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은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원리이다"

[논술 기출문제 풀이] 2010학년도 숙명여대 수시 2차 (인문계) 논술문제 풀이 (2)
대중 미디어에 묘사되는 석기시대인의 이미지는 우리 시대의 문화가 갖고 있는 생각과 욕망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대릴 한나 주연의 <동굴 곰 부족>도 이런 영화들 중 한 예이다.

이 영화는 7만년 전 인간의 생활을 보여준다. 대릴 한나가 연기하는 인물은 완전한 현대인,즉 호모사피엔스였다고 하나,영화에서 그녀는 아직 완전한 호모사피엔스가 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산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네안데르탈인이나 신네안데르탈인,아니면 그런 수준의 어떤 인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영상들을 보면 수렵 채집사회에는 대개 언어가 없다.

사람들은 쉰 목소리로 뭔가 중얼거리거나 애들 같은 몸동작으로 표현하는 원시언어를 말한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복합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그런 생각을 그런 꼴사나운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이들은 뇌에 큰 손상을 입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원전 7만년의 삶과 뇌 손상은 아무 관련도 없다.

뇌 손상은 실로 우리 시대의 것이다.

위계질서에 입각해 사회화된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을 지극히 초보적인 지성만을 갖고 보통 사리에 맞지 않는 사고를 하는 짐승 같은 사람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느낀다.

원시인들은 매력이라고는 없다(너저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그들은 굼뜨고 불확실하게 움직인다.

그들은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렵 채집자다.

이런 영상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즉 이들은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자 주인공 대릴 한나는 떠오르는 미래,더 아름답고,어쨌든 더 '인간적'인 미래이다.

이런 장면이 완전히 조작된 허구라는 사실임을 잊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는 관객들이 돈을 지불하고 극장에 왔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도록 쾌감을 주고,영화 속 원시인 모습을 관객의 구미에 맞게 조작하는 일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상은 현대인이 만든 허구적 창조물이다.

이것은 초기 인류에 대해 우리가 접하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영상이기에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고대 인류를 대개 그런 이미지로 볼 가능성이 높다.

구석기시대 인류에 대한 이런 묘사는 내가 보기에도 아주 공정하지 못하다.

거대한 동물을 사냥하던 인간들에게 잠시 경외감을 표하고 싶다.

나는 구석기시대를,마치 영화 <코난>에 나오는 근육질 전사 같은 사람들이 득실거린 것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주장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아주 솔직히 말해,고대인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는 많은 공백이 있다. 예컨대 우리는 그들이 복잡한 언어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모른다.

돌로 만든 물건들,뼈 조각들,동굴 벽화만 가지고는 그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들 역시 복잡한 언어를,아마도 수백 개 정도의 복잡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의 언어에서 나온 말 중 일부가 현대 영어에서 사용되고 있을 수도 있다.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우리는 구석기시대 인류가 무엇보다도 재치 있고,지적이며,용감하고,운동 능력과 예술적 감각을 함께 보유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오래 전에 죽은 우리 조상들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일까?

왜 현대인들은 동시대의 다른 인종,다른 종교,다른 문화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취급하고,무시하며,폄하하는 것처럼 고대인들을 왜곡하는가?

구석기시대의 인류가 우리에게 무슨 위협이 되어서 그러는 것인가? 왜 수만년 전에 존재했던 우리 조상들을 본질적으로 모두 바보였던 것처럼 묘사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현대사회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사회는 현재를 인류의 황금시대로,미래를 미래의 황금시대로 보도록 사람들을 부추긴다.

우리는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고 믿도록 사회화되어 있다.



배제와 차별은 같은 사태의 다른 표현이다.

제3항의 배제 내지 희생자 만들기가 없으면 차별도 없다.

배제되는 것은 언제나 차별되는 것이다.

사회관계는 부단히 배제의 메커니즘을 발동시켜 나가지 않으면 자기보존이 불가능하다.

