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을 1차 산업, 농업의 시작을 ‘신석기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에 농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 생산성이 낮은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식량 생산에 투입되어야 했으므로 2차 산업(제조업), 3차 산업(서비스업)의 발전은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국제무역의 규모가 작았을 뿐 아니라 높은 운송비용으로 인하여 농산물처럼 무겁고 가치가 낮은 상품을 수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중세의 경제발전은 기본적으로 농업에 달려 있었다.
무엇보다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식량 생산이 증가해야만 하였다. 한국 중세의 인구추세는 자료가 부족해서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장기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던 것은 분명하다.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300만명, 14세기 말 조선왕조 개창 당시에 500만명, 19세기 후반 개항할 때 1700만명이라는 추정에 따르면 중세 동안 장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가 인구증가 속도가 빨랐다.
이런 인구 증가는 식량 생산을 위해 투입되는 생산요소(노동, 토지, 자본)의 하나인 ‘노동’이 증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지만, 계속 인구가 늘어나면 종국에는 ‘수확체감의 법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노동의 투입으로 획득되는 식량이 점차 줄어드는 지점에 이르게 되고 결국에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식량을 생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그림). 중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맬서스 함정’에 빠져 있는 경제였다.
생산성 증가해야 인구증가 지속 가능
식량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단계에 이른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다면 더 이상할 것이다. 9세기 신라 말에서 후삼국시대, 13세기 무신란에서 몽고침략기, 16세기 임진왜란 전후, 그리고 19세기에 민란이 크게 일어났던 시대가 생존의 위기에 떨어졌던 때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중세에 장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무엇인가 경제적인 변화가 진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동 투입의 증가로 인한 ‘수확체감’을 피하기 위하여 ‘토지’와 ‘자본’의 투입을 증가시키는 한편 기술 진보와 제도 혁신에 의한 생산성 증가가 없었다면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는 데 실패하였을 것이다.
토지(경지)의 증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졌다. 토지 면적을 증가시키는 것과 토지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다. 토지 면적의 증가는 고려시대에는 구릉지에서 산지 방향으로, 조선시대에는 방향을 바꾸어 저지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2세기의 『고려도경』은 고려에는 경지가 산지에 많아서 멀리서 보면 ‘사다리계단’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산마다 가득한 계단식 전답이 송나라 사람의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여름에 비가 집중해서 내리고 봄에 가뭄이 들기 쉬운 기후이기 때문에 물을 저장하는 것이 농사에 매우 중요한데 이와 관련된 수리시설의 건설은 ‘자본’ 투입의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는 계곡을 막아서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제언)가 많이 이용되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점차 하천에 천방(보)을 만들어 물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변해갔다. 경지가 저지대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토지의 활용도를 높인다는 것은 지력 회복을 위해 땅을 묵히는 기간을 단축하는 것은 물론 쉬지 않고 매년 경작하게 되고 나아가 1년에 두 차례 이상을 경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활용도가 높아지면 같은 면적의 토지라도 더 많이 수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휴경법이 일반적이었지만, 고려시대에는 1년이나 2년을 묵히는 ‘단기휴경’에서 1년에 한 번 경작하는 ‘연작상경’(連作常耕)으로 변해갔다. 이에 따라 3년 이상을 휴한하는 경지, 단기휴경을 하는 경지, 1년 1작하는 농지가 병존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세종대왕에 의해 편찬된 『농사직설』(1429년)에서 논이나 밭에서 모두 1년 1작을 기본적인 경작방법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상경’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의 보급으로 봄에 보리를 수확한 다음에 모를 옮겨 심을 수 있게 됨으로써 점차 1년 2작의 이모작도 가능하게 되었다.
