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34)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빙하와 어둠의 공포'
르포와 소설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미학적 심연


1984년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에게 ‘엘리아스 카네티 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북극 탐험대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라인홀트 메스너의 고비사막 횡단 체험기인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를 읽으면서였다. 메스너는 이 책에서 “북극지방에 대한 수많은 책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빙하와 어둠의 공포》만큼 나를 전율케 한 책은 없었다”고 썼다.

메스너는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전설적 산악인이다. 그린란드, 티베트, 남극도 횡단했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런 메스너를 전율시킨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란스마이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이 1872년부터 1874년까지 2년에 걸친 체험을 기록하고 스케치한 것에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話者)는 ‘나’이다. 그러니까 1인칭 소설이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나’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 ‘나’가 주인공을 관찰하는 이른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했다. 그런데 ‘나’가 관찰하는 이는 죽은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사람이 남긴 기록이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요제프 마치니다.

1948년 이탈리아 북동부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난 마치니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마치니에게 가장 매혹적인 이야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원 가운데 한 사람인 어머니의 증조부 안토니오 스카르파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치니의 북극에 대한 환상은 여기에서 피어났다.

청년으로 성장한 마치니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화자인 ‘나’가 이야기꾼 마치니를 만난 곳은 종족의 역사와 여행 관련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책방이었다. 마치니는 ‘나’에게 ‘과거를 새롭게 그려내는 존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내가 상상하는 것들은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의 눈에 비친 마치니는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이 깊어질수록 이야기의 배경을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황량한 자연과 북극의 오지로 옮겨가는 몽상적 존재였다.

당시 마치니가 열광적으로 몰두한 과거 이야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탐험 기록이었다. 생존자들의 탐험 기록은 마치니에게는 꿈의 기록이었다. 문제는 꿈속의 사물과 배경들이 꿈에서 깨어나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손에 만져지는 데 있었다. 마치니는 탐험 기록에 빠져들면 들수록 과거의 이야기인 그 기록을 현실로 바꾸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의 루트를 따라 항해하는 연구용 배에 오르지만 계획이 실패하자 홀로 북극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화자인 ‘나’가 사라져버린 마치니가 남긴 기록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마치니가 남긴 기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탐험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생존자들이 기록한 이야기를 그대로 쓰면 르포가 된다. 작가는 허구의 인물인 마치니를 창조하여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르포에서 소설로 변화시켰다. 이 소설의 형식이 미학적인 까닭은 마치니를 관찰하는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매일, 점점 더 눈에 띄지 않고 흔적이 없어져가는 듯이 보였다…… 정리된 삶의 따뜻한 편안함에서 정적, 추위, 얼음으로 내모는 그 유혹적인 힘에 대한 증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1인칭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빙하와 어둠의 공포》에 등장하는 ‘나’처럼 희귀한 존재는 처음 보았다. 아무리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 할지라도 ‘나’의 존재감은 독자에게 명료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나’는 존재감이 너무 희박해 유령처럼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몽상적 존재인 마치니의 존재감은 훨씬 명료하다. 마치니보다 더 명료한 존재가 100여 년 전에 사라져버린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원들이다. 이 소설의 미학적 바탕은 여기에 있다.

독자인 나의 시선으로 보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작가 란스마이어의 분신으로, 마치니는 란스마이어가 희구하는 ‘내 속의 나’로 비친다. 소설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다. 소설가는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가 독자에게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을 꿈꾼다. ‘나’가 이야기를 꾸며내는 소설가라면, 마치니는 꾸며낸 이야기를 현실로 바꾸어버리는 존재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소설가의 은밀한 욕망을 그려낸 미묘한 소설이다. 처음 읽으면 건조한 기록물처럼 느껴지나, 두 번째 읽으면 탐험의 대상인 북극이 자연(우주)의 심연 더 나아가 인간의 심연으로 의미가 확장되면서 작가의 은밀한 욕망을 치밀하게 녹여낸 ‘깊은 소설’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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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로 떠난 탐험대를 뒤좇는 청년

♣'빙하와 어둠의 공포'줄거리


오스트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는 1954년 벨스에서 태어났다. 기자로 일하며 각종 잡지의 자유기고가와 르포 작가로 활동한 경력은 작품에 현장성을 부여하는 란스마이어 특유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첫 작품 《찬란한 종말》 발표 이후 1984년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를 소재로 한 《최후의 세계》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거대한 자연의 파괴력과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능을 파고드는 작품을 발표하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작가로 자리매김했고, 최근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기 위해 떠난 탐험대와 그 궤적을 뒤좇다 사라진 청년의 이야기, 그 청년의 노트 발견을 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의 내레이션이 다층적 구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1872년 지휘관 파이어와 바이프레히트를 주축으로 두 명의 장교, 의사, 빙하 전문가, 기관사, 사냥꾼 등 총 24명으로 구성된 북극 탐험대가 노르웨이의 트롬쇠항을 출발한다. 하지만 그들을 실은 테게트호프호는 출발한 지 14일 만에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 갇히고, 2년간 이어진 전대미문의 탐험이 시작된다. 이 작품은 허구와 현실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뛰어난 예술적 구성’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았고, 엘리아스 카네티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34)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빙하와 어둠의 공포'
원제: Die Schrecken des Eises und Finstereis

저자: Christoph Ransmayr

발표: 1984년

분야: 오스트리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빙하와 어둠의 공포

옮긴이: 진일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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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극에 가면 살기 위해 ________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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