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1) 중세의 토지는 누구 소유였는가
토지소유는 농업사회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결정한다. 농업사회의 생산성은 당연히 농업의 생산성에 달려 있으며, 농업의 생산성은 가장 기초적인 생산요소인 토지를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에 직결되어 있다. 토지를 가장 잘 이용할 개인이나 조직이 토지를 소유하는 사회가 생산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소유로부터 얻는 지대 소득이 전체 소득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므로 농업사회의 소득분배는 토지소유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중세의 토지는 누구의 소유였을까? 서양 중세의 봉건제사회에서 토지의 소유자는 영주였지만 농노들도 그 땅을 물려받아 자식에게 상속하였고, 영주도 농노를 쫓아내거나 마음대로 땅을 팔 수 없었다. 주군으로부터 봉토로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고 신분과 함께 장자에게 상속해야 하였다. 이렇게 하나의 토지에 영주의 법적인 소유와 농민의 사실상의 소유가 겹쳐 있었다는 점에서 서양 중세의 토지소유는 중층성을 지니고 있었다.

영주는 법적으로, 농민은 사실상 소유

우리나라의 중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토지소유도 중층적이었을까? 한때 모든 토지가 국유라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그 근거가 되었던 “하늘 아래에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는 왕토사상은 문자 그대로 모든 땅이 왕이나 국가의 소유라는 뜻은 아니며, 민간의 사유지로부터 조세를 수취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였다는 토지사유론이 대세가 되었다. 오랫동안 국유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토지사유의 증거를 찾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숭덕사 비문에는 왕실의 능을 조성한 곳이 왕토였지만 공전(公田)이 아니기 때문에 부근 일대를 후한 대가를 주고 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능을 만들 땅이 왕토였지만 무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땅값을 보상해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민간의 소유권이 성립해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지금과 같이 마음대로 토지를 사고 팔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최치원이 절에 자신의 땅을 기부하면서도 왕토였기 때문에 왕의 동의를 받아야만 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왕토사상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여전하였는데 이와 같이 단순한 명분만은 아니었으며 재산권 행사를 제약하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토지소유권 발달

토지에 대한 소유권(재산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토지의 이용에 타인의 접근을 배제할 만큼 토지의 가치가 높아져야 한다. 농업기술이 진보하여 15~20년 이상을 묵히는 장기휴경은 물론이고 5~10년을 묵히는 중기휴경 단계를 벗어나 적어도 1~2년을 묵히는 단기휴경(휴한) 단계까지는 도달해야 할 것이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1) 중세의 토지는 누구 소유였는가
인구에 비해 땅이 흔하여 오래 묵히고 있는 토지가 많고, 먼저 경작하는 사람이 임자인 상황에서 토지에 대한 재산권이 발달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고려시대에는 단기휴경 단계에서 점차 1년 1작으로 토지활용도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수리시설의 설치나 생존위기에 농민을 구제하는 데 역할을 하였던 국가도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없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노동을 투입하는 주체였던 민간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강화되어갔을 것이다.

수조권이 민간의 소유권 제약

이러한 토지에 대하여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는 토지조사(양전)를 시행하여 각 필지마다 위치, 형상, 면적, 소유자 등을 기재한 토지대장인 양안을 작성하였다(8회 그림 참조). 호적과 함께 양안은 각종 조세를 부과하는 기준이 되는 장부였다. 또한 이 양안을 이용하여 토지로부터 조세를 수취하는 권리(수조권)를 국가에 봉사하는 사람과 국가의 각종 기관에 나누어주었다. 수조권이 민간의 소유권을 제약하고 있었던 것이 우리나라 중세의 토지소유가 지닌 독특한 점이었다.

고려시대의 전시과나 조선시대의 과전법은 문무 양반 관리에게 품계에 따라서 최고 1과부터 최하 18과까지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소유권이 아니라 1대에 한하여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이러한 토지를 사전(私田)이라고 칭하였으며, 기타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는 일반 토지는 공전이라고 불렀다.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공과 사를 구분한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조권을 가진 양반을 전주(田主), 그 땅의 경작자를 전객(佃客)이라고 규정하였다는 점이다. 주와 객을 수조권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양반 관리에게 지급한 사전에는 이미 그 땅을 실제로 경작하는 농민이나 지주의 소유권이 성립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국가는 그러한 사실상의 소유자를 전주라고 칭하지 않고 수조권을 행사하는 자를 주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공전에 대해서까지 연장해 보면 공전의 수조권은 국가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전주, 그 땅의 주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과전법은 전주가 전객의 땅을 빼앗으면 처벌하거나 교체하도록 하여 전객의 소유권을 보호하는 한편, 전객의 재산권 행사도 크게 제한하고 있었다. 전객은 경작하는 땅을 함부로 다른 집(戶)에 팔 수 없으며, 사망이나 이사로 호가 끊어지거나 혹은 경작을 하지 않아서 황폐하게 만든 경우에는 전주가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사실상의 소유자인 전객의 소유권이 국가의 수조권에 의해 크게 제한받고 있었던 것이다.

민간의 소유권 확립 토지거래도 활성화

이와 같이 우리나라 중세에 국가가 민간의 토지소유를 제약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민간의 토지에 대해서 수조권에 기초한 지배력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을 건실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토지소유의 불평등을 제어해야 할 유인이 컸다.

민간의 토지거래를 완전히 방임하면 토지와 직역(職役)을 연결해놓은 ‘전정연립(田丁連立)’의 원칙이 엉망이 될 것이고 토지를 상실하는 농민이 많아지고 급기야 다수가 노비로 전락하게 된다면 농민으로부터 전세와 공물, 노동력을 수취하기가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토지소유에 대한 영향력은 민간에서 진행되는 대토지 소유의 성장을 막고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국가가 민간의 토지소유를 제약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양 중세의 영주가 장원의 토지에 대해서 행사하는 상급소유권과 동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국가와 농민의 중간에서 토지를 집적하는 지주가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농민의 생산물을 둘러싼 국가와 지주의 경쟁에서 국가는 시기에 따라 부침이 있었지만 결국 패배하였다. 고려말기에 대토지소유의 성장으로 어지러워진 전시과체제를 재건하고자 하였던 과전법도 직전법(1466년)으로 축소되었으며 16세기 중엽에 직전법마저 폐지되었던 것이다.

정복과 복속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대국가의 누층적인 통치체제는 중세를 통해 군현제가 정비됨에 따라서 전일적인 통치체제로 변화되었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1) 중세의 토지는 누구 소유였는가
이 과정에서 국가는 점차 민간의 토지소유를 인정하고 그로부터 조세를 수취하는 국가, 조세국가(tax state)로 변모해갔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경국대전》에서는 토지매매를 관에 공증을 받는제도도 갖추었으며 토지매매문서를 주고받아 적어도 안면이 있는 지역사회에서의 토지거래에는 점차 불편함이 없게 되었다.(그림)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