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문학은 기업 현장에서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화두 중 하나로 대두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도 나름의 시사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내용들을 발굴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 역사 속에는 내놓을 만한 경제학자가 없다 라던가 혹은 시장경제가 발달한 적이 없어 아쉽다는 토로를 하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이와 유사한 편견 내지 고정관념을 가진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나마 광해군이 없었다면 이들 학자들과는 대화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광해군을 기억할 때, 비운의 왕 내지 패륜적 행위를 자행한 왕 정도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적장자가 아니었던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세자에 책봉되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직전까지 적자가 없어 세자를 책봉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급해진 신하들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적장자가 아닌 광해는 끊임없이 왕권에 위험을 받아 왔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위 등의 패륜적 행위를 자행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광해는 시장 경제가 활발하지 않았던 이 땅에 최초로 다양한 상거래 활동이 유발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 임금이자 활발한 시장경제 기능을 부여했던 최초의 경제대통령이었다.
그가 이처럼 시장경제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이전까지 조선의 조세 징수 방식은 전세, 공납, 역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어 징수되었다. 먼저 전세란 자신의 토지에서 나온 생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조세제도를 말한다. 공납은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조세제도이고, 역은 자신의 노동력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조세제도이다. 전세, 공납, 역으로 구분되어 시행되었던 조세제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6세기에 들어와서 크게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공납으로 각 지방의 수확량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으로 징수 규모를 지정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커다란 어려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공납을 대신 납부해주는 방납업자가 생겨나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들 방납업자 역시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보다는 오히려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원흉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방납업자가 지방관과 결탁하여 자신들을 통해서만 특산물을 납부 받도록 유도하여 폭리를 취하기도 하였다. 광해는 당시 조세제도가 이러한 폐단을 갖고 있음을 간파하고, 조세 납부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편하였다. 모든 조세는 토지 1결당 12두를 기준으로 쌀로 납부하는 대동법이 바로 그것이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실시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복잡다기한 조세 징수 방식을 일원화하고 이 과정에서 조세 징수로 인한 폐단을 막고, 그 과정에서 기층민들의 조세 징수 부담을 낮추어주기 위한 의도였다. 기존의 공납은 조세 징수의 기준이 가구 단위였다. 따라서 토지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가구당 부담은 동일했다. 그러나 대동법은 조세 징수의 기준이 토지였다. 다시 말해 토지 소유주에게만 1결당 12두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러한 조세 징수 방식의 전환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기층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줌과 동시에 지주들에게는 세금 부담을 늘려 소득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는 최근 해외에서도 이슈화된 바 있는 부자세와 그 맥을 같이 한다 할 것이다.
하지만 대동법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동법은 이후 조선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문화, 신분제 등에 커다란 변화를 유도하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공납 형태로 국가가 조세를 징수한 것은 국가에서 필요한 다양한 생필품들을 공납을 통해서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도입된 이후 모든 조세가 쌀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다시 민간으로부터 구입해야만 했다. 이때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납부해 준 이들이 바로 공인들이다. 또한 공인들은 조선에 상거래의 활성화 및 상품화폐의 발달을 가져다 준 주역이었다.
일견 극소수의 공인들과 국가 간의 거래가 국가 전반의 시장 기능 활성화에 무슨 그리 큰 도움이 되었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공인들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대규모로 구매하였다. 이에 공인들은 대규모 납품을 위해 다시 민간으로 하여금 대규모 생산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문 납품업자가 생겨나게 되고, 상거래가 활성화된 것이다. 따라서 이전과는 달리 많은 백성들은 특정 재화나 서비스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형태로 경제활동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나머지 물품들은 시장을 통해서 화폐를 사용해 구입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생산 내지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해 주는 금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은 모두 대동법으로 인한 조세제도의 변화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대동법의 성과는 경제 이외의 분야까지 이어진다. 가장 먼저 신분제도에 변화를 가져다 주는데, 시장경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한 중인 계층 중 일부가 양반 신분을 돈을 주고 사기 시작하며, 양반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관직을 돈을 주고 사는 공명첩 제도 역시 대동법 이후에 시행된 제도였다. 또한 구매력을 갖춘 신흥 중인 계층들은 새로운 문화 소비 집단으로 대두되면서 이들을 상대로 한 풍속화 내지 한글 소설들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들 역시 대동법 이후의 작품들이며, 영화 광해에서 배우 류승룡이 연기한 인물 역시 서민문학의 효시를 열었던 홍길동의 작가인 허균이었다.
