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콩 100개의 가치는 노예1명이었다.
마야인에겐 신성함의 상징이자 화폐
중세 유럽에선 수도사·귀족의 사치품
1727년 식물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 폰 린네는 카카오를 테오브로마 카카오(Theobroma Cacao)로 명명했다.
이는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원래 의미했던 그대로 '신들의 음료'라는 뜻이다.
카카오나무를 처음 재배한 사람들은 서기 600년 즈음부터 1000년까지 번영을 누렸던 마야인들이었다. 이때 카카오는 신성함의 상징이었던 게 분명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12일이 되면 카카오를 선물하고,성년식을 치를 때면 꽃잎을 넣은 빗물에 카카오 가루를 녹여 몸에 발라준다.
죽은 사람의 무덤에도 카카오 콩을 담는 그릇을 부장품으로 넣었다.
신성한 가치는 곧 세속적 가치로도 전환됐다.
카카오 콩은 마야 사회에서 가장 귀한 상품이자 동시에 교환화폐 역할을 했다.
노예 한 명은 카카오 콩 100개,토끼 한 마리는 10개와 교환됐다.
이 상품은 카누를 이용해 마야 전 지역에 소통됐다.
마야 문명은 아직도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원인에 의해 10세기 즈음 갑자기 쇠락해 갔다.
그 후 14~16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아스텍 문명에서 카카오 콩이 다시 등장했다.
이곳에선 카카오나무를 '카카후아틀'이라 부르고 그 음료를 '소코아틀'이라 불렀다.
아스텍어로 '쓴 물'이라는 뜻을 지닌 '소코아틀'이라는 단어에서 나중에 영어의 초콜릿(chocolate)이나 불어의 쇼콜라(chocolat) 같은 단어들이 나왔을 것이다.
소코아틀을 만드는 법은 이렇다.
카카오 콩을 볶은 다음 맷돌로 갈아 물에 갠다.
여기에 옥수수 가루,용설란 꿀,피망,바닐라를 비롯한 향신료를 첨가한다. 이 용액을 거품이 일 때까지 몇 시간 동안 나무 도구로 친다.
아스텍 문명에서도 이것은 신성한 음식이었다.
아스텍 신화에 의하면 낙원의 정원지기인 날개 달린 뱀 케찰코아틀이 지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코코아나무를 주었다.
비의 신에게 부탁해 그 나무를 키우고,여인들을 시켜 열매를 갈아 음료를 만들게 했다.
이 음료는 무엇보다 황제와 귀족,혹은 전사의 음료였다.
목테수마 황제는 금으로 만든 잔으로 하루 50잔씩 마셨다고 한다.
아스텍 문명의 실상은 무력으로 정복한 많은 피지배 집단들의 연맹체에 가까웠다.
후일 유럽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쉽게 동맹 세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원한에 사무친 피지배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아스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는 주변 각지의 피정복민들이 바치는 카카오 콩이 매년 20~30t씩 들어왔다.
1504년 콜럼버스가 네 번째로 아메리카 대륙에 찾아왔을 때 온두라스 해안에서 인디오 추장으로부터 카카오 콩을 선물받았다.
최고의 물품을 선사한다는 의미였을 테지만 정작 콜럼버스는 그 가치를 전혀 몰랐다.
그로부터 약 15년 뒤인 1519년,코르테스가 목테수마 황제로부터 카카오 콩을 받았을 때에는 이제 그 의미를 감지했을 것이다.
2년 뒤,그가 테노치티틀란을 파괴했을 때 황궁의 지하 창고에는 2만개의 카카오 콩이 보관돼 있었다.
그는 이 중 일부를 유럽의 황제인 칼 5세에게 보내면서 "행군하는 병사가 한 잔만 마셔도 하루 종일 힘을 내게 하는 음료"라고 설명했다.
유럽에 들어온 카카오는 병사보다는 주로 수도원 수사들의 힘을 북돋는 역할을 했다.
다만 음료 제작법이 조금 수정돼 사탕수수 설탕,계피,후추,정향 등이 추가됐다.
핫초콜릿이라 부르게 될 이 음료는 더 달콤하고 향이 좋은 데다 칼로리가 더 높아졌을 것이다.