질서의 재생산과 배제의 재생산은 일체인 것이다.

가령 배제해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은 환상적으로라도 배제의 대상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간 안에 자리잡은 폭력은 멋지게 수미일관된다.

인간은 환상 속에서조차 질서의 적을,배제해야 할 타자를 산출해 나간다고 하는 기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인류는 예부터 끝도 없이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을 계속해 왔다.

서구에서는 유태인만이 차별되고 배제되어 온 것이 아니다.

유태인 이외에 집시도 배제되어 왔으며,근대에서는 아프리카의 흑인,중근동의 아랍인도 강한 차별을 받아 왔다.

소수 민족도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었으며,지금도 그렇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수 민족의 해방투쟁이 전 세계의 도처에서 뿌리 깊게 수행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약하기 때문에 배제되고 차별되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강한 집단이 배제함을 통해서 자기의 집단적 동일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배제의 논리는 특정 집단의 동일성 형성의 논리이며,동일성의 원리는 타자를 배제하고 희생자를 차별하는 논리 그 자체이다.



코카콜라 병을 든 부시맨.이 영화 주인공은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의 정반대 쪽에 서 있다.

이쪽이 과잉과 초과의 지점이라면 저쪽은 결여와 부재의 지점이다. 한쪽은 보통 사람이 가진 것 이상을 소유하고 다른 쪽은 아무것도 없다.

과학과 기술이 없고 도시와 역사가 없다.

레인맨이나 스파이더맨과 비교해도 결여의 목록은 계속 길어진다.

옷과 신발이 없고 문자가 없고 위생적인 휴지나 음료수를 모른다.

부시맨은 수천년의 거리를 지나 현대 문명세계로 걸어 나온 신석기시대의 인간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끝날 때 관객의 웃음과 눈물 속에서 부시맨과 현대인이 혼동된다.

부시맨은 '우리' 마음 속에 살고 있는 타자로서 경험된다.

원시인과 현대인 사이의 초역사적 동일성과 무거리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연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자가 없는 사회에서도 인간은 현대인만큼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생각한다고.

원시인은 아이언맨 못지 않게 합리적이다.

원시인의 야생적 사유는 여전히 현대인의 무의식 안에,현대인의 생활과 행동 안에 존속한다.

그러므로 희극적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부시맨 같은 원시인이 아니다. 그것은 원시인을 동물 취급하던 백인이며,백인이 고수하려 했던 역사관이다.

신석기시대와 현대 사이에 있다고 간주되어 온 연속적인 진보의 거리는 허상이다.

그 허상의 배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시간적 변화와 무관하게 동일하게 유지되는 공시적(synchronic) 구조이거나 어떤 상이한 구조들 간의 불연속적 관계이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인이 오리엔트 곧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그들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한 개념이다.

동양은 단지 유럽에 인접되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유럽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광대하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토지이고,유럽의 문명과 언어의 연원이었으며,유럽 문화의 호적수였고 또 유럽인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반복되어 나타나는 타자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나아가 동양은 유럽,곧 서양이 스스로를 동양과 대조가 되는 이미지,관념,성격,경험을 갖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은 단순히 상상 속의 존재에 그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럽의 실질적인 문명과 문화의 구성 부분을 형성했다. 곧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문화적으로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갖는 이야기로서 표현하고 표상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제도,어휘,학문,이미지,주의 · 주장,나아가 식민지의 관료제도나 식민지적 스타일로서 구성된다.

<문제>

3.제시문 <나>의 논지를 바탕으로 제시문 <라>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시오.(400±40자)

4.제시문 <나>와 <다>를 바탕으로 제시문 <가>에서 문제된 현상에 대하여 논술하시오.(800±80자)




원시시대는 덜 진화한 시대이므로 나쁜 시대다?

◎ 제시문 분석

이 제시문에서 만약 맨 먼저 진보 담론의 허구성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 뒤의 일은 생각보다 수습이 쉬워진다.

