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19세기는 위기의 시기였다. 16세기 말에 일어난 전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17세기 말까지 황폐한 경지가 복구되고 인구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조선왕조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였다.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농업생산성의 하락으로 인해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19세기는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시기로서 서구지역의 경제력과 생활수준이 급속히 상승하였기 때문에(23회 참조) ‘19세기의 위기’는 세계에서 차지하는 조선왕조의 지위를 악화시켰다.
19세기가 위기였음은 이 시기가 ‘민란의 시대’였다는 사실로부터 먼저 감지할 수 있다. 1812년의 홍경래난과 1862년의 진주민란(임술민란),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가 대표적이지만 그외에도 크고 작은 많은 민란이 전국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경제적 불황과 재정악화로 인해 조선왕조를 장기간 지속시켰던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반 지배층에 특권을 부여하는 한편, 대중에게는 환곡제도를 비롯한 공공재 공급을 통해 최소한의 생존을 지지하였던 시스템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22회 참조).
경지면적 정체속 인구증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구증가였다. 조선왕조의 인구는 임진왜란으로 격감한 후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지만 식량을 생산하는 경지면적은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후에는 그다지 증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는 것이 점점 곤란해졌다. 3년마다 시행하는 호구조사에 의하면 17~18세기까지 급속하게 증가하던 인구는 19세기에는 정체하거나 감소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인구 추세가 이와 같았는지 아니면 계속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는지는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다(13회 참조).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에 비취어 19세기에도 인구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인구압력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은 틀림없다.
예를 들면 난방이나 화전 개간으로 나무가 남벌되어 가까운 곳에서는 나무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거나, 경지가 부족해서 제언(저수지) 안에 농사를 지어 제언을 쓸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많아졌으며, 이로 인해서 홍수피해도 이전 시기보다 심해졌다. 이것은 가용한 자원에 비하여 인구가 많아서 생기는 인구압력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산림과 수리시설에 대한 국가의 관리 부실과 재산권 제도의 불비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토지생산성 지속적 하락
토지생산성의 지속적 하락은 19세기의 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기에 농업생산성(토지생산성)이 하락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곡창지대인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지역의 자료에서 지대(소작료)의 수량이 일관되게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대율에 특별한 변화가 없음에도 지대량이 감소하는 것은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다고밖에 달리 해석할 수 없다. 토지가격이 하락하는 추세였던 것도 토지생산성이 하락하였음을 추측케 한다.
농업생산성의 하락은 농민의 생활수준을 저하시키고 농민 위에 성립해 있는 국가재정을 악화시켰다. 재정지출은 장기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법칙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재정수입 증가의 곤란은 재정수지를 악화시켰다. 나아가 재정곤란은 재정잉여를 고갈시킴으로써 방대한 곡물을 저장하여 농민들에게 종자와 식량을 분배해주던 환곡제도의 운영도 어렵게 만들었다. 대략 1840년대 이후에는 환곡의 양도 대폭 감소하였으며 농민의 생존을 보장하는 제도에서 재정수입을 위한 제도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농민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농촌 장시를 비롯한 시장경제도 위축되었다. 우선 농촌 장시의 숫자가 감소하였다. 삼남지방(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장시는 1830년에 614기였는데 1872년까지 511기로 줄어들었다. 전라도의 경우는 1770년부터 1830년까지 이미 215기에서 188기로 감소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시장통합의 수준도 18세기보다 19세기에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쌀 가격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19세기에 들어와서 지역 간 차이가 커졌으며 서울과 지방의 가격 동조 현상도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물가가 1850년대부터 급속하게 상승하여 그 이전의 완만한 상승추세에서 확연히 달라진 것도 경제적인 악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곡물 가격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던 환곡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 그리고 토지생산성 하락 때문에 곡물 공급(생산)에 애로가 생겼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물가의 지속적인 상승은 특히 식량을 구입하여 생활하였던 농촌과 도시의 하층민의 생활에 타격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전통사회에서 임금은 경직적으로 장기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가상승은 농촌이나 도시의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다. 한 자료에 의하면 1880~1882년의 실질임금을 100이라고 할 때 1853년의 150에서 1905년의 50으로 하락하였다.
