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도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3) 조선후기와 'Great Divergence'의 세계사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3) 조선후기와 'Great Divergence'의 세계사
조선후기는 세계사에서 거대한 변화가 진행된 시기였다. 1500년의 시점에서 본 세계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조선왕조가 끝나가는 19세기가 되면 산업화에 성공한 서구(west)와 그렇지 못한 비서구 지역(rest) 간에 생활수준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그림1). 1000년에는 0.9:1로 서구지역의 1인당 GDP가 비서구 지역보다 조금 낮았는데, 1500년에는 1.4:1 정도로 역전되었으며, 1820년에는 2.1:1, 1913년에는 4.5:1로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커진 것이다. 이렇게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생활수준의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는 현상을 세계역사학계에서는 ‘Great Divergence’라고 부르고 있다. 보통 대분기(大分岐)라고 번역한다. 워낙 큰 주제이기 때문에 시작한 시점과 원인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지만, 1760년부터 1830년까지 영국에서 진행된 산업혁명이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

산업혁명 계기로 생활수준 격차 벌어져

산업혁명의 핵심은 공업부문에서 일어난 기술 변화였다. 전통적인 수공업에서는 수차와 풍차와 같이 물과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사람이나 동물의 근력을 이용하였다. 열이 필요한 경우에는 나무를 주된 연료로 사용하였다. 이와 달리 산업혁명 이후에는 물건을 제조하는 데 노동 대신 기계와 설비를 사용하는 한편, 기계 작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화석연료인 석탄에서 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산업혁명이 ‘대분기’의 계기가 된 것은 무엇보다 제조업 분야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였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 전에는 1파운드의 실을 생산하는 데 500시간 걸렸으나 1770년대 발명된 뮬(Mule) 방적기로는 20시간밖에 걸리지 않게 됐다. 이후에도 새로운 기계가 발명되고 개량돼 1825년에는 1시간20분으로 단축되었으며 1914년에는 겨우 20분밖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 전통 기술로는 노동자의 임금이 아무리 낮고 노동시간을 늘린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기술과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산업혁명 후 영국 이외의 국가는 새로운 기술을 학습하여 산업화에 합류한 지역과 그렇지 못해 선진공업국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수입함으로써 전통 수공업이 해체되는 지역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된 원인은 무엇인가? 왜 영국보다 강성하였던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국이었을까? 왜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미국과 서유럽은 영국의 산업혁명이 급속히 전파되어 공업화가 진행되었는데 기타 지역에는 공업화가 지체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답은 크게 보면 두 편으로 나뉘어 있다.

영국 산업혁명은 왜 일어났는가

산업화에 먼저 성공한 서유럽에 장시간에 걸쳐 형성된 문화적 제도적 특성 - 계몽주의, 과학, 정치체제, 재산권제도, 시장경제 - 으로 서구의 발흥과 산업혁명을 설명하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산업혁명 전까지 동서양의 차이는 미미하였고 전통경제가 부딪힌 애로도 동일하였는데 지리적인 조건이나 우연적인 상황의 차이가 큰 차이를 낳게 되었다는 입장이 있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3) 조선후기와 'Great Divergence'의 세계사
역사학계에 ‘Great Divergence’라는 말을 유행시킨 K 포머란츠는 후자의 대표적인 학자이다(The Great Divergence : China,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conomy, 2000). 그에 따르면 영국과 중국의 강남지역을 비교한 결과 18세기까지는 ‘대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시장경제, 재산권제도나 생활수준에서 차이가 없었고 두 지역 모두 산림자원의 고갈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영국은 중국과 달리 석탄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 경제로부터 탈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중국이 석탄 산지만 가까이 있었으면 증기기관을 발명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중국에서는 중상주의국가가 등장하여 식민지를 정복하지 않았을까?

R 알렌은 문화, 제도, 석탄, 식민지와 같은 조건들은 산업혁명의 필요조건일 뿐이며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The British Industrial Revolution in Global Perspective, 2009). 자본가(기업가)가 자본집약적이며 에너지집약적인 새 기술을 채택하게 만드는 경제적 유인이 없었다면 산업혁명은 촉발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영국의 도시화로 인한 높은 임금과 석탄산업의 발달이 산업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비싼 노동, 값싼 석탄, 그리고 풍부한 자본).

식민지 무역으로 런던은 당시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어 임금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상승하였고 (그림 2) 난방용 나무가 부족해지자 석탄 수요가 늘어나 석탄 산업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인도회사에 의해 인도산 면직물이 대량 수입되자 높은 임금으로는 인도산 면직물과 경쟁할 수 없어 노동을 기계로 대신하고 석탄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기술을 채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는 산업화 조건 갖췄나?

그렇다면 조선후기에는 산업혁명의 조건이 갖추어지고 있었을까? 봉건사회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고 산업화가 이루어진다는 역사관에 따르면 동전의 통용, 농촌 장시와 객주와 사상(私商)의 성장, 토지소유권의 발달 등은 모두 자본주의 맹아(萌芽), 곧 자본주의의 싹으로 해석된다. 특히 농업부문에서 임금 노동자를 이용한 부농경영이 생겨났다거나 광산에 광산노동자들이 모여드는 현상, 그리고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와 도자기를 생산하는 사옹원(분원)과 같은 관영기관에 자금을 대는 물주가 등장하는 현상 등도 모두 사회가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 발전하면 산업화는 자연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제는 더 이상 ‘조선후기에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고 있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아니라 ‘조선후기 경제는 어떠한 문제에 부딪히고 있었으며 산업화에 필요한 조건이 갖춰지고 있었는가? 선진 기술을 학습하여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추어지고 있었는가?’ 그리고 ‘조선후기의 역사적 성과는 장차 산업화 과정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시장경제가 발전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기계와 증기기관을 이용한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조선후기 노동자를 고용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법이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3) 조선후기와 'Great Divergence'의 세계사
지주제나 고리대 또는 상업 활동이나 과거급제와 같은 다른 대안들과 비교하여 유리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욱이 증기기관으로 작동되는 기계를 이용하여 노동자를 대체할 만한 경제적 유인이나 기술적 역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조선후기의 농업과 시장경제의 발달은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조건이 아니라 산업화를 위한 학습 역량의 축적이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김재호 교수 <전남대학교 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