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더 인정받는 '예술계 사관학교’
지난해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시상식에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젊은 예술가 5명이 피아노·성악·바이올린 부문을 석권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로 미국과 프랑스가 각각 한 명씩 상위권 입상자를 배출한 것으로 봤을 때 한국의 이례적인 무더기 입상 소식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 놀라운 건 5명의 젊은 예술가 중 4명이 유학파가 아닌 한국에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를 졸업한 토종 음악인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달 이탈리아 국제발레콩쿠르에서도 한예종 출신의 한국 무용수 10명이 상을 휩쓸었다. 한예종 무용원 현대무용 출신이 주축을 이룬 LDP무용단은 미국 최고(最古) 역사를 자랑하는 제이콥스 필로우 댄스 페스티벌에 한국 단체로는 처음으로 초청받았다. 지난해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한 김기민 군도 한예종 재학생이다. 클래식과 무용뿐만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도 한예종 출신의 감독·작가 등이 신선한 감각과 탁월한 작품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배우로는 이선균 오만석 이동규 김혜나 등이 활약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를 만들어낸 최현명,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등으로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신진 소설가로 꼽히는 김애란도 한예종을 졸업했다. 1993년 문을 열어 올해 20살이 된 한예종은 이처럼 졸업생들의 눈부신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예술계의 핵심축으로 떠올랐다.
한예종은 1993년 전문 예술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문화관광부 산하 국립 교육기관이다. 1993년 음악원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연극원(1994년) 영상원(1995년) 무용원(1996년) 미술원(1997년) 전통예술원(1998년)을 설립해 모두 6개 원으로 구성돼 있다. 6개 원은 각자 독자성과 전문성을 지닌 독립된 교육기관이지만 예술이라는 공동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전문성을 심화시켜 나가도록 조직돼 있다.
학사과정은 예술사 과정, 예술전문사 과정, 예술실기 연수 과정(예비학교)과 예술영재 선발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 학교의 예술사 과정은 일반 대학의 학부, 전문사 과정은 대학원 과정에 해당한다. 학사 학위는 수여하지만 석·박사 학위는 받을 수 없다.
예술영재교육은 한예종의 강점이다. 한예종은 재능 있는 초·중·고교 학생들을 별도로 선발, 주말에 전문 실기 지도를 해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실력 있는 인재를 미리 확보한다. 권위 있는 국제 무대에서 수상한 김선욱과 손열음, 박준호 등 상당수 학생이 예비학교를 거쳐 영재로 입학했다. 반면 영상원, 연극원 학생들은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앳된 고교생부터 머리가 희끗한 중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한예종에 다니고 있지만 예술을 향한 열정은 모두 같다. 영상 관련 회사를 다니다가 한예종에 입학한 김건 씨(영상원 영화과 3년)는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배우다보니 목표가 더욱 확실해졌다”며 “이창동 감독, 나홍진 감독 등 유명한 영화감독과 현장에서 직접 배우는 수업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짧은 기간에 한예종이 이처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던 비결으로 실기 위주의 학생 선발을 꼽는다. 한예종 입시에는 수능성적이 반영되지 않는다. 교수들은 학생의 실기 능력을 가장 중점적으로 보고 창의적 사고력과 발전 가능성 등을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독특한 실기 시험 과제가 나올 때도 있다. 미술원 실기 시험에서는 흑염소 15마리를 각 방에 풀어놓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게 하는 과제가 나온 적도 있다. 한예종 학생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게 되는 것”을 한예종의 특징으로 꼽았다. 손요나 씨(연극원 무대미술과 3년)는 “다른 학교 친구들(예술 전공)은 1~2학년 때 교양과목을 많이 들어야 하는데 한예종은 90% 이상 전공 실기 과목을 들어야 한다”며 “전공 실기에만 매진하다보니 일반 대학보다 일찍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겨울방학 기간이지만 한예종 건물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예술계의 특성 탓인지 낮보다 밤에 공부하고 작업하는 올빼미족이 많기 때문이다. 기숙사는 따로 출입시간 제한이 없다. 24시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과제로 밤을 새우는 방이 많다. 문새한별 씨(전통원 음악과 3년)는 “한예종에 가면 화장실을 한번 가보라는 말이 있다”며 “콩쿠르를 앞두고는 연습실이 모자라 강당이나 화장실에서 연습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 정도로 연습벌레들만 모였다”고 전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원(학과)들과의 교류도 많다. 예를 들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연극학 수업에서 학생들은 한 학기에 공연을 하나 만들어내야 한다. 연출을 담당하는 학생,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학생, 시나리오를 맡는 학생, 연기를 맡는 학생 등이 한 자리에 모여 일을 하게 된다. 이때 맺은 인맥이 졸업 후 한예종 출신들의 큰 힘이 된다고. 이러한 독특한 학교 문화가 최근 사고를 쳤다. 지난해 베를린 영화제 단편경쟁에서 은곰상을 받은 《부서진 밤》은 한예종 학생의 졸업 작품이다. 영화 《김종욱 찾기》는 한예종 학생들의 과제가 만들어낸 뮤지컬이 원작이다. 졸업영화제 때는 새로운 인재를 찾는 영화사나 PD들이 ‘입도선매’를 위해 한예종을 찾는다.