물가상승으로 재정 운영도 어려워
물가상승은 국가재정 운영에도 심각한 충격을 가하였다. 조선왕조의 재정운영은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쌀, 포목, 동전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동전은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정제도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동전, 쌀, 포목 간의 교환비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물가 상승은 동전의 가치를 하락시킴으로써 실질적인 재정수입을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재정상의 교환비율과 시장가격 간에 괴리를 크게 만들어 복잡한 재정운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아가 국가재정에 의존하였던 시전상인이나 공인(貢人)들의 경영도 악화시켰다. 국가에서 지급하는 물건 값은 장기간 고정되어 있었지만 물가가 상승함으로써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 ‘자본주의 맹아’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주장과 ‘소농경영’이 발달하였다는 주장이 맞서 왔지만, 지속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이미지는 공유해왔다. 이러한 성장의 이미지는 19세기가 위기였다는 이상과 같은 최근의 실증연구에 의해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2004). 19세기에 조선왕조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조건들을 유지하기 어려운 위기로 빠져들었으며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였다. 농업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농업기술과 상공업부문의 발달, 그리고 산업화가 없이는 위기의 근원인 ‘맬더스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대분기’의 세계에서 시간이 갈수록 지위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를 비롯하여 사회 전체를 ‘안정’이 아니라 ‘성장’을 지향하는 체제로 바꾸어야만 하였다. 이것은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주변의 중국과 일본은 물론 19~20세기의 어느 후발국도 피할 수 없는 과업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의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이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위기 속에 있었던 조선왕조는 산업화에 성공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에 진출함으로써 새로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영국은 아편전쟁(1840~1842년)으로 중국을 개방시켰으며, 뒤이어 미국은 흑선(黑船)을 앞세운 무력시위(1853년)로 일본의 막부를 굴복시켰다. 이제 ‘은자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 W.E. Griffis, 1882)의 개방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19세기가 위기였음은 이 시기가 ‘민란의 시대’였다는 사실로부터 먼저 감지할 수 있다. 1812년의 홍경래난과 1862년의 진주민란(임술민란),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가 대표적이지만 그외에도 크고 작은 많은 민란이 전국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경제적 불황과 재정악화로 인해 조선왕조를 장기간 지속시켰던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반 지배층에 특권을 부여하는 한편, 대중에게는 환곡제도를 비롯한 공공재 공급을 통해 최소한의 생존을 지지하였던 시스템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22회 참조).
경지면적 정체속 인구증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구증가였다. 조선왕조의 인구는 임진왜란으로 격감한 후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지만 식량을 생산하는 경지면적은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후에는 그다지 증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는 것이 점점 곤란해졌다. 3년마다 시행하는 호구조사에 의하면 17~18세기까지 급속하게 증가하던 인구는 19세기에는 정체하거나 감소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인구 추세가 이와 같았는지 아니면 계속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는지는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다(13회 참조).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에 비취어 19세기에도 인구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인구압력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은 틀림없다.
예를 들면 난방이나 화전 개간으로 나무가 남벌되어 가까운 곳에서는 나무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거나, 경지가 부족해서 제언(저수지) 안에 농사를 지어 제언을 쓸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많아졌으며, 이로 인해서 홍수피해도 이전 시기보다 심해졌다. 이것은 가용한 자원에 비하여 인구가 많아서 생기는 인구압력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산림과 수리시설에 대한 국가의 관리 부실과 재산권 제도의 불비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토지생산성 지속적 하락
토지생산성의 지속적 하락은 19세기의 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기에 농업생산성(토지생산성)이 하락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곡창지대인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지역의 자료에서 지대(소작료)의 수량이 일관되게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대율에 특별한 변화가 없음에도 지대량이 감소하는 것은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다고밖에 달리 해석할 수 없다. 토지가격이 하락하는 추세였던 것도 토지생산성이 하락하였음을 추측케 한다.
