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우리나라의 농지는 국가나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대부분 소유됐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이한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제가 우리나라를 전쟁을 위한 식량생산기지로 삼으면서 땅을 가진 자(지주)와 못 가진 자(소작농)의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커져 수익은 많아졌지만, 높은 소작료(생산물의 50%)를 지급해야 하는 소작농들은 땀 흘린 대가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주들의 배는 갈수록 불러만 갔고,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농민들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져만 갔다.
농민들의 불만이 높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광복 직후 남한에 진주한 미국이 실시한 여론조사의 내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미군정은 남한주민 8000여 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이념성향을 조사했는데, 응답자의 약 80%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이 지주들의 토지를 돈 한 푼 주지 않고 빼앗은 후 이를 농민들에게 대가 없이 나눠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농지개혁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미·소 간 체제경쟁이 치열했던 당시 미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미국은 남한에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자본주의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국민의 절대다수였던 농민, 그중에서도 소작농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이 선결과제임을 깨달았다. 농지개혁을 시행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1948년 시행된 미군정의 농지개혁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소유했던 남한 내 농지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농지의 가격은 해당 농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가치의 3배로 매겨졌다. 쌀로 치면 한 해 100가마가 생산되는 농지의 가격이 300가마가 된 것인데, 이를 현물로 지불하는 농민에게 땅의 소유를 이전하는 농지개혁이 시행됐다. 땅값 역시 일시불이 아니라 생산량의 20%(20가마)를 15년간 분할해 내도록 했다. 농민으로서는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예전 같으면 매년 50가마씩 평생을 지주에게 바쳐도 내 것이 될 수 없던 땅을 20가마씩 15년만 내면 내 땅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농지개혁의 결과, 30만 헥타르(㏊)에 가까운 경작지가 농민들의 소유로 이전됐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여전히 많은 농지가 지주들의 소유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들의 땅을 대상으로 하는 농지개혁은 미군정에 이어 들어선 이승만 정부에서 계속됐다. 이승만 정부는 제헌헌법 제86조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고 못 박았을 정도로 농지개혁에 대한 의지를 불살랐다. 하지만 그 방식은 미군정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일본인의 땅을 사실상 무상으로 넘겨받았던 미군정과는 달리 지주들의 땅을 유상으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땅의 가격을 농업생산물의 3배에서 1.5배로 인하하고, 땅값의 지불도 생산물의 30%를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도록 했다. 즉, 15년간 20가마를 내야 했던 미군정 때와는 달리 30가마를 5년간만 납부하면 농지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에서 훨씬 더 농민친화적인 농지개혁이 이뤄진 셈이다. 또한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시장경제의 기초적 거래규칙이 적용됐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공정하고 투명한 개혁 조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고 또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우선 195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농지개혁으로 이 땅의 거의 모든 경작지가 농민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유사 이래 가장 많은 땅주인이 동시대에 한반도에 살게 된 셈이다. 이는 지주계층이 사라지고 소작농이 자작농으로 전환됐다는 뜻으로, 사실상의 신분제 폐지 효과를 가져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농지개혁은 농지라는 재산을 사유화할 수 있는 제도적 기틀(재산권 보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체제의 초석을 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농지의 공평한 분배는 계층 간 소득 격차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를 통해 형성된 잠재적 시장수요는 이후 이어지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한편, 농지개혁의 영향은 정치경제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교육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소작농이 다수이던 시절, 그들의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교육의 수혜를 보지 못하고 살았다. 소작료를 내기에도 급급하던 농민들에게 교육을 위한 투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작농으로 전환되면서 나아진 농민들의 여건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기에 충분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함께 교육재단의 토지는 농지개혁의 대상에서 제외한 법률도 교육 발전과 이를 통한 인적자본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땅을 지키려는 열망이 강했던 재단들이 소유 토지에 학교 건립을 적극 추진하면서 교육 인프라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농지개혁은 우리나라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도록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 기회의 확대로 이어져 이후 펼쳐지는 한국 경제 성장의 추진동력으로 작용한 셈이다.
정원식 < KDI 연구원 kyounggi96@kdi.re.kr >
북한이 지주들의 토지를 돈 한 푼 주지 않고 빼앗은 후 이를 농민들에게 대가 없이 나눠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농지개혁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미·소 간 체제경쟁이 치열했던 당시 미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미국은 남한에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자본주의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국민의 절대다수였던 농민, 그중에서도 소작농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이 선결과제임을 깨달았다. 농지개혁을 시행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1948년 시행된 미군정의 농지개혁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소유했던 남한 내 농지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농지의 가격은 해당 농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가치의 3배로 매겨졌다. 쌀로 치면 한 해 100가마가 생산되는 농지의 가격이 300가마가 된 것인데, 이를 현물로 지불하는 농민에게 땅의 소유를 이전하는 농지개혁이 시행됐다. 땅값 역시 일시불이 아니라 생산량의 20%(20가마)를 15년간 분할해 내도록 했다. 농민으로서는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예전 같으면 매년 50가마씩 평생을 지주에게 바쳐도 내 것이 될 수 없던 땅을 20가마씩 15년만 내면 내 땅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농지개혁의 결과, 30만 헥타르(㏊)에 가까운 경작지가 농민들의 소유로 이전됐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여전히 많은 농지가 지주들의 소유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들의 땅을 대상으로 하는 농지개혁은 미군정에 이어 들어선 이승만 정부에서 계속됐다. 이승만 정부는 제헌헌법 제86조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고 못 박았을 정도로 농지개혁에 대한 의지를 불살랐다. 하지만 그 방식은 미군정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일본인의 땅을 사실상 무상으로 넘겨받았던 미군정과는 달리 지주들의 땅을 유상으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땅의 가격을 농업생산물의 3배에서 1.5배로 인하하고, 땅값의 지불도 생산물의 30%를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도록 했다. 즉, 15년간 20가마를 내야 했던 미군정 때와는 달리 30가마를 5년간만 납부하면 농지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에서 훨씬 더 농민친화적인 농지개혁이 이뤄진 셈이다. 또한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시장경제의 기초적 거래규칙이 적용됐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공정하고 투명한 개혁 조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고 또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우선 195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농지개혁으로 이 땅의 거의 모든 경작지가 농민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유사 이래 가장 많은 땅주인이 동시대에 한반도에 살게 된 셈이다. 이는 지주계층이 사라지고 소작농이 자작농으로 전환됐다는 뜻으로, 사실상의 신분제 폐지 효과를 가져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농지개혁은 농지라는 재산을 사유화할 수 있는 제도적 기틀(재산권 보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체제의 초석을 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농지의 공평한 분배는 계층 간 소득 격차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를 통해 형성된 잠재적 시장수요는 이후 이어지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한편, 농지개혁의 영향은 정치경제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교육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소작농이 다수이던 시절, 그들의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교육의 수혜를 보지 못하고 살았다. 소작료를 내기에도 급급하던 농민들에게 교육을 위한 투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작농으로 전환되면서 나아진 농민들의 여건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기에 충분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함께 교육재단의 토지는 농지개혁의 대상에서 제외한 법률도 교육 발전과 이를 통한 인적자본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땅을 지키려는 열망이 강했던 재단들이 소유 토지에 학교 건립을 적극 추진하면서 교육 인프라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농지개혁은 우리나라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도록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 기회의 확대로 이어져 이후 펼쳐지는 한국 경제 성장의 추진동력으로 작용한 셈이다.
정원식 < KDI 연구원 kyounggi96@kdi.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