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남해원정 30년, 들여온 건 동물 뿐

3000t급 선박.3만명 장병 동원됐지만

인도양 30여개國 '유람'만 하고 돌아와

[경제사 뒤집어 읽기] (25) 500년前 해양대국 명나라
근대 세계사는 바다 쟁탈전으로 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세계사의 패권을 차지하느냐는 결국 인도양과 대서양,태평양을 누가 지배하는가에 좌우됐다.

근대 초에 이뤄진 대양의 지배가 그 다음 시기인 제국주의 시대에 대륙의 지배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해 현대사의 패자(覇者)로 등극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서구가 강력한 우승후보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대 최고의 해상 세력은 명 제국이었다.

과거 중국이 강력한 해양력을 보유한 제국이었다고 하면 낯선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지만,실제 대부분의 제국은 강력한 육상 세력이자 동시에 강력한 해상 세력이었다.

로마가 그랬고,페르시아나 무굴 제국이 그랬으며,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해양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유명한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이다.

무슬림 가문 출신의 환관 정화는 일찍 거세를 당해서 그런지 신장이 2m에 달하는 거구인 데다 문무 양쪽으로 출중한 능력을 겸비했고,무엇보다도 이슬람 세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명의 영락제(永樂帝)는 그에게 거대한 함대를 구성해 인도양 세계를 탐사하도록 명령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행해진 이 원정은 세계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정화의 선단은 60여척의 초대형 선박을 포함,모두 300척이 넘는 배에 3만명의 장병이 동원된 가공할 수준이었다.

이 선단의 중심을 이루는 대형 선박은 황제의 하사물이나 황제에게 올리는 예물 같은 보물을 나르는 선박이라는 의미에서 '보선(寶船)'이라 불렸다.

이 배는 길이 137m,선폭 56m에 9개의 돛대를 갖춘 약 3000t급의 배였다.

현대인에게는 이 정도의 배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당시 기준으로는 '날아다니는 섬'으로 신화화될 정도로 엄청난 구조물이었다.

이 배는 산업혁명 이후 영국 해군이 초대형 전함을 건조하기까지 세계사에서 최대의 배였다.

콜럼버스가 타고 간 배가 대체로 테니스코트 한 면 크기였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정화의 선박이 얼마나 엄청난 크기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정화 선단은 30년에 걸쳐 인도양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30여개국을 방문했다.

그들이 다녀간 곳은 동남아시아 각지와 인도,실론,아라비아,아프리카 동해안 지역에 걸쳐 있다.

심지어는 최근 1421년 정화 선단이 태평양을 넘어 아메리카에 도착했고,캘리포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아마존 지역을 탐험한 후 희망봉을 돌아 중국으로 귀환했다는 소위 '1421년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증거가 부족한 막연한 주장에 불과하지만,실제로 정화 선단이 태평양을 건널 정도의 항해 능력은 충분히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초에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단연 중국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항해 능력을 보유한 중국이 실제로 바다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사실 정화 선단이 인도양 세계 곳곳을 누비는 동안 눈에 띄는 결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식민지를 새로 건설한 것도 아니고 재화를 얻어온 것도 아니다. 정화의 원정으로 중국에 들여온 것은 기린이나 얼룩말 같은 이국의 동물들이나 타조 깃털 같은 진기한 물품에 불과했다.

그토록 엄청난 자원을 동원한 국책 프로젝트치고는 너무 허망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하고 중국의 해외 원정은 막을 내렸다.

북방 유목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의 관심이 내륙으로 향하게 된 이후 명나라는 오히려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다.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능력을 보유한 우승후보가 스스로 세계사의 무대에서 퇴장해 버린 셈이다.

같은 시기,유라시아 대륙 정반대편에 위치한 포르투갈에서도 바다로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항해왕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엔리크는 이슬람 세력을 누르고 아프리카의 금 산지로 직접 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열심히 해상 팽창을 준비했다.

그는 사그레스라는 지역에 일종의 해양연구소 겸 항해 전진기지를 세우고는 항해와 관련된 다방면의 전문가들을 모아 지식과 정보를 축적해 갔다.

한 인물을 내세워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지만,인구 100만명에 불과한 이 작은 나라가 짧은 시간 안에 세계의 바다로 팽창해 나가 광대한 식민 제국을 건설한 기적적인 움직임에 그가 초석을 놓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화의 남해 원정과 엔리크의 사업을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고래와 정어리 정도의 차이로 보인다.

1415년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이슬람권의 교역 및 군사 중심지인 세우타를 점령했지만 조만간 이 지역에서 국왕의 동생이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일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공포의 마지노선인 보자도르 곶을 넘어가는 데만 몇 번의 시도가 필요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바스쿠 다가마가 겨우 4척의 배를 이끌고 인도에 도착했다.

출발 당시에는 중국이 유럽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해상세력이 스스로 무대를 버리고 떠난 뒤 무섭게 달려드는 후발 세력이 그 빈자리를 장악해 들어갔다. 조만간 유럽이 대양의 지배자가 됐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