농업생산성의 하락은 농민의 생활수준을 저하시키고 농민 위에 성립해 있는 국가재정을 악화시켰다. 재정지출은 장기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법칙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재정수입 증가의 곤란은 재정수지를 악화시켰다. 나아가 재정곤란은 재정잉여를 고갈시킴으로써 방대한 곡물을 저장하여 농민들에게 종자와 식량을 분배해주던 환곡제도의 운영도 어렵게 만들었다. 대략 1840년대 이후에는 환곡의 양도 대폭 감소하였으며 농민의 생존을 보장하는 제도에서 재정수입을 위한 제도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농민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농촌 장시를 비롯한 시장경제도 위축되었다. 우선 농촌 장시의 숫자가 감소하였다. 삼남지방(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장시는 1830년에 614기였는데 1872년까지 511기로 줄어들었다. 전라도의 경우는 1770년부터 1830년까지 이미 215기에서 188기로 감소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시장통합의 수준도 18세기보다 19세기에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쌀 가격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19세기에 들어와서 지역 간 차이가 커졌으며 서울과 지방의 가격 동조 현상도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물가가 1850년대부터 급속하게 상승하여 그 이전의 완만한 상승추세에서 확연히 달라진 것도 경제적인 악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곡물 가격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던 환곡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 그리고 토지생산성 하락 때문에 곡물 공급(생산)에 애로가 생겼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물가의 지속적인 상승은 특히 식량을 구입하여 생활하였던 농촌과 도시의 하층민의 생활에 타격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전통사회에서 임금은 경직적으로 장기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가상승은 농촌이나 도시의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다. 한 자료에 의하면 1880~1882년의 실질임금을 100이라고 할 때 1853년의 150에서 1905년의 50으로 하락하였다.
물가상승으로 재정 운영도 어려워
물가상승은 국가재정 운영에도 심각한 충격을 가하였다. 조선왕조의 재정운영은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쌀, 포목, 동전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동전은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정제도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동전, 쌀, 포목 간의 교환비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물가 상승은 동전의 가치를 하락시킴으로써 실질적인 재정수입을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재정상의 교환비율과 시장가격 간에 괴리를 크게 만들어 복잡한 재정운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아가 국가재정에 의존하였던 시전상인이나 공인(貢人)들의 경영도 악화시켰다. 국가에서 지급하는 물건 값은 장기간 고정되어 있었지만 물가가 상승함으로써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 ‘자본주의 맹아’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주장과 ‘소농경영’이 발달하였다는 주장이 맞서 왔지만, 지속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이미지는 공유해왔다. 이러한 성장의 이미지는 19세기가 위기였다는 이상과 같은 최근의 실증연구에 의해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2004). 19세기에 조선왕조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조건들을 유지하기 어려운 위기로 빠져들었으며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였다. 농업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농업기술과 상공업부문의 발달, 그리고 산업화가 없이는 위기의 근원인 ‘맬더스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대분기’의 세계에서 시간이 갈수록 지위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를 비롯하여 사회 전체를 ‘안정’이 아니라 ‘성장’을 지향하는 체제로 바꾸어야만 하였다. 이것은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주변의 중국과 일본은 물론 19~20세기의 어느 후발국도 피할 수 없는 과업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의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이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위기 속에 있었던 조선왕조는 산업화에 성공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에 진출함으로써 새로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영국은 아편전쟁(1840~1842년)으로 중국을 개방시켰으며, 뒤이어 미국은 흑선(黑船)을 앞세운 무력시위(1853년)로 일본의 막부를 굴복시켰다. 이제 ‘은자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 W.E. Griffis, 1882)의 개방은 시간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