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경제의 만남 (73)
원래 특정 분야의 학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경제학 역시 학문적 고유의 영역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경제학을 보면 점점 그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확장되고 있는 듯하다. 일례로 경제학은 기존 경제학의 논의 대상이었던 소비, 투자, 금리, 물가, 세금 등에서 벗어나 생물학의 학문적 대상이었던 생태계 현상을 경제학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는가 하면 종교 문제 등에 대해서도 논의의 폭을 넓히고 있다.경제학적 담론의 대상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희소성에 있다. 희소성을 갖고 있는 자원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하는 대상 즉, 경제학적 논의가 필요한 대상을 우리는 경제재(economic goods)라 부른다. 반면 무한정 존재해 희소하지 않아 경제적 논의가 필요하지 않는 대상을 우리는 자유재(free goods)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재화의 경우 부존량이 너무 많아서 누구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재화가 있다. 이를 자유재라고 한다. 시대 상황 따라 달라지는 재화구분
공기는 부존량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누구나 사용해도 늘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공기는 시장에서 가격이 형성되고 거래되는 재화가 아니다. 이와 달리 사람들의 욕구에 비해 자원의 존재량이 적어 희소성이 있는 재화를 경제재라 한다. 경제재는 시장에서 가격이 형성되고 거래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재화는 경제재로 볼 수 있다.
자유재와 경제재의 또 다른 특징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한때 희소한 경제재여서 이용하기 위해서는 돈을 주고 구입해야만 했던 것이 누구나 맘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자유재로 변하기도 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지식재산권 보호 기간이 만료된 기술 내지 저작물이 해당한다. 특허나 저작권으로 보호받았던 특정 기간이 만료된 기술이나 저작권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다. 우리가 고전 문학작품을 출판하면서 저자 내지 저자의 유가족에게 인세 등을 지급하지 않고 편히 출간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시대 상황이 변화해 자유재에서 경제재로 바뀌는 재화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모래다. 모래라고 하면 길에서 흔히 얻을 수 있는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하지만 최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심지어 무가치하게 보이는 모래는 최첨단 정보기술(IT)의 주원료로 활용되고 있다. 원래 모래는 콘크리트 골재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모래에 대한 활용폭이 점차 넓어져 반도체와 자동차산업의 핵심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모래 그 자체를 쓰면 값어치가 낮지만 화학처리나 가공과정을 거치면 몸값은 천정부지다. 액정표시장치(LCD) 유리기판의 핵심 소재도 모래다.
귀한 재화 된 모래와 물의 변신
현재 한국은 질 좋은 모래를 구하기 어려워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바닷가 모래는 채취가 끝났거나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 때문에 채취하기 쉽지 않다. 과거 안면도나 주문진 앞바다 모래를 일부 사용한 바 있지만 요즘은 경기 가평 광산을 비롯한 산에서 나오는 규암을 잘게 부순 것으로 수요를 일부 충당하고 있다. 제철소에서 주로 쓰는 화재방지용 벽돌은 국산 모래로는 만들 수 없어 외국에서 수입한다. 이런 상황으로 현재 국내에는 모래를 전문으로 수입하는 업체도 20여개에 이른다.
모래처럼 특정 재화가 자유재에서 경제재로 바뀔 경우 이는 새로운 직업이 생기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자유재에서 경제재로 바뀐 또 다른 재화인 물만 봐도 알 수 있다. 과거 한국은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하여 어디서나 쉽게 맑은 물을 구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맑은 물이 자유재였던 셈이다. 반면 요즘은 환경오염으로 맑은 물을 마시기 위해 정수기를 사용하거나 돈을 주고 생수를 구매하고 있다. 자유재가 경제재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물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이 생겨나고 있다. 워터소믈리에, 워터어드바이저, 워터스튜어드, 워터웨이터, 워터매니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원래 소믈리에는 호텔 식음료와 케이터링(catering) 분야의 와인 전문가를 지칭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고 있는데, 사람들의 건강과 웰빙에 대한 염려가 커지며 핵심 요소인 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좋은 물, 나에게 적합한 물을 추천해 주는 워터소믈리에도 등장하게 됐다. 워터소믈리에라는 직업은 2000년 미국 맨해튼 리츠칼튼호텔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와인 소믈리에가 물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생성됐다고 한다. 한국에도 2007년 워터소믈리에라는 직업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2011년 3월부터 (사)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의 자문을 받아 공식적으로 워터소믈리에 교육이 시작됐다고 한다. 현재 워터소믈리에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민간자격증으로 등록된 공식적인 직업이 됐다.
워터소믈리에 등 새 직업 탄생
워터소믈리에가 서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워터어드바이저는 추천에 좀 더 집중하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물맛은 산도와 염분에 따라 달라진다. 칼슘, 마그네슘 등 무기물의 종류나 함량에 따라 알칼리성의 정도가 결정된다. 이렇게 알칼리성 정도에 따라 입 안에 넣었을 때 맛과 질감이 달라진다고 한다. 워터어드바이저는 바로 고객이 원하는 물을 추천해주는 역할을 주로 한다. 예를 들어 피부에 좋은 물을 추천받고 싶은 고객에게는 실리카(silica)라는 이산화규산이 포함된 물을 추천해주고, 아기에게 적합한 물을 추천받고 싶은 고객에겐 미네랄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들어있고, 물의 분자구조가 작은 약알칼리성의 물을 추천한다고 한다.
음식에 따라 적합한 물을 추천해주기도 하는데, 육류에는 탄산과 미네랄 함량이 많은 경수를 추천하거나, 채소류에 가까운 음식을 먹을 때는 미네랄 함량이 적은 연수를 추천해 준다. 약간의 탄산이 있는 물은 채소를 더욱 싱싱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산물은 중간 정도의 탄산 함량을 가진 물이나 해양심층수가 어울린다.
워터소믈리에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미묘한 물맛을 감별하기 위한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워터소믈리에가 금연은 기본이고, 심지어 자극적인 주전부리인 껌 사탕 초콜릿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술 또한 가급적 마시지 않으며, 심지어 국은 먹되 양념장으로 나오는 간장 고추장 된장도 자제한다고 하니 워터소믈리에로 활동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건강에 대한 관심은 향후 지속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물에 대한 관심도 함께 많아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워터소믈리에의 역할 또한 점점 커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 경제재
경제재는 어떤 대가를 지급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재화로 일상생활에서 거의 모든 재화는 경제재라고 할 수 있다. 즉 경제학이 연구하는 ‘한정된 자원’을 의미하며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 옷, 책 등의 재화와 이발, 버스나 지하철 이용 등 돈을 지급하고 받는 서비스 등 대부분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경제재에 해당한다.
■ 자유재
경제재의 반대 개념으로 공기나 햇볕처럼 공급이 매우 풍부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재화를 말한다. 자유재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경제문제를 일으키지 않음은 물론 희소성의 원칙도 적용되지 않는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