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기초 '애국적인 해적'이 일궜다

16세기 해적은 '반관반민' 사업자
국왕이 허가증 발급·직접 투자도


[경제사 뒤집어 읽기] (24) 드레이크의 해적활동과 비즈니스
영국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시대에 최강대국으로 군림했지만 사실 중세까지는 보잘것없는 변방의 2류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국의 국운이 꽃피어나기 시작한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58~1603) 시대였다. 장차 세계 최대의 식민제국으로 성장할 기반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영국은 세계의 바다로 팽창해 나갔다. 그런 움직임의 선두에 서 있던 세력은 다름 아닌 해적들이었다.

존 호킨스,프랜시스 드레이크,월터 롤리 같은 인물들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해적이 됐다.

닐 퍼거슨은 그의 저서 《제국》에서 이 시기 영국을 아예 '해적국가'로 규정하는데,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영국이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 최강의 식민세력인 스페인을 눌러 이겨야 했다.

스페인은 중남미 대륙의 거의 대부분과 플로리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의 많은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아시아에도 필리핀이라는 식민 거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후일 대영제국이 그렇게 주장하기 이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1558~1598)가 먼저 "내 영토에는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특히 멕시코와 페루에서 생산되는 금은은 스페인 왕실의 소중한 수입원이었다.

아메리카의 귀금속은 카르타헤나,베라크루스,놈브레 데 디오스 같은 항구에서 선적돼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의 세비야나 카디스 항에 들어왔다.

해적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탐나는 먹잇감이라 할 만했다.

영국과 스페인은 16세기 내내 앙숙이었다. 스페인이 가톨릭 최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반면 영국은 독자적인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다음 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직접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라도 양국 선박들은 공해상에서 서로 상대방 배를 공격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국왕은 민간업자에게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발행해 해적 행위를 공식화했다.

더 나아가 국왕이 '해적 사업'에 투자하는 일도 빈번했다.

존 호킨스가 그처럼 국왕의 호의를 입어 해적사업으로 성공한 초기 사례 중 하나다.

그는 1564년 4척의 배를 이끌고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공격했다.

이 사업에는 전국의 대귀족들이 출자했을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도 자신의 700t급 선박 '지저스(Jesus)' 호를 선단에 참여시켰다.

호킨스는 베네수엘라에서 엄청난 금은보화를 약탈해 돌아왔다.

이 사업의 수익성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그는 같은 사업을 한 번 더 시도하게 됐다.

1567년 호킨스는 다시 6척의 배를 이끌고 아메리카로 향했는데,이때 그의 조카인 드레이크도 동행했다.

그렇지만 해적질이 항상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베라크루스 항에 가까이 갔을 때 그들은 16척으로 이뤄진 스페인 선단과 조우했다.

스페인 배들의 포격을 받아 한 척이 침몰하고 두 척이 나포된 후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겨우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이 사건으로 양국의 외교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에 복수하고자 절치부심했다. 그는 안틸레스 제도에서 밀수 행위를 여러 차례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지리와 바다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1572년 국가로부터 약탈 허가를 받은 다음 선단을 이끌고 스페인 식민지로 향했다.

그가 노린 곳은 아메리카의 광산에서 캐낸 금은을 선적하는 중심지인 놈브레 데 디오스 항구였다.

그는 단 몇 시간의 공격으로 도시를 정복하고,스페인 지사의 관사에 보존돼 있던 100만파운드에 달하는 금,은,진주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재화 획득으로 만족하지 않고,부하들을 이끌고 다리엔 지협을 걸어서 넘는 특별한 모험을 시도했다.

이는 60년 전에 스페인 모험가인 발보아가 시도해 유럽인으로는 처음 태평양을 본 행위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뱀이 들끓는 밀림지대를 헤치고 나아가 드디어 그도 감개무량하게 태평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언젠가 태평양 위에 영국 배를 띄우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영국 해적의 애국적인 기도는 6년 뒤에 그대로 실현됐다.

여왕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을 탐험하겠다는 그의 제안을 허락해 주었다.

드레이크는 5척으로 구성된 자신의 선단을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했다. 심지어 금으로 된 식기까지 갖췄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국의 위엄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페인은 다른 나라 배가 태평양에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오가는 배들은 상대적으로 무장에 소홀했다.

드레이크가 태평양에서 손쉽게 '카카푸에고' 호를 나포한 것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갤리온 선에는 26t의 은,8만파운드의 금,20만파운드의 보석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드레이크는 태평양 연안을 따라 북아메리카를 탐험했고,샌프란시스코 부근에 상륙해 인디언과 만나기도 했다.

태평양을 횡단해 몰루카 제도를 방문한 다음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일주 항해를 마친 인물이 됐다.

그는 영국인에게는 민족 영웅이었지만 스페인인에게는 악마 같은 괴물로 비쳤다.

스페인은 영국 측에 그를 처벌할 것을 요청했지만,엘리자베스 여왕은 오히려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골든하인드 호에 직접 올라가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이 시기에 해적은 국가를 대신해 적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반관반민의 사업자들이었다.

초기에 제국의 형성은 바로 이런 애국적인 악당들에 의해 시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