제시문의 말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지금 우리의 세기가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epoque · 좋은 시대)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굳은 믿음,그 믿음을 시간의 진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잉태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기만 하면 문제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이 술술 풀리게 된다.

진보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이 믿음을 생산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은 과학과 기술의 지평 위에 서 있다.

이전의 성과를 항상 초과하면서 나아가는 과학과 기술의 진화 형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보다 현재가,현재보다 미래가 더 훌륭하고 황홀한 것이라는 허구적 믿음까지 더불어 진화시킨다.

그 결과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이 오직 과학과 기술의 기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게 되어서,과학과 기술이 덜 발달한 시대는 항상 더 발달한 시대보다 못한 시대로 규정된다.

따라서 가장 좋은 시대는 언제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이며,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도래할 시대에 비해서는 덜 좋은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조망하는 기준이 현재 중심의 과학-기술로부터 이탈하자마자 진보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허망한 것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어떤 것이 시대적으로 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국면들은 무수히 많은 것이다. 예컨대 수 세기 전의 인간이 현대 과학 기술의 엄청난 속도를 그의 시대 속도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빈둥거림과 한가로움이 삶의 속도적 형식인 그의 시대가 훨씬 좋은 시대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진보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학과 기술에 근거한 지속적인 진보는 항상 더 좋은 것이라는 인간의 믿음은,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만들어낸 허구이며 환상이다.

이 허구와 환상으로부터 원시시대에 대한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담론이 생산된다.

원시시대는 과학과 기술이 지금보다 덜 발달했거나 아예 발달하지 못한 시대이므로 말할 것도 없이 나쁜 시대다.

그렇게 나쁜 시대에 사는 인류는 인간보다 동물에 더 가깝다.

동물에 가까운 원시인들은 당연히 언어도 갖지 못한 멍청이이며 문화,예술,생활 습속 등 삶의 전 분야에서 덜 떨어진 인간들이다.

이렇게 원시인들을 허구적으로 창조해냄으로써 인간은 지금 우리 시대의 과학 기술이 매우 좋은 것이며 과학 기술 덕분에 이렇게까지 발달한 시대 역시 가장 좋은 시대이며 이렇게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좋은(행복한) 인간들이라는 믿음을 굳건하게 가질 수 있다.

이 굳건한 믿음은 인간을 자기동일성에 붙들어맴으로써 덜 진보한 시대,덜 진보한 인간,덜 진보한 인종,덜 진보한 지역 등을 배제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제 비로소 논술자는 진보 담론의 허구성에 대한 이해가 배제와 차별의 담론에 대한 이해로 귀결됨으로써 우리의 뒷일을 쉽게 수습할 수 있도록 한다는 서두의 말뜻을 이해하게 된다.



제시문의 대강은 이미 위의 글에서 논의한 바다.

차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은 사회관계의 결속력을 다지는 내/외적 원리라는 것이 핵심인 바,그것은 집단적 자기 보존성의 형태로 외화된다.

쉽게 말해서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해야 나-우리가 동일한 집단으로 결속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의 원리는 사회적인 악을 생산하는 방식과 의미상 동일하다.

예컨대 국제 관계에서 서구 중심 또는 기독교 중심의 자기동일적인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서 부재하는 위험을 상존하는 위험으로 치환하며 악(의 무리)을 생산하는 방식이 곧 배제와 차별의 원리다.

지능이 다소 낮은 것으로 알려진 어떤 백인이 언급한 바와 같이 '악의 축(axis of evil)'이 설정되는 순간 그 반대편 축은 '선의 축(axis of good)'으로 자동 결정되며,그것이 언급되는(tell good from bad) 순간 선의 축의 결집을 자동 요청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시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차별과 배제의 원리가 자기 집단의 동일성을 강화하기 위한 오래된 방법으로 작동해 왔으며,그 결과 약한 집단은 광범위하게 차별받고 배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제시문은 논술자에게 제시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대답일 수 있다.

