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경제의 만남 (83)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일생을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나의 스승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다. 나의 의술을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베풀겠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겠다. 나의 환자에 관한 모든 비밀을 절대로 지키겠다.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다. 나는 동료를 형제처럼 여기겠다. 나는 종교나 국적이나 인종이나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겠다. 나는 생명이 수태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최대한 존중하겠다. 어떤 위협이 닥칠지라도 나의 의학 지식을 인륜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의 명예를 걸고 위와 같이 서약한다.”이상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제네바 선언(Declaration of Geneva)’의 전문이다.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의사협회에서 채택된 이 선언문은 의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학 윤리를 서약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Oath of Hippocrates)’를 현대에 맞게 수정한 것이 바로 이 제네바 선언이다.
그렇다면 히포크라테스와 의사협회는 사람들이 의사의 길로 들어서기 전 왜 이러한 선서를 낭독하게 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아마도 과거 주술이나 마법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의학을 과학의 분야로 인식시키기 위해 이 같은 선서를 낭독하게 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사람의 질병은 기도를 드리고 주문이나 외운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받은 전문가가 이론적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펼쳐야 하는 기술적 행위임을 천명하기 위해 선서를 하게 했던 셈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의사의 본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의술을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베풀겠다고 한 부분이나 종교나 국적, 사회적 신분 등을 초월하여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또한 의학 지식을 인륜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다고 한 부분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다. 즉, 의학이 가진 힘과 의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가 때로는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비슷한 교육 수준의 다른 직종보다 많은 임금을 받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2011년에 조사된 직업별 평균연봉을 살펴보면 성형외과, 외과, 치과 등 9개 분야의 의사 연봉이 상위 20위 안에 든 것으로 나타났다. 고액연봉 직종의 절반 가까이가 의사였던 셈이다. 또한 의사들은 정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여건만 허락한다면 원하는 시점까지 일을 계속하며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결국 의료사고라도 발생하는 날에 지게 될 민형사상의 책임과 환자를 해하였다는 죄책감에 느끼게 될 죄의식까지. 의사라는 직업에 수반되는 막대한 책임감이 어떠한 형태로든 상쇄되지 않는다면 인류애적 봉사정신이 투철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선뜻 의사를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의사들이 받는 높은 연봉은 의술을 행함에 있어 느끼게 되는 이러한 책임감과 부담감에 대한 반대급부의 일종인 것이다.
이처럼 어떤 직업이 가진 특성 때문에 그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임금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경제학에서는 이를 ‘보상적 임금격차’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한 건물의 환경미화를 담당하는 사람이 두 명 있다고 하자. 이들 중 누군가는 건물의 외벽을 청소해야 한다. 만약 어느 곳을 청소하든 같은 임금이 주어진다면 두 명 모두 건물 내부를 청소하려 할 것이다. 이때 만약 건물주가 외벽을 청소하는 사람에게 높은 임금을 준다는 제안을 하면, 누군가 건물 외벽을 청소하려 할 수도 있다. 외벽을 청소하는 데 비록 어려움과 위험이 따르지만 높은 임금에서 더 큰 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힘들고, 위험하고, 불쾌한 직업에는 이를 상쇄할 임금의 보상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보상적 임금격차라고 하는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에 보상적 임금격차가 발생하는 이유는 비단 높은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대학교교육협의회에서 공시한 전국 38개 의과대학의 등록금을 살펴보면, 2015년 의과대학의 평균 등록금은 936만원으로 조사됐다. 가장 비싼 연세대 고려대는 한 해 등록금이 1200만원을 넘어섰고 국립대인 서울대도 990만원에 육박했다. 4년제 대학의 평균 등록금이 약 664만원이었으니 의사가 되려면 다른 학생에 비해 약 1.4배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의과대학은 6년제로 운영되고 있어 평균적으로 학부 과정을 끝마치는 데만 해도 6000만원가량의 학비가 소요된다. 물론 공부라도 잘해 상위권 대학의 의과대학을 가는 날이면 대학 졸업 때까지 7000만원 이상의 등록금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에 책값과 용돈, 생활비까지 고려하면 의사가 되는 첫 관문을 통과하는 데에만 최소 1억원 남짓한 막대한 투자가 요구된다. 이처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교육에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이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게 되는데, 이러한 비용을 높은 임금으로 회수하고자 보상적 임금격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메르스 사태에서 확인했듯이 의사라는 직업은 질병과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로, 다른 직업에 비해 건강에 위험하고 근무 조건도 썩 좋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웬만한 용기로는 보기 힘든 심한 상처를 밥 먹듯 봐야 하는 직업이 의사이고, 진료 과목에 따라서는 사람의 피를 매일 보며 생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의사가 느끼는 막중한 책임감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열악한 근무 환경이 의사의 연봉이 높은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또한 의사가 되기까지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비교적 높은 것도 의사들에게 보상적 임금격차를 지불해야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 대한 차별적 행위는 사회 분열을 초래해 사회구성원의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결국 해당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쉽다. 따라서 차별은 끊어야 할 폐풍이자 근절해야 할 사회의 악습이다. 하지만 노동시장의 임금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보상적 차원의 임금 차별은 반드시 필요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자신 있게 다른 사람의 생명에 칼을 들이댈 수 있겠는가. 그저 감사의 인사만으로 때우기에는 사람의 생명은 너무나 고귀하다.
■보상적 임금격차
직업에 따라서는 고용이 불안정하거나 노동의 강도가 센 경우가 있다. 또한 작업 환경이 상대적으로 쾌적하지 않고, 요구되는 기술이나 지식이 높아 재교육을 받거나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직업 특성상 차이는 임금의 보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이때 발생하는 임금의 차이를 보상적 임금격차라고 한다.
정원식 < KDI 전문연구원 kyonggi96@kdi.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