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11) 사익과 공익

1800년간 '0%'에 그쳤던 성장률
시장경제 도입후 200년간 부 10배 급증

자발적 거래, 결국 공익으로 연결
잘못된 인식 바꿔야 경제성장 지속
[세계 경제사] "쌀값 오른다고 시장 단속하면 혼란만 커져"…220년 전 연암도 외쳤던 '사익의 공익 기여'
“전하, 흉년이 들어 서울의 곡물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장사치들이 매점매석을 일삼고 있습니다. 곡물 가격을 엄히 통제하고 매점매석을 하는 장사치들을 엄벌에 처해야 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옛사람이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그 흐름을 교란하지 말라고 경계한 까닭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상인이란 싼 곳의 물건을 가져와 비싼 곳에다 파는 존재이며, 백성과 나라는 그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진실로 장사하는 데 이익이 없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게 뻔합니다. 무엇 때문에 값을 내려서 팔려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 명령을 시행한다면 서울 상인들은 장차 곡물을 다른 데로 옮겨가 버릴 것입니다. 또 매점매석을 막는다면 서울로 오던 사방의 곡물상들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필시 다시는 서울로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울의 식량 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세계 경제사] "쌀값 오른다고 시장 단속하면 혼란만 커져"…220년 전 연암도 외쳤던 '사익의 공익 기여'
조선 정조대왕 시절이던 1791년 심각한 흉년이 들어 서울에 쌀이 크게 부족한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히 가격이 치솟았고, 백성들의 불만도 높았을 것이다. 흉년을 틈타 이익을 챙기려는 상인들을 질타하면서,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대신들의 생각이라 해서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단 한 사람 연암 박지원(1737~1805)만은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나섰다. 그는 시장가격을 통제해 가격을 강제로 낮춰버리면 서울로의 식량 유입이 중단돼 식량 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상인들의 이익추구가 백성과 나라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연암의 이런 주장을 믿고 따라 준 정조대왕 덕분에 서울의 식량 사정은 곧 회복됐다고 한다.

사익(私益)의 추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드는 커다란 힘을 가진다. 그냥 행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런 사정은 1878~1903년 교황을 지냈던 레오 13세도 긍정하고 있다. “일한 결과를 자신이 가져갈 수 있을 때 사람들은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자발적으로 일한다.” 이런 개인의 사익추구는 한발 더 나아가 사회 전체적으로는 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막강한 원동력이 된다. 사익추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이래 세계 경제가 극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유사 이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제로(0)퍼센트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인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본격화된 후에야 비로소 1.21%의 성장률을 보이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이로써 수천년간 제자리에 머물던 1인당 GDP도 200년 만에 열 배나 급증하는 기적을 보였다. 세계 인구도 대폭 증가한 것은 물론이다.

연암은 시장 역할과 개인의 사익추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220여년 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제가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있던 시절에 이런 안목을 가졌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저술하면서 개인의 사익추구가 공익에도 이바지한다고 한 것이 1776년의 일이다. 연암의 안목과 비교할 때 20여년의 차이가 날 뿐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모든 자본을 가장 큰 이득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자신의 이득이지 사회의 이득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득에 관한 연구를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오히려 필연적으로, 사회에 가장 이득이 되는 이용 방안을 선호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의 말과 박지원의 말은 일맥상통한다. 사익추구가 곧 공익에도 공헌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 즉 사회나 국가 전체의 이익도 증진시키는 과정을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표현했다. 쌀을 생산하는 농민이나 고기를 제공하는 축산업자는 원래 자신이 이익을 얻고자 물건을 생산하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 소비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밥상을 풍부하게 만들어 사회 전체의 이익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나아가 애덤 스미스는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의 사업이나 정책보다도 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가 사회에 더 많이 공헌한다고 보았다.

200여년도 훨씬 이전인 18세기에 살았던 옛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이런 ‘진리’를 21세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사익과 공익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태풍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의 물가폭등과 이로부터 이익을 얻는 상인들에 대해 은근히 질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익추구가 공익을 해친다는 것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다. 18세기 조선시대에 살았던 연암이 들어도 코웃음 칠 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사익추구가 공익 실현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근저에는 시장에서의 거래 특성에 대한 무지나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 시장 거래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며, 그렇기 때문에 거래가 성사됐다는 말은 거래에 참여한 모두가 그 거래로부터 이익을 얻게 된다는 말과 같다. 즉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거래가 이뤄지지만 이 과정에서 타인의 이익도 자연스럽게 충족시켜준다. 거래는 일방적이 아닌 상호적이다.

시장에서는 이런 상호 이익 주고받기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사회 전체의 이익도 증대된다. 사익추구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협력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공익의 실현에도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시장경제가 보여주는 기적이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