이처럼 대동법은 조세제도 본연의 기능인 소득재분배 역할뿐만 아니라 상거래 및 화폐경제 활성화 및 문화예술의 발달마저 가져온 우리 역사의 가장 성공적인 경제정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을 기득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킨 광해야말로 경제적 관점에서는 가장 높은 성과를 보인 임금이라 할 수 있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
그가 이처럼 시장경제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이전까지 조선의 조세 징수 방식은 전세, 공납, 역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어 징수되었다. 먼저 전세란 자신의 토지에서 나온 생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조세제도를 말한다. 공납은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조세제도이고, 역은 자신의 노동력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조세제도이다. 전세, 공납, 역으로 구분되어 시행되었던 조세제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6세기에 들어와서 크게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공납으로 각 지방의 수확량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으로 징수 규모를 지정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커다란 어려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공납을 대신 납부해주는 방납업자가 생겨나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들 방납업자 역시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보다는 오히려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원흉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방납업자가 지방관과 결탁하여 자신들을 통해서만 특산물을 납부 받도록 유도하여 폭리를 취하기도 하였다. 광해는 당시 조세제도가 이러한 폐단을 갖고 있음을 간파하고, 조세 납부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편하였다. 모든 조세는 토지 1결당 12두를 기준으로 쌀로 납부하는 대동법이 바로 그것이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실시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복잡다기한 조세 징수 방식을 일원화하고 이 과정에서 조세 징수로 인한 폐단을 막고, 그 과정에서 기층민들의 조세 징수 부담을 낮추어주기 위한 의도였다. 기존의 공납은 조세 징수의 기준이 가구 단위였다. 따라서 토지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가구당 부담은 동일했다. 그러나 대동법은 조세 징수의 기준이 토지였다. 다시 말해 토지 소유주에게만 1결당 12두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러한 조세 징수 방식의 전환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기층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줌과 동시에 지주들에게는 세금 부담을 늘려 소득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는 최근 해외에서도 이슈화된 바 있는 부자세와 그 맥을 같이 한다 할 것이다.
하지만 대동법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동법은 이후 조선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문화, 신분제 등에 커다란 변화를 유도하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공납 형태로 국가가 조세를 징수한 것은 국가에서 필요한 다양한 생필품들을 공납을 통해서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도입된 이후 모든 조세가 쌀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다시 민간으로부터 구입해야만 했다. 이때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납부해 준 이들이 바로 공인들이다. 또한 공인들은 조선에 상거래의 활성화 및 상품화폐의 발달을 가져다 준 주역이었다.
일견 극소수의 공인들과 국가 간의 거래가 국가 전반의 시장 기능 활성화에 무슨 그리 큰 도움이 되었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공인들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대규모로 구매하였다. 이에 공인들은 대규모 납품을 위해 다시 민간으로 하여금 대규모 생산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문 납품업자가 생겨나게 되고, 상거래가 활성화된 것이다. 따라서 이전과는 달리 많은 백성들은 특정 재화나 서비스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형태로 경제활동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나머지 물품들은 시장을 통해서 화폐를 사용해 구입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생산 내지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해 주는 금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은 모두 대동법으로 인한 조세제도의 변화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대동법의 성과는 경제 이외의 분야까지 이어진다. 가장 먼저 신분제도에 변화를 가져다 주는데, 시장경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한 중인 계층 중 일부가 양반 신분을 돈을 주고 사기 시작하며, 양반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관직을 돈을 주고 사는 공명첩 제도 역시 대동법 이후에 시행된 제도였다. 또한 구매력을 갖춘 신흥 중인 계층들은 새로운 문화 소비 집단으로 대두되면서 이들을 상대로 한 풍속화 내지 한글 소설들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들 역시 대동법 이후의 작품들이며, 영화 광해에서 배우 류승룡이 연기한 인물 역시 서민문학의 효시를 열었던 홍길동의 작가인 허균이었다.
이처럼 대동법은 조세제도 본연의 기능인 소득재분배 역할뿐만 아니라 상거래 및 화폐경제 활성화 및 문화예술의 발달마저 가져온 우리 역사의 가장 성공적인 경제정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을 기득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킨 광해야말로 경제적 관점에서는 가장 높은 성과를 보인 임금이라 할 수 있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