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12년'으로 본 노예의 경제학
유럽, 美 진출로 노동력 부족
아프리카서 흑인 노예 수혈
19세기 1100만명 끌고 가
적게 일하는 것 이외에는
노예들 어떤 관심도 없어
혁신이 없는 노예경제
결국 가장 비싼 비용들어
“살아남고 싶은 게 아니야. 살고 싶은 거지.(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유럽, 美 진출로 노동력 부족
아프리카서 흑인 노예 수혈
19세기 1100만명 끌고 가
적게 일하는 것 이외에는
노예들 어떤 관심도 없어
혁신이 없는 노예경제
결국 가장 비싼 비용들어
미국 의회가 ‘노예수입금지법’을 통과시킨 것은 1807년. 이듬해부터 노예 수입이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하지만 노예 제도가 폐지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해외에서 노예를 사들이는 일이 힘들어지면서 자유주(州)에 살고 있는 흑인을 납치해 노예주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가 늘어나게 됐다.
지난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색상, 여우조연상 등 3관왕을 차지한 스티브 매퀸 감독의 영화 ‘노예 12년’은 1840년대 자유인이던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 분)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해 다시 자유를 찾기까지 겪었던 12년의 삶을 그려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섭의 대사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자유의 상실: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
미국의 노예사(史)는 17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19년 흑인 노예 20여명을 태운 배가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들어온 것이 시초였다. 처음부터 아프리카의 흑인들만이 노예였던 것은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 개척 초기에는 백인 노예도 있었다. 특히 유럽에서 추방된 범법자나 대서양을 건너는 뱃삯을 내지 못한 사람들, 집시까지 다양한 사람이 존재했다. 하지만 미 대륙의 식민지 규모가 커지면서 이들과 하층계급의 백인만으로는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본격적으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주인공 노섭은 뉴욕에 사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노예 수입이 금지된 1808년 자유인으로 태어난 그는 아내와 세 자식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뛰어난 연주 실력 덕에 경제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았다. 1841년 어느 날 아내가 자식들을 데리고 출장을 떠난 사이 지인의 소개로 공연 기획자들을 만나 워싱턴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 노섭을 납치하려는 계략이었다. 저녁식사를 대접한 그들은 노섭을 술에 취하게 만든 뒤 노예상에게 넘겼다. 노섭은 자유인이라고 항변을 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혹독한 매질뿐이었다. 그는 얼마 뒤 한밤중에 노예선에 실려 노예주인 루이지애나로 끌려갔다. 노예시장에서 솔로몬 노섭 대신 ‘플랫’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노섭은 비교적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농장주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에게 팔려가게 됐다.
삼각무역의 희생양:아프리카 흑인
미국 원주민 가운데 일부도 노예로 전락했지만 흑인에 비해 숫자는 매우 적었다. 유럽인들은 미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선택했고 그 결과 원주민들의 숫자 역시 줄어들게 됐다. 대서양 건너 유입된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는 것도 세력 약화의 한 이유였다.
경제적 이점도 있었다. 백인이나 원주민을 노예로 쓰는 것과 비교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데려오는 ‘비용’이 크지 않았다는 것. 콜럼버스가 미 대륙에 발을 내디딘 뒤로 19세기 후반까지 대서양을 건너 북·남미 대륙으로 끌려간 흑인 노예의 숫자는 1100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 시기에 이른바 ‘삼각무역’(그래프)으로 큰돈을 벌었다. 유럽에서 총포, 화약, 직물, 럼주 등을 싣고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가서 노예와 교환한 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를 팔고, 이 돈으로 식민지의 생산품을 구입해 유럽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미 대륙의 노예 수요가 날로 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유럽과 미 대륙을 오가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대가를 지급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납치’가 빈번하게 이뤄졌다.
보호무역 vs 자유무역
노섭은 과거 공사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포드의 신뢰를 얻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백인 관리자 티비츠의 미움을 사게 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결국 포드의 도움으로 목숨은 부지하지만 티비츠가 노섭에게 복수할 것을 걱정해 그를 다른 농장주 엡스(마이클 패스벤더 분)에게 팔아넘긴다. 거대한 목화 농장을 운영하던 엡스는 ‘노예 파괴자’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악명 높았다. 매일 수확한 목화의 무게를 측정해 평균치를 밑돌면 채찍질을 가할 정도였다. 이런 삶이 10년 넘게 이어졌다.
노섭은 영화 제목처럼 꼭 12년 만인 1853년 자유의 몸이 됐다. 극적인 탈출은 아니다. 엡스에게 고용돼 농장을 찾아온 캐나다 출신 백인 목수 배스(브래드 피트 분) 덕분이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란 생각을 가진 그는 노섭의 사연을 듣고 편지를 받아 뉴욕으로 전달해줬다. 보안관과 그의 단골 상점 주인이 농장을 찾아와 노섭이 자유인임을 확인한 뒤 농장에서 그를 데리고 나갔고 가족을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었다.
애덤 스미스 “노예고용이 가장 비싼 비용”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은 노섭이 구출되고 8년 뒤인 1861년이다. 만약 이 전쟁에서 북부가 아닌 남부가 승리했다면 노예 제도 역시 계속됐을까.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의 경험은 노예에 의한 작업이 외관상 그들의 생활비만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장 비싸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나는 믿는다.”
노예들은 사유 재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많이 먹고 최대한 적게 노동하는 것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생활자료를 구매하기에 충분한 양을 넘어서 그가 일을 하도록 하려면, 그 자신의 이익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폭력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고 덧붙였다. 반대로 말하면 노예 제도 아래에서는 어떠한 ‘혁신’도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산업 구조와 시장의 변화에 따라 미국의 노예 제도가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더라도 노섭이 보여준 삶에 대한 의지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성별, 종교, 인종 등에 의한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생존’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해 노섭이 보낸 인고의 시간이야말로 영화를 통해 읽어야 하는 교훈이 아닐까.
이승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