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버리고 서구에서 배우자?
정작 그 속내가 어떠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언행으로만 판단한다면,세대가 젊어질수록 요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대한 열망이 희미해져 가는 듯하다.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는 세계시민으로서 자국에 불필요하게 집착하지 않고 소위 '쿨'해지는 것인지,아니면 진지한 열정이 없어 그냥 '심드렁'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타국 이민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국력 감소 우려가 진지하게 거론된 시점이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상태에서 새삼스럽게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쩌면 최첨단을 걸어야 하는 현대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이 결여된 구식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나은 '우리'나라에 대한 열망은 지금껏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내걸게 한 동기였다.
비록 자주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투사가 아니라고 하여도,몸 담은 분야가 경제든 학문이든 군사든간에 많은 이들은 더 나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자신이 바라는 국가에 대한 원망(願望)은 개인적 야망과 함께 맞물려,많은 이들로 하여금 전전긍긍 밤을 지새우게 하였고 주린 배에도 열에 달뜬 눈을 한 그들을 울게 하기도 웃게 하기도 하였다.
모국의 위대한 미래를 위해 대국굴기(大國屈起)를 꿈꾸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았고 그들이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밀어 올린 국가 또한 여럿이었다.
그중 이웃나라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일본은 대국굴기의 꿈을 무척이나 효율적으로 달성한 국가이다.
근 · 현대에 걸친 일본의 족적과 현재를 이해하자면 메이지 유신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한다.
일본은 본시 '난학(欄學)'이라는 네덜란드 학문이 형성될 만큼 외부 세계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여타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막부 역시 쇄국정책을 펼친다.
그러한 와중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우라가에 대항하여 강제 조약을 체결하자 일본의 봉건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전통적 세계관을 붕괴시킨 개항 사건이 발생하자,일본은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대대적 탐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 과감한 선택을 하였다.
아시아 국가이기를 거부하고 서양이 되고자 하면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흡수하였던 것이다.
서구적 근대화를 지향하는 '메이지 유신'의 기조를 정립한 이래 일본은 국가 발전을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다.
사회 내부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개혁 정책을 거듭 실시하고 군사와 경제의 발전을 추구한 결과,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개방한 지 22년 뒤에 일본은 한국의 문호를 개방한다.
하지만 앞에서 일본이 '효율적'으로 국가를 성장시켰다고 말했지만 '성공적'이라는 표현은 굳이 쓰지 않은 이유는 그 이후의 행보에 대한 평가 때문이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국가의 번영을 추구하는 군국주의 전략을 취한다.
계속된 대외침략으로 국가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타국으로부터 획득한 전쟁배상금으로 자국의 운영을 활발하게 꾸렸다.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는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국가전략이 마련된다.
환태평양 지역에 걸친 제국을 건설하고자 한 일본은 무력 제패를 꿈꾸던 다른 주축국들과 결탁하여 세계대전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활을 건 국가 전략은 실패하고 만다.
1945년 9월2일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아래 항복 문서에 서명하던 일본은 맥아더 장군에게서 페리 제독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역시나 '효율적'인 나라였다.
패전 이후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에서 20년 만에 경제를 부흥시키고 한동안 연 10%를 넘는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그 이면에는 6 · 25 전쟁이라는 우리나라의 아픔이 일본에는 군수품 생산공장을 가동하게 된 역설적 상황과 함께,냉전 구도 하에서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이라는 우방의 혜택이 있었다.
하지만 조건의 유리함을 따지더라도 일본은 분명 괄목할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룩해냈다.
이러한 단기간의 국가 재건이 가능했던 이유는 메이지 유신 이래 100여년 넘게 발전해온 일본의 국가전략이 변함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일본 사회의 하드웨어는 사라졌지만 정신적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은 전후 일본경제가 빠르게 발전하게 된 원동력으로 다시금 작용하면서 메이지 유신 100주년이 되는 1968년,일본은 미국과 소련에 이은 세계 3대 경제강국으로 자리를 잡는다.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짜와의 짧은 간격을 생각한다면 대국을 향해 나아간 일본의 행보는 정말이지 효율적이고 놀라운 데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근 · 현대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라고 평가되는 이가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지성이자 근대화의 선구자,계몽사상가이며 게이오 대학을 창립한 교육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원래 난학을 공부하였으나 세상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20대에 영어를 새로 배운다.