특히 금식 기도 기간 중에 이 음료를 마시면 기갈을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건 금식의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이 미묘한 문제에 대해 1569년 교황 피우스 5세는 이 음료의 복용은 금식을 깨는 것이 아니라는 공식 결정을 내렸다.
수도사들은 이것이 '영혼의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음료라고 주장했다.
영양학적 분석에 의하면 초콜릿 안에는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신경전달 물질이 들어 있다고 하니 16세기 수도사들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조만간 이 음료는 종교 영역에서 벗어나와 왕실 사람들과 귀족,부유한 부르주아들의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데에도 사용됐다. 마드리드에서는 핫초콜릿 가게들이 생겨났다.
곧 스페인 음료는 프랑스 왕실로 전파됐다.
루이 13세와 결혼한 안,루이 14세와 결혼한 마리-테레즈 모두 스페인 출신으로 핫초콜릿 '중독자'에 가까웠다.
루이 14세의 애첩 중 한 명인 멩트농 부인도 이 부드러운 음료의 맛을 배워 축제일에 베르사유궁에서 핫초콜릿을 마시도록 했다.
당시는 무엇이든 궁정에서 인기를 얻으면 곧 전국의 내로라하는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따라하는 것이 관례였다.
베르사유와 파리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 조만간 전 유럽의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기호품이 됐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상황 변화에 능통하게 적응해 전 유럽에 코코아를 판매하는 중심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초콜릿은 화려한 변신을 시작했다.
빈에서는 휘핑크림을 얹은 '비엔나 초콜릿'을 내놓았고,이탈리아에서는 사랑의 힘을 배가하는 음료로 애용됐다.
카사노바가 대표적인 예다.
스위스의 앙리 네슬레는 농축 우유와 초콜릿을 섞어 밀크 초콜릿의 대부가 됐다.
프랑스의 약제사 므니에는 쓴 약에 초콜릿을 입히는 법을 개발했다가 아예 초콜릿 정제(새알 초콜릿)를 개발했다.
수요가 늘자 카카오 생산도 세계 식민지 전체로 확산됐다.
멕시코 원산이었던 이 상품은 오늘날 가나(세계 1위 생산국) 나이지리아 카메룬 등 아프리카 지역과 남미의 브라질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신들의 음료는 어느덧 세계인의 기호품으로 거듭났다.
마야인에겐 신성함의 상징이자 화폐
중세 유럽에선 수도사·귀족의 사치품
1727년 식물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 폰 린네는 카카오를 테오브로마 카카오(Theobroma Cacao)로 명명했다.
이는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원래 의미했던 그대로 '신들의 음료'라는 뜻이다.
카카오나무를 처음 재배한 사람들은 서기 600년 즈음부터 1000년까지 번영을 누렸던 마야인들이었다. 이때 카카오는 신성함의 상징이었던 게 분명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12일이 되면 카카오를 선물하고,성년식을 치를 때면 꽃잎을 넣은 빗물에 카카오 가루를 녹여 몸에 발라준다.
죽은 사람의 무덤에도 카카오 콩을 담는 그릇을 부장품으로 넣었다.
신성한 가치는 곧 세속적 가치로도 전환됐다.
카카오 콩은 마야 사회에서 가장 귀한 상품이자 동시에 교환화폐 역할을 했다.
노예 한 명은 카카오 콩 100개,토끼 한 마리는 10개와 교환됐다.
이 상품은 카누를 이용해 마야 전 지역에 소통됐다.
마야 문명은 아직도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원인에 의해 10세기 즈음 갑자기 쇠락해 갔다.
그 후 14~16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아스텍 문명에서 카카오 콩이 다시 등장했다.
이곳에선 카카오나무를 '카카후아틀'이라 부르고 그 음료를 '소코아틀'이라 불렀다.
아스텍어로 '쓴 물'이라는 뜻을 지닌 '소코아틀'이라는 단어에서 나중에 영어의 초콜릿(chocolate)이나 불어의 쇼콜라(chocolat) 같은 단어들이 나왔을 것이다.
소코아틀을 만드는 법은 이렇다.
카카오 콩을 볶은 다음 맷돌로 갈아 물에 갠다.
여기에 옥수수 가루,용설란 꿀,피망,바닐라를 비롯한 향신료를 첨가한다. 이 용액을 거품이 일 때까지 몇 시간 동안 나무 도구로 친다.
아스텍 문명에서도 이것은 신성한 음식이었다.
