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와 현재를 비교할 때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신분제도이다. 우리는 모두 ‘법 앞에 평등’하지만 조선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국민이면 누구든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될 수 있고,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시장, 군수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의원에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와 달리 양반이라는 신분에 속한 사람들만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에 정식 관리가 되어 국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양반은 군역을 면제받았으며 노비를 소유하여 육체노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양반은 과거응시 군역면제의 특권
본래 양반은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남쪽을 보고 자리한 국왕을 향하여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도열하였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로부터 우선 국가의 관료를 양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지 현직 관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재경 양반(경반)은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방의 재지 양반(향반)은 여러 대에 걸쳐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모든 양반이 관직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가 쓴 『양반』에 따르면, 재지 양반의 자격조건은 (1) 과거 합격자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고명한 학자를 선조로 가지고 있고 그 계보가 명확할 것, (2) 수대에 걸쳐 동일한 촌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고 있을 것, (3)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곧 조상에 대한 제사와 손님 접대를 예절에 맞게 행하고 일상적으로 학문과 자기수양에 힘쓰는 ‘양반적’ 생활양식을 지킬 것, (4) 대대로 결혼상대를 앞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에서 선택할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과거 합격만으로 양반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나 조상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은 양반이 될 수 있는 있는 중요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문신을 무신에 비하여 우대하였기 때문에 무과는 경시되었고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에 급제하는 것이 긴요하였다. 문과는 식년(式年·12지 중에서 子, 卯, 午, 酉가 드는 해)에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와 대개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별시가 있었는데 식년시는 3년에 33명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었지만, 별시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문과 합격자는 꾸준히 증가하였다(그래프 참고). 그렇지만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 합격자는 1만4600여 명에 불과하였다.
관직 수는 『경국대전』(1485년 반포)을 기준으로 서울과 지방의 문·무·잡직을 통틀어 5000~6000여 직 정도였는데, 그중에서도 핵심 요직은 100여 개의 당상관(堂上官)을 포함하여 300자리 정도였다.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2013년도 공무원 최종 합격자 수는 5급 353명, 7급 628명, 9급 2618명 합계 3599명이었다(행정직과 기술직). 지금도 공무원시험은 경쟁이 아주 치열하지만, 조선시대에 문과 합격자가 연평균 29명에 불과하였으며, 현재 공무원 수가 100만여 명인 것을 생각해보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과거에 합격하면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지 곧바로 관직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관직 수는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서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인구가 증가하였고 생활 수준이 높았던 양반의 인구증가율이 높았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과거와 관직을 둘러싼 경쟁은 점점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가문이 과거 급제 독차지
그런데 에드워드 W 와그너는 문과 합격자 1만4600명의 가문을 조사하여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소수의 가문에 문과 합격자가 집중되는 경향이 강해졌음을 밝혔다.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53%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소수의 가문이 과거 급제자를 독점하게 되었다는 것은 과거제도가 기존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고 신참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진입장벽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서울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소수 가문이 과거 합격자와 관직을 독점하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서 지방에선 오랫동안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였지만 ‘양반적’ 생활양식과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경제력에 기초하여 한 지역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가문도 생겨나게 되었다. 양반 신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발된 관료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혈연에 기초한 귀족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 신분제 해체의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시가타 히로시의 통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표 참고). 과연 조선 후기에 양반이 급속히 증가하여 의미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일까? 우선 호적이 실제 인구의 30~40% 정도밖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조세수취를 위한 장부였지 신분을 조사하는 장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호적에 ‘유학(幼學)’ , 즉 ‘관직에 아직 오르지 않았거나 과거 준비를 위해 학교에 재학 중인 유생’이라고 기재되었다고 해서 모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양반이었다고 말할 근거는 약하다. 군역을 면제받기 위한 목적에서 실제 양반이 아닌 자들도 장부상으로 ‘유학’으로 기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양반은 호적에서 누락되는 비율이 낮았지만 상민이나 노비의 경우에는 높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18, 19세기에도 양반은 5~10% 정도에 불과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김성우, 「조선후기 신분제」). 김득신(1754~1822)이 그린 풍속화를 보아도 18, 19세기에 신분제가 그렇게 해체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양반은 노비가 있어야 양반
호적상으로 조선 후기에 양반, 실제로는 ‘유학’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신분제가 해체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반의 경우 노비를 보유한 비율이 다른 신분에 비하여 월등히 높다는 것은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였다. 대구의 경우 1858년에 호적상으로 양반의 90%가 노비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비 인구도 아직 전체의 31.3%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반과 노비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세조 13년(1467)에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을 때 양성지가 올린 상소문을 보면,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가 중국에 비하여 장수한 이유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이 경향 각지에 자리 잡고 있어 반란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대가세족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은 노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함길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모두 다 그 지방에 노비가 없기 때문이요, 노비가 없는 것은 대가세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노비는 양반의 수족으로서 양반은 가사와 생산에 관한 일체의 노동을 노비에게 맡겼다. 출타할 경우에도 반드시 노비를 대동하였다. 만약 양반이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혼자 짐을 가지고 다른 양반을 찾아간다면 아마 곧바로 체면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양반이 너무 많아져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없어졌다기보다는 호적상으로라도 노비를 보유하는 집이 많아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서 벗어나 양반이 되기를 열망하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양반은 과거응시 군역면제의 특권
