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작은 할아버지 괴테와 연애하게 된 사연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16)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괴테가 살았던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몇몇 작가와 독일문학 전공자, 그외 여럿이 함께였어요.

대문호 집을 구경하는 풋내기 소설가는, 그야말로 부잣집에 심부름 간 촌뜨기 하녀였습니다.

뭔가 압도당하는 기운에 입을 쩍 벌리고 섰다가, 괜히 심사가 뒤틀려 뭐 하나 주워갈 거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그러다 마침, 흠잡을 게 눈에 띄었습니다.

침대. 괴테의 침대라고 하는데, 크기가 너무 작아요, 작아도 너무 작아요,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했지요.

괴테가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기럭지가 어떻게 이렇게 짧을 수가 있어? 기럭지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짝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혼쭐이 났습니다.

대문호 괴테에게, 기럭지가 뭐야, 키도 아니고 신장도 아니고.

어디 감히, 괴테에게, 건방지게.진짜 혼났습니다.

고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농담이라고는 씨도 안 먹히게 생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죠, 덩치는 어찌나 큰지 함부로 덤벼들었다가 혼쭐날 것 같죠, 딱 심술 맞고 꼬장꼬장하고 냄새나는 노인네 같습니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그런 노인네와 한 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그러니 맛도 안 보고 등을 돌리지요.꼰대하고는 안 놀아.

신과 악마, 선과 악, 비극과 구원을 담은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괴테의 《파우스트》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그런데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 조금만 친해지면 꽤 재밌어집니다.

귀여운 구석도 있고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한 쌍입니다.

파우스트를 놓고 신과 내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을 섭렵했지만 진리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우울증에 빠져 있던 참이구요.

이때 메피스토펠레스가 거래를 제안하고 파우스트가 받아들입니다.

파우스트의 충실한 삽살개가 될 테니, 만족을 하면 자기한테도 똑같이 되라는 것.

그래서 다음과 같이 피의 계약서를 쓰면서 한 쌍이 되는 겁니다.

내가 순간을 향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말을 한다면 너는 나를 꽁꽁 묶어도 좋다.

그럼 나는 기꺼이 멸망하리라.그때엔 조종이 울려도 좋을 것이며, 그때 너는 종노릇에서 해방되리라.

메피스토펠레스는 일단 마녀의 물약으로 파우스트에게 젊음을 되찾게 해줍니다.

이십대 청춘이 된 파우스트, 사랑부터 해야겠죠. 순결한 그레첸과 만나 단박에 사랑에 빠집니다.하지만 사랑에는 운명의 장난이 빠질 수 없는 법.

메피스토펠레스의 농간으로 그녀의 오빠가 파우스트의 칼에 찔려 죽고, 그녀는 미쳐서 아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갇혀 파우스트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택한다.

아, 그야말로 비극의 연속입니다.

이 비극은 언제 끝날까요.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가져갈까요?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관계는 이걸로 끝인 건가요?

아니죠, 이제야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되는 걸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며, 전쟁에서 승리도 하고, 미의 화신 헬레나와 좋은 시간도 보내고, 간척사업도 일구어내지요.

하지만 그것은 모두 메피스토펠레스의 알량한 수작과 눈속임으로 얻은 것이니, 어느 순간 구름처럼 휙, 사라질 수밖에요.

그래서 파우스트는 악마의 도움 없이, 대담하고 부지런한 일꾼들과 함께 튼튼한 언덕을 만들기로 합니다.

마법의 외투를 입고 도착한 미지의 나라는 결국 허상이라는 걸 알아버린 거죠.

젊음도 사라지고 눈도 먼 채 늙은이로 되돌아온 파우스트.

드디어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

위험에 싸여 있어도 값진 세월을 보내는 바로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

사랑만이 사랑하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

미래를 꿈꾸며 행복을 예감한 파우스트.

드디어 만족을 느끼며 외칩니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흔적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쓰러집니다.

승리는 이렇게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돌아가는 걸까요?

신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요.

홀리는 기술이야 악마들보다 천사들이 한 수 위죠.

메피스토펠레스가 천사들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천사들이 파우스트를 빼앗아갑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악마가 속아 넘어갔으니 누구 탓할 수도 없고 하소연할 데도 없고.

파우스트는 물론 천상으로 무사히 올라갔겠지요.

그곳에선 천사들의 합창 소리 들렸겠지요.

사랑하는 그레첸도 기다리고 있겠지요.

기럭지 흉을 보더니, 아예 침대로 폴짝 뛰어올라가 노인네 수염을 잡아당기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파우스트》 책장을 덮고 있는 나는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아니라 미소년과 함께 모험을 즐기다 온 것만 같습니다.

매끈한 청년과 절절한 연애를 한 것도 같구요.

그리고 이런 기분.

괴물들 나라에 가서 나쁜 짓 실컷 하며 재미나게 놀다 돌아오니 별 일 없이 조용하네?

단, 구원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니, 대문호 집에서 뭐 주워갈 생각이랑 접고, 죽을 때까지 열심히 쓸 것.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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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영혼을 걸고 계약하는 파우스트

>> ‘파우스트’ 줄거리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완성한 희곡 《파우스트》는 전 인류의 역사를 포괄하는 깊이를 지닌 대작이다.

16세기께 독일에 실존했던 파우스트 박사의 전설에 영감을 얻어 수많은 예술작품이 탄생했지만,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괴테가 일생 동안 생각하고 체험한 모든 것이 집약된 작품이자 인간정신의 보편적 지향을 제시하는 고전인 《파우스트》는 인간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고, 시공간을 초월해 선과 악의 세계를 오가며 갖가지 인생을 경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술의 힘으로 향락을 추구하고, 젊음을 얻지만 사랑에 실패하는 ‘비극 제1부’와 종교, 철학, 과학, 예술, 국가, 정치 등 보다 심오하고 포괄적인 가치를 통해 인간 구원의 문제를 폭넓게 탐구한 ‘5막으로 구성된 비극 제2부’로 이루어진다.

작품은 노학자 파우스트가 세상과 고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파우스트는 우주의 본질과 창조의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지만, 궁극적 진리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절망하여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독배를 마시려던 순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영혼을 걸고 계약을 맺자고 유혹한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종이 되어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온갖 환락을 맛보게 해주는 대신, 파우스트가 만족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외치는 순간, 그의 영혼을 가져간다는 조건이다……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16)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원제: Faust

저자: 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발표: 1831년

분야: 독일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파우스트

옮긴이: 이인웅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09~010(2009년)




⊙ 퀴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에게 ________를 약속한다면 영혼을 팔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