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5) 양반, 조선왕조의 특권신분](https://img.hankyung.com/photo/201405/AA.8712298.1.jpg)
양반은 과거응시 군역면제의 특권
본래 양반은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남쪽을 보고 자리한 국왕을 향하여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도열하였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로부터 우선 국가의 관료를 양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지 현직 관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재경 양반(경반)은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방의 재지 양반(향반)은 여러 대에 걸쳐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모든 양반이 관직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가 쓴 『양반』에 따르면, 재지 양반의 자격조건은 (1) 과거 합격자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고명한 학자를 선조로 가지고 있고 그 계보가 명확할 것, (2) 수대에 걸쳐 동일한 촌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고 있을 것, (3)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곧 조상에 대한 제사와 손님 접대를 예절에 맞게 행하고 일상적으로 학문과 자기수양에 힘쓰는 ‘양반적’ 생활양식을 지킬 것, (4) 대대로 결혼상대를 앞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에서 선택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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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수는 『경국대전』(1485년 반포)을 기준으로 서울과 지방의 문·무·잡직을 통틀어 5000~6000여 직 정도였는데, 그중에서도 핵심 요직은 100여 개의 당상관(堂上官)을 포함하여 300자리 정도였다.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2013년도 공무원 최종 합격자 수는 5급 353명, 7급 628명, 9급 2618명 합계 3599명이었다(행정직과 기술직). 지금도 공무원시험은 경쟁이 아주 치열하지만, 조선시대에 문과 합격자가 연평균 29명에 불과하였으며, 현재 공무원 수가 100만여 명인 것을 생각해보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과거에 합격하면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지 곧바로 관직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관직 수는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서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인구가 증가하였고 생활 수준이 높았던 양반의 인구증가율이 높았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과거와 관직을 둘러싼 경쟁은 점점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가문이 과거 급제 독차지
그런데 에드워드 W 와그너는 문과 합격자 1만4600명의 가문을 조사하여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소수의 가문에 문과 합격자가 집중되는 경향이 강해졌음을 밝혔다.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53%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소수의 가문이 과거 급제자를 독점하게 되었다는 것은 과거제도가 기존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고 신참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진입장벽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서울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소수 가문이 과거 합격자와 관직을 독점하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서 지방에선 오랫동안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였지만 ‘양반적’ 생활양식과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경제력에 기초하여 한 지역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가문도 생겨나게 되었다. 양반 신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발된 관료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혈연에 기초한 귀족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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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은 노비가 있어야 양반
호적상으로 조선 후기에 양반, 실제로는 ‘유학’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신분제가 해체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반의 경우 노비를 보유한 비율이 다른 신분에 비하여 월등히 높다는 것은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였다. 대구의 경우 1858년에 호적상으로 양반의 90%가 노비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비 인구도 아직 전체의 31.3%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반과 노비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세조 13년(1467)에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을 때 양성지가 올린 상소문을 보면,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가 중국에 비하여 장수한 이유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이 경향 각지에 자리 잡고 있어 반란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대가세족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은 노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함길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모두 다 그 지방에 노비가 없기 때문이요, 노비가 없는 것은 대가세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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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