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선동···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조지 오웰 '동물농장'
당신이 평생 한 권의 책만을 읽어야겠다면 '이솝우화'를 권한다.

이제껏 수천년 동안 살아남은 명작이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어라.

앞으로 수천년 동안 살아남을 이야기다.

그 후에는 무엇을 읽어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우화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거니까.

상징마저 진부해진 요즘 감각으로 볼 때, 칠십 가까이 먹은 이 고령의 알레고리 소설은 어쩐지 표적이 빤하게 드러난 느낌이다.

게다가 공산주의 혁명 전후의 러시아 상황을 거의 일대일로 우의하고 있지 않은가.

문학예술과 선동구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한, 거칠고 도식적인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이 소설이 풍자하는 바가 단지 러시아의 근현대사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본성 자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니,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사회가 악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과정은 매번 이토록 도식적이라고, 악당들이 우리를 착취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놀라우리만치 진부하며 창의성이 없다고.

그런데도 왜 우리는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걸까? 바로 그게 문제다.

제아무리 얄팍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일지라도 십중팔구 먹혀들어 간다.

왜냐하면 반짇고리를 차고 다니며 우리의 성난 입술을 꿰매는 범인이 바로 우리 중에 있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게도,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양'인 것이다.

지배계층은 결코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피지배계급 중에서도 '양'이 꼭 필요하다.

저희들을 경호하는 한 줌의 '개'들보다 훨씬 필요하다.

의심과 분노가 터져 나오는 순간마다 주인님이 가르쳐준 노래를 합창하여 소음을 일으키는 '양'들이 있어야 비로소 지배의 권위는 단단하게 유지된다.

그럼 양을 싹 다 없애버리면 되겠네?

아니, 그럴 수 없다.

'양'이란 저기서 떼로 어슬렁대는 저능아인 동시에 실은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일부이기도 한 까닭이다.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말단 착취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 스스로가 아시아의 민중을 수탈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양'의 계급장을 떼어 던져버렸다.

이어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가, 현실과 괴리를 보이는 이상에 절망하여 그마저 떠났다.

이러한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체험을 통해 휴머니즘을 도외시하는 어떠한 이념도 결국은 삶을 지옥으로 내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 없는 이데올로기란 찬란한 수사로 직조해낸 가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동물농장의 행간마다 어찌할 수 없는 혐오와 분노의 감정이 배어 있는 이유는, 온갖 이념과 이상이 소용돌이치던 근대의 격동기를 살아오며 그 얄팍한 속임수에 마음을 너무 많이 다친 탓이리라.

이 걸출한 이야기가 고발하는 악의 구조는 시공을 초월하여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지금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고 칠십 여 년, 이 땅엔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대규모 자본이 윤리와 교육의 가치마저 집어삼키고, 귀족과 천민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졌다.

오늘의 지배계급은 지난날 일제가 수행했던 작업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뻔뻔하건 교활하건 간에 그들이 동원하는 모든 논리의 목적은 언제나 일정한 방향, 그러니까 '더 많은 착취'로 수렴된다.

도처에서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입을 맞춘 듯 시장논리와 경쟁을 떠들썩하게 옹호한다.

누구도 우대하지 말고, 누구도 억압하지 말고 다함께 무한경쟁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격려한다.

듣기엔 참 구수한 얘기다.

하지만 출발 라인이 다르게 설정된 후보들 간의 뜀박질 속도 평등이 도대체 어떻게 평등이란 말인가.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가장 진지한 통찰은 '왜곡된 평등'을 겨냥하고 있다.

우리는 동일한 심신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다.

매너농장의 여러 동물들처럼 각기 가진 달란트가 다르고, 배경과 환경과 목표와 성향이 다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났다. 프로크루스테스가 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평등을 논하려면, 개개인의 태생적이며 구조적인 차이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타인을 인식하는 행위는 있는 그대로의 차이를 납득하고 수용하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전체주의의 속임수는 동일성만을 강조하면서 그로 인해 터져 나오는 비명과 호소를 반동의 이기심으로 호도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힘이 센 자와 약한 자의 다툼이 있을 때 양쪽에 똑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행위야말로 불공평한 처사다.

눈을 가린 채 어디 쪽이 무거운지 천칭으로 가늠하는 법(法)의 여신은 그냥 어리석은 여자일 뿐이다.

장님 시늉이 당장엔 근사해 보일지 몰라도, 조금 지나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며 불멸의 헛소리를 읊게 된다.

게다가 그녀의 오른손에는 시퍼런 칼까지 들려 있지 않은가.

보고 듣는 권능을 포기한 교조주의자에게 무기마저 쥐어주면 거기에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런 식으로 법은 순한 '양'이 되어 돼지들의 만찬에 초대받고, 강자와 약자의 양분 구도는 돌이킬 수 없이 고착된다. 살 냄새가 풍기지 않는 모든 이상은 결국 피 냄새를 풍기게 된다.

동물들이 득실거려 어쩐지 즐겁고 귀엽고 뒤뚱뒤뚱 신이 날 것 같은 이야기에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건 그 때문이다.

끔찍한 소설이다.

박형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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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풍자한 20세기 최고의 정치우화

‘동물농장’ 줄거리

조지 오웰은 인도 벵골에서 식민지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또한 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령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왕실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나 식민체제와 제국주의 경찰로서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 후 5년 동안 런던과 파리를 떠돌며 하층민의 생활을 경험하고,이를 바탕으로 처녀작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발표한다.

도시의 빈민 문제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파헤친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는 평생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집필 활동을 했으며,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이데올로기와 사회를 비판하며 펜으로써 그에 맞서 싸웠다.

[동물농장]은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독재를 풍자한 20세기 최고의 정치 우화다.

어느 날 밤 늙은 돼지 메이저(마르크스)는 매너농장의 모든 동물들을 소집한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착취를 견디지 말 것을 연설하고, 농장의 동물들은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인간 주인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며 혁명의 기쁨을 누리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물들의 지도자격이었던 돼지들만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

돼지들 간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스탈린)이 독재 권력을 쥐게 되면서 그는 '개'들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우매한 '양'들을 이용해 선전을 시작한다.

동물들은 이전보다 더 심한 착취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혁명의 이념은 점차 타락해간다.

1945년 영국에서 발표된 이 작품은 그로부터 3년 만인 1948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것으로 그 이유는 반공소설이라는 오해 때문이었다.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조지 오웰 '동물농장'
원제: Animal Farm

저자: George Orwell(1903~1950)

발표: 1945년

분야: 영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동물농장 ·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옮긴이: 김기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7(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