1600년경 조선 인구밀도 세계 최고
이와 같이 토지의 확대와 활용도의 증가, 수리시설의 확충, 그리고 비료의 투입 등과 같은 새로운 농법의 도입으로 식량생산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1600년께의 인구밀도(1㎢당 인구)는 영국 22명, 프랑스 34명, 이탈리아 44명, 중국 20명, 일본 32명이었는데 조선은 50명이었다<표 참고>.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은 농업의 인구부양력이 높다는 것, 즉 토지 생산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밭에 비해서 벼를 심는 논의 토지생산성이 월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에는 밀 한 알을 뿌려서 네 알을 수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18세기 『택리지』는 볍씨 한 말을 파종하여 40~50말을 거두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였다. 논의 비중은 15세기 초 20% 전후에서 18세기 초에는 30% 정도로 늘어났다.
이와 같이 중세 농업의 발전 방향은 토지 생산성의 증가였다.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하여 토지의 활용도를 높여갔으며, 퇴비를 투입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김매기에 많은 노동을 투입하였다. 노동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노동을 절약하기 위한 농기구나 농기계의 도입을 촉진할 인센티브는 매우 약하였다. 토지 생산성이 높은 대신에 인구밀도가 높고 노동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에 1인당 소득(생활수준)은 낮은 수준에 처하기 쉬웠다.
노비제도 해체되면서 소작농 확산
농업은 공업과 달리 생산과정이 길고 작업공간이 분산되어 있으며 자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기 때문에 노동과정을 감시(monitor)하기가 곤란하고 생산량의 변화에 따른 위험(risk)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감시 비용의 측면에서는 가족 노동력을 이용하는 소농(小農) 경영이 가장 적게 들지만, 생산요소를 부담하고 생산의 변동에 따른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대토지 소유자가 소농에게 땅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고자 하여도 소작농이 생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면 안심하고 땅을 빌려줄 수 없을 것이다. 감시와 부양에 비용이 지출됨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까지 노비를 이용한 농장 경영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소농경영의 안정성이 미흡했음을 이야기해준다. 노비제도는 18세기 이후에 급속히 해체되었는데, 무엇보다 소농경영이 확립되어 노비를 이용하는 것보다 소농에게 소작을 주는 편이 유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지주제(소작제)는 더욱 번성하게 되었는데, 소작료를 고정시킨 정액 소작제가 아니라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을 절반씩 같은 비율로 나누는 ‘병작반수(竝作半收)’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소작인이 모든 위험을 감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무엇보다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식량 생산이 증가해야만 하였다. 한국 중세의 인구추세는 자료가 부족해서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장기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던 것은 분명하다.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300만명, 14세기 말 조선왕조 개창 당시에 500만명, 19세기 후반 개항할 때 1700만명이라는 추정에 따르면 중세 동안 장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가 인구증가 속도가 빨랐다.
이런 인구 증가는 식량 생산을 위해 투입되는 생산요소(노동, 토지, 자본)의 하나인 ‘노동’이 증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지만, 계속 인구가 늘어나면 종국에는 ‘수확체감의 법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노동의 투입으로 획득되는 식량이 점차 줄어드는 지점에 이르게 되고 결국에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식량을 생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그림). 중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맬서스 함정’에 빠져 있는 경제였다.
생산성 증가해야 인구증가 지속 가능
식량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단계에 이른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다면 더 이상할 것이다. 9세기 신라 말에서 후삼국시대, 13세기 무신란에서 몽고침략기, 16세기 임진왜란 전후, 그리고 19세기에 민란이 크게 일어났던 시대가 생존의 위기에 떨어졌던 때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중세에 장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무엇인가 경제적인 변화가 진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동 투입의 증가로 인한 ‘수확체감’을 피하기 위하여 ‘토지’와 ‘자본’의 투입을 증가시키는 한편 기술 진보와 제도 혁신에 의한 생산성 증가가 없었다면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는 데 실패하였을 것이다.
