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엽 <서울대 미학과 교수>
[인문학 산책] '트라우마' 환자들이 바흐를 듣는 까닭은?
"어렸을 때 나는 고통받는 마음을 제 연주로 치유해 주고 싶었죠. 그게 제 임무 같았어요. 음악의 아름다움을 삶의 조화에 연결시키려 했죠.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바흐의 '샤콘느'를 시스틴 성당에서 연주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질 거라고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이었던 예후디 메뉴인이 남긴 말이다.

메뉴인 같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사상가들 중에도 예술이 우리의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곧잘 있다.

먼저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자.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대왕' 같은 비극을 보면 카타르시스를 얻는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주장에 더하여 별반의 부연 설명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카타르시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 분분한 의견들 중에서 수장 격은 카타르시스를 치유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은 카타르시스가 의학 용어에서 유래했다는 점에 착안한다.

카타르시스는 의학적 용어로는 '소화기관에 이상이 생겨 막혔을 때 관장시켜 노폐물을 배설시켜 주는 치료'를 의미한다.

물리적 음식물만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 감정도 가슴 속에 응어리지면 한이 되어 병을 불러일으킨다.

응어리진 한은 풀어 주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슬픔과 고통에 빠진 비극의 주인공을 바라보며 펑펑 울다 보면,관람객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도 씻겨 내려가지 않을까.

그리하여 마음속이 정화되지 않을까.

실제로 비극을 보고 흘리는 눈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호르몬이 많이 배출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양파를 까면서 흘리는 눈물에는 상대적으로 그러한 호르몬이 적다.

비극은 훌륭한 스트레스 치료제이자 마음의 정화제인 것이다.

20세기 들어 마음의 치유를 예술과 연관시키는 데 기여한 사상가는 프로이트이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의 무의식 세계를 개척한 정신분석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 각자의 무의식 속에는 현실에서 좌절된 또는 억압된 욕망이 쌓여 있다.

우리는 여러 욕망을 품고 그 욕망을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가 품은 욕망의 대부분은 성취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잔뜩 부풀어 올랐던 욕망은 비눗방울처럼 허망하게 꺼져 버리는가.

그렇지 않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사라지지만 무의식의 창고에 쌓인다.

그런데 이 창고는 무한정이 아니다.

쌓이다 보면 창고에 금이 가고 틈이 난다.

금과 틈 사이로 무의식 속 욕망이 비집고 나와 우리의 의식과 현실을 어지럽힌다.

자칫 잘못하면 무의식이 의식을 집어삼켜 버린다.

때로는 까닭 모르고 정체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과 강박증에 시달린다.

불안과 두려움은 그 까닭을 알고 정체를 알아야 치유의 단계가 시작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무의식은 우회로를 통해 까닭과 정체를 우리에게 알린다.

대표적 우회로는 꿈과 예술이다.

프로이트와 그의 후학들은 정신 질환자들의 꿈과 그림을 분석하며 그 환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억압된 욕망을 밝혀 내려고 애썼다.

정신분석학에서 예술은 마음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치료제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병을 밝히는 실마리는 될 수 있다.

최근의 정신과 전문의들에게서도 아리스토텔레스나 프로이트적 생각의 일단을 읽어 낼 수 있다.

「트라우마」라는 책을 쓴 정신과 전문의 주디스 허먼은 성폭력,전쟁폭력,가정폭력 등의 큰 충격을 겪은 후에 나타나는 정신적 장애인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기억'과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기억이란 자신에게 너무도 큰 정신적 상처를 입혀 혼란스럽게 떠오르는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그리고 애도란 그렇게 파악된 사건의 희생자이자 피해자인 자신을 위해 슬퍼하는 시간을 갖는 일이다.

허먼은 우리가 큰 충격적 사건 후에 기억과 애도의 시간을 거쳐야 일상으로 복귀해 정상적인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기억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림 그리기가 도움이 될 수 있고,애도의 시간을 누리기 위해서는 함께 슬퍼하고 위로해 줄 비극이나 음악이 필요할 수 있다.

한평생을 육신의 아픔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한 생애를 정신의 상처 없이 견딜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쁘랴.

그렇지 못한 것이 인간의 길이다.

산다는 것은 육신의 아픔 및 정신의 상처와 함께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 이후의 복락을 그토록 갈구하는 것이 아닐지.

슬픔 앞에서 이를 악물고 견디기보다는 펑펑 울고, 욕망 앞에서 주먹 쥐고 참기보다는 훌훌 털어 버리는 것이 인간적임을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