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저 멀리 막연한 곳이 아닌 우리 곁에서 피어나는 것
사랑에 빠져 번민하는 소년

토니오 크뢰거는 ‘사랑은 많은 고통과 불행과 굴욕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깨뜨린다’ 고 생각하는 남자 아이다. 하지만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풍족하고 생기있게 하기에 기꺼이 빠져든다. 열네 살의 토니오는 남학생 한스 한센을 사랑한다. 벌어진 어깨, 날씬한 허리, 뛰어나게 잘 생긴 한스로 인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자이며 고민해야 한다’는 가혹한 사랑의 교훈을 깨닫는다.

열여섯 살에는 여학생 잉게부르크 호름에게 한 순간에 끌린다. 시내 일류 가정의 자녀들만 모여 댄스를 배우던 날, 실수를 하여 웃음거리가 되지만 미소를 머금은 길쭉한 푸른 눈, 콧등에 연하게 주근깨가 앉은 금발의 잉게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성적도 나쁘고 선생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토니오는 ‘어차피 유별난 점이 있고 고독하며,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며 자작시를 쓰는 일에 열중한다.

아들의 성적에 신경쓰는 아버지 토니오 영사는 건실한 생활인이고 어머니는 남쪽 출신으로 피아노와 만돌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예술가 기질을 가졌다. 좋은 가문과 유복한 환경 속에 살았던 토니오에게 불행이 닥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자 대저택이 팔리고 상회는 해산한다. 어머니마저 재혼하자 토니오는 여러 대도시와 남국을 떠돌며 산다.

자신이 쓴 글이 활자화되어 잉게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토니오는 소망대로 작가가 되었다. 중편 분량의 이 소설 앞부분에는 소년 토니오의 복잡함이 담겨 있고 중간 부분은 예술가로서의 고뇌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여자 친구인 화가 리자베타 이자노브나와 나누는 얘기 속에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 고민이 실려 있다.

토니오는 생활인이 아닌 창작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좋은 작품은 다만 어려운 생활의 압박 하에서 생긴다는 것, 산 사람은 창작을 하지 못하며, 창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죽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실하고 건강하며 얌전한 인간은 결코 글을 쓰거나 연출하거나 작곡 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면서 ‘형법을 범하지 않은, 비난할 여지도 없고, 착실한 은행가로서 소설을 쓰는 인간은 절대로 없다’는 게 토니오의 판단이다. 외톨이로 살아가는 토니오에게 문학은 천직이 아닌 저주이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생활과 예술에 대한 고민으로 갓 서른을 넘긴 토니오는 ‘원기왕성하지 않고 좀 늙었으며 선이 날카롭고 피곤해 보이는 모습’으로 변했다.



해변호텔에 나타난 한스와 잉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토니오는 13년 만에 고향을 찾아간다. 서민문고로 바뀐 예전의 저택을 찬찬히 돌아본 뒤 해변 호텔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한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손님이 그 호텔에 투숙하여 댄스 파티를 열게 된다. 댄스 파티를 지켜보던 토니오는 함께 등장하는 한스 한센과 잉게부르크 호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애닯게 사랑했던 두 사람을 보면서 토니오는 ‘당당하고 유쾌하며 순박하고 정규적이고 질서정연하고 신과 세속과 화합해서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들을 사랑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을 몰라보는 두 친구에게 끝내 인사를 건네지 않은 토니오는 리자베타에게 곧 돌아가겠다며 편지를 쓴다. ‘금발에 파란눈을 한 명랑하고 활달하며 행복한, 사랑스러운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선량한 결실을 가져올 애정을 깨달았다’고.



예술가의 고뇌를 담은 작품

<토니오 크뢰거>는 한 소년이 성장기에 겪은 사랑과 아픔이 30대에 예술관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사상적 깊이와 탁월한 식견,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는 20세기 독일 최고의 작가, 독일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토마스 만은 1955년 80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토니오 크뢰거>는 토마스 만이 28세에 발표한 작품으로 ‘토마스 만의 전 작품을 세계 독자와 역사라는 여과기를 거친다면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라는 평가가 따라 다닌다. ‘예술성과 시민정신’이라는 예술가들의 고뇌를 잘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거친 예술을 지향한 토마스 만은 ‘인간적이고 생동하는 것 그리고 일상적인 것에 대한 사랑, 즉 시민적인 사랑이 없이는 진정한 작가로 거듭날 수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북 독일의 전형적인 인물인 아버지 아래서 건실한 시민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자신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우울하고 심란하게 자란 토니오, 작가가 되어서도 예술과 생활 속에서 방황하며 ‘길 잃은 시민’으로 산 복잡한 인물이다.

예술을 선망하다 갈등을 겪는다면 토마스 만이 제시한 ‘시민적 사랑을 지닌 예술가의 길’을 탐구해보라. 예술은 아슴프레한 곳에서 애매하게 도래하는 것이 아닌 삶 속에서 꽃핀다는 것, 그것이 토니오 크뢰거가 하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