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

정규재(한국경제신문 주필)
[포커스] 종북 교과서들의 북한 토지개혁 기술(記述)
중국이 국가 소유체제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이다. 자유시장은 독재와 양립할 수 없다. 2013년 11월 소위 3중전회(三中全會)가 발표한 경제개혁 3개 항은 그런 모순을 시정해보려는 절망적 노력이었다. 여러 건의 들러리 논문과 보고서들이 발표된 다음 확정된 3중전회 시정방침은 세 가지다.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자원배분을 결정한다’는 첫째 항목은 자유시장경제를 해보겠다는 의지처럼 읽히기도 했다. 좋은 충격이었다. 제2항은 중앙과 지방의 법률적 격차를 없애고 전국을 동일한 법치로 묶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항목이다. 3항은 ‘농촌과 도시는 하나다’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구호로 돼 있다. ‘도시와 농촌에 통일된 토지시장을 허용하겠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려면 그 아래 설명을 또 읽어 봐야 한다. ‘농민에게 토지 경작권뿐만 아니라 토지 처분권도 주겠다’는 설명이 따라 나온다. 아! 비로소….

중국은 1958년 토지를 국유화했다. 그러나 악덕 지주의 땅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토지개혁은 결과적으로 사기극이었다. 공산당은 심지어 경작권도 준 적이 없다. 공산당의 토지개혁은 농민을 영구히 토지에 얽어매는 ‘농민의 농노화’였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당연히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 토지를 떠날 수 없고 할당된 구역에서 토지를 경작해 소출을 국가에 바칠 의무만 주어진다. 농민 곧, 농노인 것이다.

3중전회가 농촌토지 문제를 들고나왔던 것은 이 모순을 풀어보자는 것이었다. 중국은 무려 2억명에 달하는 농민공을 안고 있다. 농민공이 단순히 농촌을 떠나 도시 공장에 다니는 이농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단으로 도시로 이주해 공장에 다니는, 소위 농지 이탈자가 바로 농민공이다. 이들은 도시의 불법 체류자들이다. 당연히 주민등록도 없고 시민의 권리도 복지 혜택도 없다. 아이들을 도시 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중국은 이 2억명의 농민공이 곧 4억명으로 불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권리 구제와 피해 예방이 바로 3중전회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위의 제3항은 이탈 농민에게도 자신이 부쳐 먹던 토지를 저당잡혀 자금을 융통할 수 있도록 새로 소유권을 설정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처럼 쉽게 되지 않고 있다. 농촌에 계속 머물러온 착한(?) 농민들과 지역의 집단적 정치단위들이 이런 조치를 수용하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토지소유권 분쟁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좌익 교과서들이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쓰는 것은 집필자들의 무식 때문이다. 소련 치하 김일성 정권의 소위 토지개혁은 1946년의 일이었다. 이는 북한의 정권 수립 연도가 48년이 아니라 46년이며, 분단의 책임도 이 시기 북한으로 거슬러 간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공산국가의 실체는 인민위원회다. 북한의 정권 수립은 46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승만은 50년 봄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진짜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농지 가격은 1년 소출의 150%였다. 지주에게는 지가증권이 쥐어졌지만 전시 인플레로 채권값은 4분의 1로 떨어졌다.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상강탈이라고 쓰는 것은 맞지만 무상분배 혹은 경작권이 주어졌다고 쓰면 이는 거짓말이다. 경작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북한의 토지개혁이 남한보다 잘된 것처럼 쓰는 것은 흰소리다. 이는 유신을 개발독재로 쓰지 않고 한국적 민주주의로 쓰자는 것과 같다.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쓰는 것이 독재 옹호이듯이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쓰는 것은 친북 성향을 드러낼 뿐이다.

북한은 처음에는 농민들로부터 소작료 25%를 받았다. 50%를 받던 지주에 비해 자비롭게 보였다. 그러나 중국과 같은 해인 1958년 전체 농지를 국유화했다. 농민에게는 서서히 가난과 기아가 강요됐다. 김일성 정권이 바로 악덕 지주요 거대한 착취자였던 것이다. 북한에는 농민공 같은 문제조차 없다. 지상낙원 북한에는 공장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