아스텍 신화에 의하면 낙원의 정원지기인 날개 달린 뱀 케찰코아틀이 지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코코아나무를 주었다.
비의 신에게 부탁해 그 나무를 키우고,여인들을 시켜 열매를 갈아 음료를 만들게 했다.
이 음료는 무엇보다 황제와 귀족,혹은 전사의 음료였다.
목테수마 황제는 금으로 만든 잔으로 하루 50잔씩 마셨다고 한다.
아스텍 문명의 실상은 무력으로 정복한 많은 피지배 집단들의 연맹체에 가까웠다.
후일 유럽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쉽게 동맹 세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원한에 사무친 피지배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아스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는 주변 각지의 피정복민들이 바치는 카카오 콩이 매년 20~30t씩 들어왔다.
1504년 콜럼버스가 네 번째로 아메리카 대륙에 찾아왔을 때 온두라스 해안에서 인디오 추장으로부터 카카오 콩을 선물받았다.
최고의 물품을 선사한다는 의미였을 테지만 정작 콜럼버스는 그 가치를 전혀 몰랐다.
그로부터 약 15년 뒤인 1519년,코르테스가 목테수마 황제로부터 카카오 콩을 받았을 때에는 이제 그 의미를 감지했을 것이다.
2년 뒤,그가 테노치티틀란을 파괴했을 때 황궁의 지하 창고에는 2만개의 카카오 콩이 보관돼 있었다.
그는 이 중 일부를 유럽의 황제인 칼 5세에게 보내면서 "행군하는 병사가 한 잔만 마셔도 하루 종일 힘을 내게 하는 음료"라고 설명했다.
유럽에 들어온 카카오는 병사보다는 주로 수도원 수사들의 힘을 북돋는 역할을 했다.
다만 음료 제작법이 조금 수정돼 사탕수수 설탕,계피,후추,정향 등이 추가됐다.
핫초콜릿이라 부르게 될 이 음료는 더 달콤하고 향이 좋은 데다 칼로리가 더 높아졌을 것이다.
특히 금식 기도 기간 중에 이 음료를 마시면 기갈을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건 금식의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이 미묘한 문제에 대해 1569년 교황 피우스 5세는 이 음료의 복용은 금식을 깨는 것이 아니라는 공식 결정을 내렸다.
수도사들은 이것이 '영혼의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음료라고 주장했다.
영양학적 분석에 의하면 초콜릿 안에는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신경전달 물질이 들어 있다고 하니 16세기 수도사들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조만간 이 음료는 종교 영역에서 벗어나와 왕실 사람들과 귀족,부유한 부르주아들의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데에도 사용됐다. 마드리드에서는 핫초콜릿 가게들이 생겨났다.
곧 스페인 음료는 프랑스 왕실로 전파됐다.
루이 13세와 결혼한 안,루이 14세와 결혼한 마리-테레즈 모두 스페인 출신으로 핫초콜릿 '중독자'에 가까웠다.
루이 14세의 애첩 중 한 명인 멩트농 부인도 이 부드러운 음료의 맛을 배워 축제일에 베르사유궁에서 핫초콜릿을 마시도록 했다.
당시는 무엇이든 궁정에서 인기를 얻으면 곧 전국의 내로라하는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따라하는 것이 관례였다.
베르사유와 파리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 조만간 전 유럽의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기호품이 됐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상황 변화에 능통하게 적응해 전 유럽에 코코아를 판매하는 중심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초콜릿은 화려한 변신을 시작했다.
빈에서는 휘핑크림을 얹은 '비엔나 초콜릿'을 내놓았고,이탈리아에서는 사랑의 힘을 배가하는 음료로 애용됐다.
카사노바가 대표적인 예다.
스위스의 앙리 네슬레는 농축 우유와 초콜릿을 섞어 밀크 초콜릿의 대부가 됐다.
프랑스의 약제사 므니에는 쓴 약에 초콜릿을 입히는 법을 개발했다가 아예 초콜릿 정제(새알 초콜릿)를 개발했다.
수요가 늘자 카카오 생산도 세계 식민지 전체로 확산됐다.
멕시코 원산이었던 이 상품은 오늘날 가나(세계 1위 생산국) 나이지리아 카메룬 등 아프리카 지역과 남미의 브라질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신들의 음료는 어느덧 세계인의 기호품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