한예종은 현재 석관동 캠퍼스와 서초동 캠퍼스로 나뉘어져 있다. 석관동 캠퍼스는 영상원 미술원 연극원 전통예술원 등으로 구성돼 있고 서초동에는 무용원과 음악원이있다. 석관동 캠퍼스는 과거 군사정권 시설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중앙정보부 자리에 있다. 한때 영상원이 중앙정보부 건물을 개조해서 썼지만 지금은 허물고 새 건물을 지었다. 깔끔한 캠퍼스 건물들은 완공 후 ‘토목건축기술대상’을 수상했다. 학교 곳곳에 한예종 학생들의 미술작품들이 전시돼 있어 캠퍼스 전체가 작은 미술관이라는 느낌이다. 한예종 학생들은 시설면에서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안영환 씨(무용원 실기과 3년)는 “중급실기 고급실기를 진행하는 연습실은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전했다. 한예종은 2012학년도 등록금을 5% 인하했다. 2012년도 등록금은 250만원 수준으로 사립대 예술대학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최만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bebop@hankyung.com
세계에서 더 인정받는 ‘예술계 사관학교’
지난해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시상식에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젊은 예술가 5명이 피아노·성악·바이올린 부문을 석권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로 미국과 프랑스가 각각 한 명씩 상위권 입상자를 배출한 것으로 봤을 때 한국의 이례적인 무더기 입상 소식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 놀라운 건 5명의 젊은 예술가 중 4명이 유학파가 아닌 한국에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를 졸업한 토종 음악인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달 이탈리아 국제발레콩쿠르에서도 한예종 출신의 한국 무용수 10명이 상을 휩쓸었다. 한예종 무용원 현대무용 출신이 주축을 이룬 LDP무용단은 미국 최고(最古) 역사를 자랑하는 제이콥스 필로우 댄스 페스티벌에 한국 단체로는 처음으로 초청받았다. 지난해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한 김기민 군도 한예종 재학생이다. 클래식과 무용뿐만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도 한예종 출신의 감독·작가 등이 신선한 감각과 탁월한 작품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배우로는 이선균 오만석 이동규 김혜나 등이 활약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를 만들어낸 최현명,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등으로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신진 소설가로 꼽히는 김애란도 한예종을 졸업했다. 1993년 문을 열어 올해 20살이 된 한예종은 이처럼 졸업생들의 눈부신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예술계의 핵심축으로 떠올랐다.
한예종은 1993년 전문 예술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문화관광부 산하 국립 교육기관이다. 1993년 음악원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연극원(1994년) 영상원(1995년) 무용원(1996년) 미술원(1997년) 전통예술원(1998년)을 설립해 모두 6개 원으로 구성돼 있다. 6개 원은 각자 독자성과 전문성을 지닌 독립된 교육기관이지만 예술이라는 공동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전문성을 심화시켜 나가도록 조직돼 있다.
학사과정은 예술사 과정, 예술전문사 과정, 예술실기 연수 과정(예비학교)과 예술영재 선발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 학교의 예술사 과정은 일반 대학의 학부, 전문사 과정은 대학원 과정에 해당한다. 학사 학위는 수여하지만 석·박사 학위는 받을 수 없다.
