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쿠바 혁명의 주역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최고지도자)이 지난달 25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다섯 살 위 형에게서 2008년 정권을 물려받은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이날 밤 12시 직후 국영TV를 통해 “오후 10시29분에 피델 카스트로가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카스트로는 8년 전 건강 악화로 동생에게 정권을 넘기기 전까지 600여 차례의 암살 위기 속에서도 49년간 쿠바를 통치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등 군주를 제외하고는 20세기 지도자 중 최장 기록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본인의 뜻에 따라 26일 화장됐다.
“위대한 지도자” vs “역사가 판단”
세계 각국 지도자들은 애도를 표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카스트로는 쿠바 사회주의 사업의 창건자였으며 쿠바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칭송했다. 지난해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역사가 그를 판단할 것”이라고 성명을 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자국민을 거의 60년간 억압한 야만적인 독재자의 사망”이라며 비판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카스트로는 191㎝의 큰 키만큼이나 무모하리만치 용맹했고 대담했고 타협을 모르는 고집쟁이였다”고 평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피델 카스트로가 어릴 때 자신의 패기를 보여주려 오토바이를 타고 벽으로 돌진했고, 대학생 땐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릴 정도로 운동 신경이 좋았다고 전했다.
혁명으로 정권 잡아 49년 통치
1926년 쿠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그가 정치에 눈을 뜬 것은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안고 아바나대 법대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쿠바는 1902년 형식상 독립했지만 사실상 식민통치에 가까운 미국의 내정 간섭이 계속됐다. 대학에 들어간 뒤 미국의 내정 간섭과 친미 쿠바 정부의 부패와 압제에 눈을 뜬 그는 민중 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거침없이 행동에 나섰다. 1947년 독재 치하에 고통받던 이웃 도미니카공화국 해방혁명군에 참여했고, 1948년엔 여행을 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좌익 지도자 암살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망설이지 않고 가담했다. 1952년 군부 쿠데타로 독재 정권이 들어서자 이듬해 140여명을 이끌고 1000여명의 정부군이 있는 몬카다병영을 습격했다.
체포된 뒤 법정에 선 카스트로는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말을 남겼다. 1954년 특별사면을 받아 출소한 뒤에도 그는 계속 게릴라전을 펼치며 민중의 지지를 쌓아 갔고 1959년 혁명을 성공시켜 정권을 잡아 수많은 암살 고비를 넘기며 49년간 통치했다.
뜨거워지는 변화에 대한 열망
한 시민은 “피델은 우리 세대 모두의 아버지였다”고 비통해했다. 쿠바 정부는 9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하지만 쿠바인들이 슬픔에만 잠겨 있는 것은 아니다. 변화에 대한 열망이 크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카스트로가 죽었다고 쿠바가 당장 바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과거와 단절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젊은 층에서 불만이 크다”고 전했다.
WP와 인터뷰한 쿠바 대학생은 “여기 사람들은 모두 지쳐 있다”며 “카스트로가 쿠바를 망쳐놓았다”고 말했다. 카스트로가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는 공산 혁명을 추진하면서 경제 활력이 떨어졌고 1991년 옛 소련 해체로 원조가 끊긴 뒤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해졌기 때문이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언론 자유를 억압한 것도 카스트로에 대한 불만을 높인 요인이 됐다.
개혁에 복병도 많아
카스트로 타계로 개혁이 탄력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조심스럽게 생겨나고 있다. AFP통신은 “라울이 카리스마 있는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돼 이전보다 자유롭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피델이 동생에게 권력을 물려준 뒤에도 중요한 결정에는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는 것이다.
라울은 2018년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내려놓겠다고 공언했다. 권좌를 놓고 신·구 세력, 강경·진보 세력 간 충돌이 예상된다.
트럼프 당선자의 대(對)쿠바 정책도 관건이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쿠바 정권이 정치·종교적 자유, 정치범 석방 등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뒤집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가 강경 노선을 고집하면 쿠바 내 강경파가 힘을 얻어 개혁이 늦춰질 수 있다.
임근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eigen@hankyung.com
“위대한 지도자” vs “역사가 판단”
세계 각국 지도자들은 애도를 표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카스트로는 쿠바 사회주의 사업의 창건자였으며 쿠바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칭송했다. 지난해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역사가 그를 판단할 것”이라고 성명을 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자국민을 거의 60년간 억압한 야만적인 독재자의 사망”이라며 비판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카스트로는 191㎝의 큰 키만큼이나 무모하리만치 용맹했고 대담했고 타협을 모르는 고집쟁이였다”고 평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피델 카스트로가 어릴 때 자신의 패기를 보여주려 오토바이를 타고 벽으로 돌진했고, 대학생 땐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릴 정도로 운동 신경이 좋았다고 전했다.
혁명으로 정권 잡아 49년 통치
1926년 쿠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그가 정치에 눈을 뜬 것은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안고 아바나대 법대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쿠바는 1902년 형식상 독립했지만 사실상 식민통치에 가까운 미국의 내정 간섭이 계속됐다. 대학에 들어간 뒤 미국의 내정 간섭과 친미 쿠바 정부의 부패와 압제에 눈을 뜬 그는 민중 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거침없이 행동에 나섰다. 1947년 독재 치하에 고통받던 이웃 도미니카공화국 해방혁명군에 참여했고, 1948년엔 여행을 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좌익 지도자 암살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망설이지 않고 가담했다. 1952년 군부 쿠데타로 독재 정권이 들어서자 이듬해 140여명을 이끌고 1000여명의 정부군이 있는 몬카다병영을 습격했다.
체포된 뒤 법정에 선 카스트로는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말을 남겼다. 1954년 특별사면을 받아 출소한 뒤에도 그는 계속 게릴라전을 펼치며 민중의 지지를 쌓아 갔고 1959년 혁명을 성공시켜 정권을 잡아 수많은 암살 고비를 넘기며 49년간 통치했다.
뜨거워지는 변화에 대한 열망
한 시민은 “피델은 우리 세대 모두의 아버지였다”고 비통해했다. 쿠바 정부는 9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하지만 쿠바인들이 슬픔에만 잠겨 있는 것은 아니다. 변화에 대한 열망이 크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카스트로가 죽었다고 쿠바가 당장 바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과거와 단절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젊은 층에서 불만이 크다”고 전했다.
WP와 인터뷰한 쿠바 대학생은 “여기 사람들은 모두 지쳐 있다”며 “카스트로가 쿠바를 망쳐놓았다”고 말했다. 카스트로가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는 공산 혁명을 추진하면서 경제 활력이 떨어졌고 1991년 옛 소련 해체로 원조가 끊긴 뒤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해졌기 때문이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언론 자유를 억압한 것도 카스트로에 대한 불만을 높인 요인이 됐다.
개혁에 복병도 많아
카스트로 타계로 개혁이 탄력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조심스럽게 생겨나고 있다. AFP통신은 “라울이 카리스마 있는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돼 이전보다 자유롭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피델이 동생에게 권력을 물려준 뒤에도 중요한 결정에는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는 것이다.
라울은 2018년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내려놓겠다고 공언했다. 권좌를 놓고 신·구 세력, 강경·진보 세력 간 충돌이 예상된다.
트럼프 당선자의 대(對)쿠바 정책도 관건이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쿠바 정권이 정치·종교적 자유, 정치범 석방 등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뒤집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가 강경 노선을 고집하면 쿠바 내 강경파가 힘을 얻어 개혁이 늦춰질 수 있다.
임근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