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경제의 만남] (46) FTA의 수출도우미 '원산지 관리사'
[직업과 경제의 만남] (46) FTA의 수출도우미 '원산지 관리사'
2013년 3월, 한국 관세청은 미국산 수입 완성차에 대한 대규모 원산지 검증 조사에 나섰다. 2012년 발효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따라 미국에서 조립된 자동차라도 내부 구성품이 일정 비율 이상 미국산이 아니면 관세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통상 자동차 원가의 절반 이상(55%)이 미국산이어야 관세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일본 자동차 회사의 차량이 엔화 강세를 피해 미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자 우리나라 관세청이 원산지 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이러한 원산지 증명은 한국 상품도 예외가 아니다. FTA 체결국 세관에서 우리나라 제품의 원산지 확인서를 살펴보고, 규정에 어긋났다고 판단되면 세관에 검증을 요청하거나 직접 해당 업체를 조사하게 된다. 그 결과 원산지가 아니라는 판명이 나면 기업은 그동안 감면받았던 세금을 모두 반납해야 한다. 문제는 원산지 증명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하다는 점에 있다. 또한 FTA 체결국마다 원산지 규정이 달라 해당 국가에 맞는 원산지 증명은 매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국가가 2004년 칠레를 시작으로 전 세계 47개국이라는 점은 한편에서는 어려움을 가중시킨다고 할 수 있다.

원산지 증명 못하면 관세혜택 못 받아

대기업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필요한 경우 전담 조직이나 부서를 두고 전문가를 활용해 FTA 체결국으로 수출 시 원산지를 증명하면 된다. 문제는 한국의 중소·중견기업이다. 1979년 이래 34년 만에 열린 무역투자진흥회의의 첫 주제가 ‘중소·중견기업들의 수출 지원 대책 마련’으로 선정될 만큼 이들은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주체지만, 원산지 증명 절차의 복잡함 때문에 FTA 체결로 인한 관세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 많은 수의 중소기업이 원산지가 증명될 경우 그 혜택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도 이를 감당할 조직과 비용이 없어 FTA의 관세혜택을 포기하고 있다. 2014년 박명재 새누리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제시한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이 FTA 특혜관세를 잘못 적용해 세관으로부터 추징당한 세금은 2011년 8월부터 올해까지 무려 16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도별로 살펴보면 2011년 160억원이던 추징액이 본격적으로 FTA가 시행된 2012년 이후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추징 사유 중 가장 많은 게 ‘원산지 결정기준 위반’이라고 하니, 중소기업들이 FTA의 혜택을 알면서도 포기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원산지 관리사’들이 있다. 원산지 증명서류를 발급하는 일은 까다롭고 복잡해 전문 인력이 없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자체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 원산지 관리사들은 원산지 증명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해당 업무를 도맡아 수행함으로써 FTA 체결의 혜택이 중소기업에도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국내산 중간재 활용 높이기도…

원산지 관리사 업무의 중심에 놓인 것은 바로 원산지 규정(Rules of Origin)이다. 이는 원산지 관리사의 업무일 뿐만 아니라 FTA를 비롯한 경제통합의 핵심 요인이다.

품목별, 국가별로 기준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FTA와 같은 무역특혜협약을 체결한 경우에만 무역장벽을 완화하고 협약국이 아닌 국가에 대해서는 기존의 무역장벽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원산지 규정은 특혜에 대한 제3국의 무임승차를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최근 오렌지 농축액의 원산지 증명이 이슈로 부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FTA 체결 전 54%였던 관세율이 한·미 FTA 발효 직후 0%로 낮아졌는데, 미국 오렌지 수출업체 4곳에서 브라질산 원액을 섞어 한국으로 수출한다는 의혹이 제기돼 대규모 조사가 실시됐다. 브라질산 원액을 섞은 제품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관세혜택을 보게 된다면 한·미 FTA의 혜택이 비협약국인 브라질에 돌아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원산지 규정은 중간재의 수요를 역내 생산자에게 집중시켜 무역협약 체결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높이는 역할도 수행한다.

즉, 무역협정 체결 전에는 생산 재료에 해당하는 중간재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외국산을 수입해 사용했으나 무역협정 체결과 원산지 규정으로 인해 국내산 중간재를 활용,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중간재 구입에서 이전보다 높은 비용이 수반되지만 관세 감면 혜택으로 인해 보다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산지 관리사들은 원산지 규정의 이런 특성을 활용해 중소기업들이 최근 활발해진 FTA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정부도 원산지 관리사들이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깨달아 2013년 이를 국가 자격증으로 인정했다.

현재까지 약 1700명의 합격자들이 실무 현장에서 활동 중이지만 그 숫자가 중소기업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계속해서 증가하는 FTA 체결, 그리고 중국과의 FTA 협상 등으로 인해 원산지 관리사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상황이다.

‘스파게티 볼 효과’ 줄이는 역할

한편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무역수지 자료에서도 원산지 관리사들의 정교한 활동이 요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한국이 발효한 9개의 FTA 가운데 ‘한·유럽연합(EU)’ ‘한·유럽자유무역연합(EFTA)’ ‘한·칠레’ 협정에서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를 두고 ‘스파게티 볼 효과’가 시작됐다는 해석이 있다. 스파게티 볼 효과란 여러 나라와 FTA를 체결함으로 인해 협정마다 상이한 원산지 규정 등의 적용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거래비용이 높아져 FTA로 인한 혜택이 반감된다는 내용이다.

한 국가와의 원산지 증명도 복잡한데, 이를 서로 다른 여러 협약국의 규정에 맞추려다 보니 FTA로 인한 이득보다 비용이 커지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원산지 관리사들의 정교한 활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마다 상이한 원산지 규정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비효율성이 높아진 생산과 공정, 수출 과정을 원산지 관리사의 도움으로 보다 효율적으로 풀어내 기회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산지 표기 방식이 ‘made in Korea’로 통일됐던 것에서 2014년 하반기부터 ‘Processed in Korea’ ‘Assembled in Korea’ 등으로 다양해지는 것도 원산지 관리사의 중요성을 높이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이는 한국에서 단순 가공 및 조립된 제품일지라도 한국산 수출품으로 인정하려는 우리 정부의 노력으로 최종재 대비 부가가치가 40~50%인 중간재를 수입한 뒤 한국에서 가공 혹은 단순 조립하여 최종재로 만들어 수출하더라도 한국산으로 인정하기 위한 조치다.

협약 체결국 간에만 혜택을 공유하는 FTA 체결국에서의 효과는 미미하겠지만, 원산지 규정이 불분명하거나 규정 차제가 없는 신흥국에서는 넓은 의미의 ‘한국산’ 표시 상품이 한류와 맞물려 시장 개척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원산지 관리사들의 역할은 FTA와 관련된 원산지 업무뿐만 아니라 신흥국 수출과 관련된 업무로까지 그 영역이 넓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 원산지 규정

원산지 규정이란 상품의 원산지를 결정하기 위한 규정 및 절차를 의미하며, 특혜원산지규정과 비특혜원산지규정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자유무역협정에 가입한 국가 간 또는 특정 국가에 대하여 특혜관세를 부여하는 경우에 사용되고, 후자는 무역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상품의 원산지를 일반적으로 판단해야 할 경우에 사용된다.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kimdy@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