본래 양반은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남쪽을 보고 자리한 국왕을 향하여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도열하였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로부터 우선 국가의 관료를 양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지 현직 관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재경 양반(경반)은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방의 재지 양반(향반)은 여러 대에 걸쳐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모든 양반이 관직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가 쓴 『양반』에 따르면, 재지 양반의 자격조건은 (1) 과거 합격자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고명한 학자를 선조로 가지고 있고 그 계보가 명확할 것, (2) 수대에 걸쳐 동일한 촌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고 있을 것, (3)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곧 조상에 대한 제사와 손님 접대를 예절에 맞게 행하고 일상적으로 학문과 자기수양에 힘쓰는 ‘양반적’ 생활양식을 지킬 것, (4) 대대로 결혼상대를 앞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에서 선택할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과거 합격만으로 양반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나 조상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은 양반이 될 수 있는 있는 중요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문신을 무신에 비하여 우대하였기 때문에 무과는 경시되었고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에 급제하는 것이 긴요하였다. 문과는 식년(式年·12지 중에서 子, 卯, 午, 酉가 드는 해)에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와 대개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별시가 있었는데 식년시는 3년에 33명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었지만, 별시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문과 합격자는 꾸준히 증가하였다(그래프 참고). 그렇지만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 합격자는 1만4600여 명에 불과하였다.
관직 수는 『경국대전』(1485년 반포)을 기준으로 서울과 지방의 문·무·잡직을 통틀어 5000~6000여 직 정도였는데, 그중에서도 핵심 요직은 100여 개의 당상관(堂上官)을 포함하여 300자리 정도였다.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2013년도 공무원 최종 합격자 수는 5급 353명, 7급 628명, 9급 2618명 합계 3599명이었다(행정직과 기술직). 지금도 공무원시험은 경쟁이 아주 치열하지만, 조선시대에 문과 합격자가 연평균 29명에 불과하였으며, 현재 공무원 수가 100만여 명인 것을 생각해보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과거에 합격하면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지 곧바로 관직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관직 수는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서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인구가 증가하였고 생활 수준이 높았던 양반의 인구증가율이 높았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과거와 관직을 둘러싼 경쟁은 점점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가문이 과거 급제 독차지
그런데 에드워드 W 와그너는 문과 합격자 1만4600명의 가문을 조사하여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소수의 가문에 문과 합격자가 집중되는 경향이 강해졌음을 밝혔다.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53%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소수의 가문이 과거 급제자를 독점하게 되었다는 것은 과거제도가 기존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고 신참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진입장벽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서울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소수 가문이 과거 합격자와 관직을 독점하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서 지방에선 오랫동안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였지만 ‘양반적’ 생활양식과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경제력에 기초하여 한 지역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가문도 생겨나게 되었다. 양반 신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발된 관료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혈연에 기초한 귀족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 신분제 해체의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시가타 히로시의 통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표 참고). 과연 조선 후기에 양반이 급속히 증가하여 의미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일까? 우선 호적이 실제 인구의 30~40% 정도밖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조세수취를 위한 장부였지 신분을 조사하는 장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호적에 ‘유학(幼學)’ , 즉 ‘관직에 아직 오르지 않았거나 과거 준비를 위해 학교에 재학 중인 유생’이라고 기재되었다고 해서 모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양반이었다고 말할 근거는 약하다. 군역을 면제받기 위한 목적에서 실제 양반이 아닌 자들도 장부상으로 ‘유학’으로 기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양반은 호적에서 누락되는 비율이 낮았지만 상민이나 노비의 경우에는 높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18, 19세기에도 양반은 5~10% 정도에 불과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김성우, 「조선후기 신분제」). 김득신(1754~1822)이 그린 풍속화를 보아도 18, 19세기에 신분제가 그렇게 해체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양반은 노비가 있어야 양반
호적상으로 조선 후기에 양반, 실제로는 ‘유학’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신분제가 해체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반의 경우 노비를 보유한 비율이 다른 신분에 비하여 월등히 높다는 것은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였다. 대구의 경우 1858년에 호적상으로 양반의 90%가 노비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비 인구도 아직 전체의 31.3%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반과 노비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세조 13년(1467)에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을 때 양성지가 올린 상소문을 보면,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가 중국에 비하여 장수한 이유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이 경향 각지에 자리 잡고 있어 반란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대가세족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은 노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함길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모두 다 그 지방에 노비가 없기 때문이요, 노비가 없는 것은 대가세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노비는 양반의 수족으로서 양반은 가사와 생산에 관한 일체의 노동을 노비에게 맡겼다. 출타할 경우에도 반드시 노비를 대동하였다. 만약 양반이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혼자 짐을 가지고 다른 양반을 찾아간다면 아마 곧바로 체면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양반이 너무 많아져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없어졌다기보다는 호적상으로라도 노비를 보유하는 집이 많아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서 벗어나 양반이 되기를 열망하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