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왼손에 새겨진 글자 하나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니콜라이 레스코프 '왼손잡이'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소설이 있다. 종이에 메모를 하면서 따라 읽어야 무슨 이야기인가 대충 감 잡을 수 있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그냥 까닥까닥 엄지발가락을 흔들면서 읽어도 아무 지장 없는 소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러시아 1급 소설들은 전자인데,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주로 ‘스키’나 ‘레프’ ‘세프’로 끝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스키’가 그 ‘스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딴 ‘스키’일 때 느껴지는 허망함(그러면서 등장인물들은 또 왜 그다지도 많단 말인가. ‘스키’들이 떼로 등장할 때의 어리둥절함이란, 말을 말자).

그러니 어쩌나. 백지 위에 남의 집 가계도를 열심히 그려가면서 소설을 읽어나갈 수밖에.

우리에게 러시아 소설들이 시베리아 잣나무처럼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좋을 존재로 남은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왼손잡이》는 따로 메모가 필요 없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이름이 그냥 ‘왼손잡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우리에게 도통 메모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서둘러 넘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즉, 플롯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이란 뜻이다.

사실 ‘왼손잡이’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영국에서 현미경을 통해서야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인공 벼룩(이 벼룩은 열쇠를 넣어 돌리면 펄쩍펄쩍 뛰어오르기까지 한다)을 선물받은 러시아 황제는 자국의 기술이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믿었고, 그래서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장인들에게 이 인조 미생물을 보여주고 뭘 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보라고 하라.

나는 짐의 사람들이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노라’라고. 그래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사팔뜨기에 왼손잡이인 우리의 주인공이다.

뺨에 커다란 반점이 있고, 관자놀이 부근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우리의 왼손잡이는 현미경도 없이 2주일 만에 뚝딱 놀라고 까무러칠 만한 장치를 인공 벼룩에 장착하고 만다(아아, 그게 어떤 장치인지는 차마 이 자리에서 밝힐 수가 없다. 그저 깜찍한 어떤 것이라고밖에).

그리고 그 공로로 영국에 가게 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무지막지한 술내기 끝에 병원 복도 바닥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레스코프는 가방끈이 긴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일찍 학교를 중퇴한 후 대부호들의 영지를 조사하는 일을 맡아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닌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고, 그때 만난 많은 민중들이 그의 소설 쓰기 스승이 되었다.

‘왼손잡이’ 역시 그가 들은 전설에 기초해 쓰인 작품이었다(후에 그는 그것이 전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아마도 전설이 맞을 거 같다.

전설이 아니라고 해야지 독창성이 인정되니까, 어쨌든 작가들이란 그것에 목매는 법이니까).

왼손잡이 이야기가 전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냈는가, 하는 점이다. 멀리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형뻘이자, 가깝게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속 ‘황만근’의 증조할아버지뻘 되는 레스코프의 왼손잡이는, 자신의 몸 전체를 소진시키면서까지도 ‘인간다운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레스코프의 의도는 명확한 것이었다. 작품 말미에 그가 사족인 듯 남긴 말처럼 ‘기계 문명’의 발전이 위험한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상상력까지 녹여 더 이상 ‘전설’이 태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 속 왼손잡이를 사람이 아닌, ‘전설’ 그 자체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술에 취한 채 허름한 병원 복도 구석에서 숨을 거둔 전설, 지배 계층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전설.

레스코프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전설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말보다 문장이 우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짓는 주름과 눈빛, 손짓과 잔기침은 모두 문장과 문장 사이로, 강철 같은 인과관계 틈 사이로 녹아들고 말았다.

설령 새로운 전설이 우리 귀와 귀 사이로 흘러 들어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다시 140자로, 리트윗으로 처리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까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고 마음을 내주는 까닭은, 우리 모두의 왼손에 적힌 한 글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그 글자가 궁금하면 지금 당장 당신의 왼쪽 손바닥을 가로로 펼치고 거기에 적힌 손금을 읽어보라.
거기 분명 한 글자가 적혀 있다). 그 글자가 우리에겐 유일한 희망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개인 개인이 전설을 만들 수 있는, 누군가에게 그 전설을 들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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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하게 죽어가는 왼손잡이 대장장이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1831년 러시아 중부 오룔 현 고로호보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방 관청 서기로 근무하며 당시 러시아의 생생한 현실을 접했고, 이때의 경험이 러시아 민중의 삶과 밀착된 작품을 쓸 수 있는 토대가 됐다.

1863년 첫 단편 《사향소》를 발표했고, 1872년 대표작으로 꼽히는 《성직자들》의 출간과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작가가 됐다.

그가 구사했던 언어와 특이하고 실험적인 장르 파격은 문단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으며 체호프와 고리키 등 20세기 초반 문학 양식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95년 눈을 감기까지 문단의 호평과 독자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작가 레스코프는 오늘날까지 ‘천재적인 이야기꾼’으로 불리며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왼손잡이》는 러시아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자 러시아적 정서의 원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꼽힌다.

천재 장인으로 대접받을 만한 대장장이 왼손잡이가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초라하게 죽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러시아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온갖 은어와 충청도 사투리까지 동원해 레스코프 특유의 언어를 전달하고자 한 번역가의 노력이 더해져 원문의 생생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왼손잡이’에는 농노제의 부조리와 농노들의 한(恨)을 비극적으로 형상화한 《분장예술가》, 러시아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작가의 풍부한 지식과 애정이 문학적으로 승화된 《봉인된 천사》 두 편도 함께 실려 있다.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니콜라이 레스코프 '왼손잡이'
원제: Левша·Тупейный художник·Запечатлений ангел

저자: 니콜라이 레스코프(1831~1895)

발표: 1881~1873

분야: 러시아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왼손잡이

옮긴이: 이상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2(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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