제시문 <가>에서 우리는 진보에 대한 인간의 허구적 믿음을 논의했는데,이 허구적 믿음이 정말 '허구적인' 믿음이라는 사실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다> 제시문이다.

영화 <부시맨>은 원시인의 희극적 삶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오히려 백인 혹은 백인적 역사관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역사관은 <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과 기술의 진보적 지평 위에만 오로지 기거하고 있다.

원시인은 덜 떨어진 멍청이라고 비웃으며 서 있는 그들의 지평 위 저 멀리서 부시맨이 서서히 걸어오고 있다.

그들과 같은 지평에서 그들에게 접근해오고 있는 부시맨의 손에는 코카콜라 병이 들려 있다. 코카콜라 병은 백인들의 것인데 부시맨이 들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코카콜라 병이 백인들의 시대 혹은 지금 우리의 시대의 과학 기술에 근거한 문명 일반을 상징하는 기호일 수 있다면,코카콜라 병을 든 부시맨은,과학 기술을 손에 쥔 인간이 과학 기술을 손에 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부시맨과 별반 다를 것 없는(혹은 부시맨의 속성을 역사적으로 항상 가져왔던) 존재라는 점을 보여주는 메타포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시맨에서 지금 우리에까지 이르는 거리는 없거나(무거리성) 거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진보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여전히 허구이며 환상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일반적 정의와 진술로 이루어진 이 제시문으로부터 논술자는 다른 제시문들에 근거한 사유를 전개해야 한다.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백인적 세계가 비백인적 세계,그중에서도 동양적 세계를 타자로 대접하는 욕망의 방식이며 그러한 욕망을 말로 나타내고 기록하는 방식이다. 다른 제시문들에 근거해서 생각해볼 때,그들의 이러한 욕망과 욕망을 기록하는 방식은 당연히 배제와 차별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철저한 타자로서의 동양을 그들의 욕망에 따라 허구적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서양은 자기동일적인 우월성을 확보해 왔다.

앞선 제시문 분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타자를 맞세우는 것은 자기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결속력을 다지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효과적 방법이 필연적으로 배제와 차별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이 제시문에서 논술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 논제 분석

<논제3>

제시문 <라> 분석에서 대강의 진술은 이루어졌다.

<나>의 논지는 주지하다시피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이 사회적 관계 내에 항상 상존해 왔고 그것은 타자를 악의 성격으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집단의 정체성이 선함을 내적으로 확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리엔탈리즘의 내적 원리에 다름 아니다.

동양을 타자로 맞세움으로써 서양은 자기 집단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동양을 철저히 배제시켜 왔다.

논술자는 이 점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의 차별과 배제의 내적 원리가 자연스럽게 비판되도록 논술해 주면 될 것이다.

<논제4>

제시문 <가>의 문제 상황은,진보에 대한 인간의 허구적 믿음이 지금 우리 시대를 오로지 가장 좋은 시대로 규정하게 함으로써 역사적인 다른 시대를 타자화하고 좋지 않은 시대로 이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과학과 기술의 지평 위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지평 위에서 인간은 지금 우리 시대를 가장 좋은 시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모든 좋은 것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일 수 없으며 과학 기술에 근거한 타자의 설정은 그 자체 허구적이고 환상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 기술적 현재에 근거하여 설정된 비과학적 타자(과거 시대, 과거 역사) 역시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것일 뿐이다.

이는 부시맨의 사례를 통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 왔어도 인간은 부시맨적 속성을 역사적으로 줄곧 가져왔으며 따라서 부시맨이 덜 떨어진 존재라거나 현재의 인간이 원시의 인간보다 더 좋은 존재라는 믿음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동일성에 대한 확인과 확보의 목적으로 수행되는 이러한 방식의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은 허구이므로 우리는 허구를 '배제'하는 사유를 전개함으로써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을 무력화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리영 S · 논술 선임 연구원 furyfury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