토지(경지)의 증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졌다. 토지 면적을 증가시키는 것과 토지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다. 토지 면적의 증가는 고려시대에는 구릉지에서 산지 방향으로, 조선시대에는 방향을 바꾸어 저지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2세기의 『고려도경』은 고려에는 경지가 산지에 많아서 멀리서 보면 ‘사다리계단’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산마다 가득한 계단식 전답이 송나라 사람의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여름에 비가 집중해서 내리고 봄에 가뭄이 들기 쉬운 기후이기 때문에 물을 저장하는 것이 농사에 매우 중요한데 이와 관련된 수리시설의 건설은 ‘자본’ 투입의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는 계곡을 막아서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제언)가 많이 이용되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점차 하천에 천방(보)을 만들어 물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변해갔다. 경지가 저지대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토지의 활용도를 높인다는 것은 지력 회복을 위해 땅을 묵히는 기간을 단축하는 것은 물론 쉬지 않고 매년 경작하게 되고 나아가 1년에 두 차례 이상을 경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활용도가 높아지면 같은 면적의 토지라도 더 많이 수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휴경법이 일반적이었지만, 고려시대에는 1년이나 2년을 묵히는 ‘단기휴경’에서 1년에 한 번 경작하는 ‘연작상경’(連作常耕)으로 변해갔다. 이에 따라 3년 이상을 휴한하는 경지, 단기휴경을 하는 경지, 1년 1작하는 농지가 병존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세종대왕에 의해 편찬된 『농사직설』(1429년)에서 논이나 밭에서 모두 1년 1작을 기본적인 경작방법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상경’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의 보급으로 봄에 보리를 수확한 다음에 모를 옮겨 심을 수 있게 됨으로써 점차 1년 2작의 이모작도 가능하게 되었다.
1600년경 조선 인구밀도 세계 최고
이와 같이 토지의 확대와 활용도의 증가, 수리시설의 확충, 그리고 비료의 투입 등과 같은 새로운 농법의 도입으로 식량생산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1600년께의 인구밀도(1㎢당 인구)는 영국 22명, 프랑스 34명, 이탈리아 44명, 중국 20명, 일본 32명이었는데 조선은 50명이었다<표 참고>.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은 농업의 인구부양력이 높다는 것, 즉 토지 생산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밭에 비해서 벼를 심는 논의 토지생산성이 월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에는 밀 한 알을 뿌려서 네 알을 수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18세기 『택리지』는 볍씨 한 말을 파종하여 40~50말을 거두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였다. 논의 비중은 15세기 초 20% 전후에서 18세기 초에는 30% 정도로 늘어났다.
이와 같이 중세 농업의 발전 방향은 토지 생산성의 증가였다.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하여 토지의 활용도를 높여갔으며, 퇴비를 투입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김매기에 많은 노동을 투입하였다. 노동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노동을 절약하기 위한 농기구나 농기계의 도입을 촉진할 인센티브는 매우 약하였다. 토지 생산성이 높은 대신에 인구밀도가 높고 노동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에 1인당 소득(생활수준)은 낮은 수준에 처하기 쉬웠다.
노비제도 해체되면서 소작농 확산
농업은 공업과 달리 생산과정이 길고 작업공간이 분산되어 있으며 자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기 때문에 노동과정을 감시(monitor)하기가 곤란하고 생산량의 변화에 따른 위험(risk)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감시 비용의 측면에서는 가족 노동력을 이용하는 소농(小農) 경영이 가장 적게 들지만, 생산요소를 부담하고 생산의 변동에 따른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대토지 소유자가 소농에게 땅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고자 하여도 소작농이 생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면 안심하고 땅을 빌려줄 수 없을 것이다. 감시와 부양에 비용이 지출됨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까지 노비를 이용한 농장 경영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소농경영의 안정성이 미흡했음을 이야기해준다. 노비제도는 18세기 이후에 급속히 해체되었는데, 무엇보다 소농경영이 확립되어 노비를 이용하는 것보다 소농에게 소작을 주는 편이 유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지주제(소작제)는 더욱 번성하게 되었는데, 소작료를 고정시킨 정액 소작제가 아니라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을 절반씩 같은 비율로 나누는 ‘병작반수(竝作半收)’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소작인이 모든 위험을 감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