예술영재교육은 한예종의 강점이다. 한예종은 재능 있는 초·중·고교 학생들을 별도로 선발, 주말에 전문 실기 지도를 해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실력 있는 인재를 미리 확보한다. 권위 있는 국제 무대에서 수상한 김선욱과 손열음, 박준호 등 상당수 학생이 예비학교를 거쳐 영재로 입학했다. 반면 영상원, 연극원 학생들은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앳된 고교생부터 머리가 희끗한 중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한예종에 다니고 있지만 예술을 향한 열정은 모두 같다. 영상 관련 회사를 다니다가 한예종에 입학한 김건 씨(영상원 영화과 3년)는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배우다보니 목표가 더욱 확실해졌다”며 “이창동 감독, 나홍진 감독 등 유명한 영화감독과 현장에서 직접 배우는 수업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짧은 기간에 한예종이 이처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던 비결으로 실기 위주의 학생 선발을 꼽는다. 한예종 입시에는 수능성적이 반영되지 않는다. 교수들은 학생의 실기 능력을 가장 중점적으로 보고 창의적 사고력과 발전 가능성 등을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독특한 실기 시험 과제가 나올 때도 있다. 미술원 실기 시험에서는 흑염소 15마리를 각 방에 풀어놓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게 하는 과제가 나온 적도 있다. 한예종 학생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게 되는 것”을 한예종의 특징으로 꼽았다. 손요나 씨(연극원 무대미술과 3년)는 “다른 학교 친구들(예술 전공)은 1~2학년 때 교양과목을 많이 들어야 하는데 한예종은 90% 이상 전공 실기 과목을 들어야 한다”며 “전공 실기에만 매진하다보니 일반 대학보다 일찍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겨울방학 기간이지만 한예종 건물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예술계의 특성 탓인지 낮보다 밤에 공부하고 작업하는 올빼미족이 많기 때문이다. 기숙사는 따로 출입시간 제한이 없다. 24시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과제로 밤을 새우는 방이 많다. 문새한별 씨(전통원 음악과 3년)는 “한예종에 가면 화장실을 한번 가보라는 말이 있다”며 “콩쿠르를 앞두고는 연습실이 모자라 강당이나 화장실에서 연습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 정도로 연습벌레들만 모였다”고 전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원(학과)들과의 교류도 많다. 예를 들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연극학 수업에서 학생들은 한 학기에 공연을 하나 만들어내야 한다. 연출을 담당하는 학생,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학생, 시나리오를 맡는 학생, 연기를 맡는 학생 등이 한 자리에 모여 일을 하게 된다. 이때 맺은 인맥이 졸업 후 한예종 출신들의 큰 힘이 된다고. 이러한 독특한 학교 문화가 최근 사고를 쳤다. 지난해 베를린 영화제 단편경쟁에서 은곰상을 받은 《부서진 밤》은 한예종 학생의 졸업 작품이다. 영화 《김종욱 찾기》는 한예종 학생들의 과제가 만들어낸 뮤지컬이 원작이다. 졸업영화제 때는 새로운 인재를 찾는 영화사나 PD들이 ‘입도선매’를 위해 한예종을 찾는다.
한예종은 현재 석관동 캠퍼스와 서초동 캠퍼스로 나뉘어져 있다. 석관동 캠퍼스는 영상원 미술원 연극원 전통예술원 등으로 구성돼 있고 서초동에는 무용원과 음악원이있다. 석관동 캠퍼스는 과거 군사정권 시설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중앙정보부 자리에 있다. 한때 영상원이 중앙정보부 건물을 개조해서 썼지만 지금은 허물고 새 건물을 지었다. 깔끔한 캠퍼스 건물들은 완공 후 ‘토목건축기술대상’을 수상했다. 학교 곳곳에 한예종 학생들의 미술작품들이 전시돼 있어 캠퍼스 전체가 작은 미술관이라는 느낌이다. 한예종 학생들은 시설면에서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안영환 씨(무용원 실기과 3년)는 “중급실기 고급실기를 진행하는 연습실은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전했다. 한예종은 2012학년도 등록금을 5% 인하했다. 2012년도 등록금은 250만원 수준으로 사립대 예술대학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최만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bebop@hankyung.com
세계에서 더 인정받는 ‘예술계 사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