.

평소 관우를 숭배해온 진인은 자신이 살아난 것은 관우의 음덕이라 여겨 한양에 사당을 세워요. 그것이 지금의 서울 숭인동에 있는 ‘동묘’죠.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보물 142호 동묘(東廟)안에 있는 관우의 목조상.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보물 142호 동묘(東廟)안에 있는 관우의 목조상.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어디일까? 우리는 역사를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이 ‘역사적 진실’처럼 통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때로는 진실과 허구가 현실에서 얽히기도 한다. 서울 동대문 인근에 동묘(東廟: 1602년 건립)가 있다. 보물 142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남묘(1598), 북묘(1883), 서묘(1902) 등 관우를 모신 사당이 사방에 모두 세워졌으나 지금은 동묘만 남아 있다.

임진·정유재란의 와중에

고대 중국 장수를 기리는 사당이 한양에 세워진 연유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明)나라 지원병을 이끌고 참전한 장수 진인(陳寅) 때문이다. 진인은 정유재란(1597)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淸正)가 이끄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당하고 한양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는다. 울산에서 한양까지의 후송 거리도 거리지만 당대의 의료 수준, 위생 상태를 감안할 때 생명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놀랍게도 진인은 짧은 시간에 완쾌돼 전장으로 복귀한다.

그는 평소 관우를 무신(武神)으로 숭배했는데, 이역 땅에서 살아난 것은 관우의 음덕이라 여겨 사당을 세웠다. 평소에 지니고 다니던 관우의 조각상을 모시는 건물을 지었는데, 명나라 다른 장수들이 비용을 보태고 조선 조정에서도 힘을 보태 1598년 5월에 남관왕묘를 세웠다. 선조 35년(1602), 두 번의 왜란이 끝나고 명 황제 신종은 ‘관공(關公: 관우를 높여 부른 말)의 영령이 조선을 도왔으니 마땅히 정식 사당을 지으라’며 건립비용 4000금을 보냈다. 그 결과로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동묘다.

‘상남자의 아이콘’으로 숭배된 관우

관우는 중국에서도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공자를 문제(文帝)라고 추앙하듯이, 사람들은 관우를 무제(武帝)라고 높여 불렀다. 전장에 나간 병사들의 수호신일 뿐 아니라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병마를 물리치는 존재로 경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의리의 화신’, 본인의 이익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약속과 신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이미지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결과다.

마취 없이 어깨뼈에 묻은 독을 긁어내는 수술을 하는 중에도 호탕하게 바둑을 두며 웃었다든가, 유비(劉備)의 편지를 받자 식구들을 인솔하고 다섯 명의 적장을 베며 의형에게 돌아갔다는 무용담, 심지어는 한(漢)나라 헌제(獻帝)로부터 ‘수염이 아름다운 장수(美髥公: 미염공)’라는 별칭을 받았다는 극강 외모 전설까지, 관우는 상남자의 화신으로 꼽힌다.

문제는 많은 이야기가 지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독화살에 맞은 이야기와 미염공 칭호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삼국지연의 작가 나관중의 소설적 각색을 거친 일화일 뿐이다. 삼국지연의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인 오관육참(五關六斬)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다. 위(魏)·촉(蜀)·오(吳) 세 나라가 각축하던 삼국시대는 90년 정도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다. 역사적 격동기였고 수많은 일화가 생겨난 것은 맞지만 정통 역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 사이에는 차이가 많다.

역사서와 소설의 기록은 다르다

정사에 나오는 관우는 주요 인물이 아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1000자 미만이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탁현으로 천릿길을 도피한 도망자였다. 살인 동기나 살해한 사람의 인명은 나오지 않는다. 기록이 없을 만큼 관우나 희생자나 당시에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삼국시대라고는 하지만, 위나라의 국력이 촉나라와 오나라를 합친 것보다 언제나 훨씬 강했다는 사실도 소설을 읽은 독자에게는 다가오지 않는다.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47) 역사적 기록에는 허구가 섞여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관우의 이미지는 ‘약간의 역사적 근거’를 기반으로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되고 당나라 이후 ‘충성과 의리의 상징’ 이미지가 더해져 마침내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승화한 경우다. 진인이 지녔던 관우에 대한 ‘정신적 의지’는 허구에 바탕한 믿음이었으나 동묘는 ‘실재하는 역사’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남아 있다.

그래서 묻는다. ‘동묘 건립’은 역사에 바탕한 역사인가 아니면 허구에 바탕한 역사인가?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개인의 상상에 바탕한 사건이었다면, 허구에 바탕한 역사는 역사인가 아닌가? ‘벌어지지 않은 일’도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