그리고 1860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던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1861년에는 막부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약 1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이런 경험으로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작가로 성공하였고,저작물 수입을 바탕으로 게이오 대학을 창설하였다.
정부 각료로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핵심 정치가들과 교류하면서 당대 여론의 향방을 결정한 그는 일본 근대 지식인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또한 김옥균,박영효 등 한국의 개혁파들조차도 그를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당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동양의 혁명가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되기를 꿈꿨던 춘원 이광수는 그의 묘지를 다녀와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태서의 신문화로써 침체한 구사상,구제도를 대(代)해야 할 줄을 확신하고 단연히 지(志)를 결(決)했으니 천(天)이 일본을 복(福)하려 하시매 여사(如斯)한 위인"이라는 것이다.
어색하지 않은 한글로 풀어보면,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여 내린 위대한 인물이라는 평가이다.
하지만 이광수는 친일파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하니 그렇다 치고,개화파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이 품고 있는 독소에 거부감을 강하게 느꼈어야 정상이다.
메이지 유신의 골자인 서구적 근대화는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에 입각하는데,이 탈아론은 '아시아 멸시관'이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3월16일 '파괴는 건축의 시작이다'라는 제목으로 시사신보에 실린 탈아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일본은 오늘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벗어나 우리의 운명을 서구의 문명 국가와 함께 하는 것이 낫다. 중국 및 조선 역시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필요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대우하면 된다. 나쁜 친구를 소중히 하는 사람은 그 친구의 나쁜 평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친구(惡友)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한국과 중국에서 무수한 비판을 받는다.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을 짓밟고 파탄으로 몰아넣은 우리 민족 전체의 적'(백기완,<항일민족론>)이라는 평판은 대만에 비하면 오히려 낫다.
대만에서는 '가장 증오할 민족의 적'으로 불린다.
그리고 서양만이 문명의 총화라고 여기고 동양에게 결별을 고했던 후쿠자와 '탈아입구(脫亞入歐)' 사상 덕분에 일본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의 한쪽이 되지도 못하였고 아시아 국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자국민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세계 다른 국가와 여타 조직에 속한 이들의 행복에는 무관심한 일본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나라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문명론 개략(1875)'을 읽으면서 이율배반적인 그의 사상을 편린이나마 맛보도록 하자.
☞ 기출 제시문 (서울대학교 2008학년도 인문계 모의논술)
지금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 모조리 유럽을 목표로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또 모름지기 그쪽의 문명을 채택함에 우리의 인심과 풍속을 살펴 그 국체(國體)에 따라 정치를 준수하고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 취사선택해야 적절한 조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명에는 밖으로 드러나는 사물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의 구별이 있는데,밖으로 드러나는 문명은 취하기가 쉽고,그 안에 담겨 있는 문명은 찾아내기 어렵다.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는 어려운 쪽을 먼저 하고 쉬운 쪽을 나중에 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1875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정작 그 속내가 어떠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언행으로만 판단한다면,세대가 젊어질수록 요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대한 열망이 희미해져 가는 듯하다.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는 세계시민으로서 자국에 불필요하게 집착하지 않고 소위 '쿨'해지는 것인지,아니면 진지한 열정이 없어 그냥 '심드렁'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타국 이민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국력 감소 우려가 진지하게 거론된 시점이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상태에서 새삼스럽게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쩌면 최첨단을 걸어야 하는 현대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이 결여된 구식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나은 '우리'나라에 대한 열망은 지금껏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내걸게 한 동기였다.
비록 자주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투사가 아니라고 하여도,몸 담은 분야가 경제든 학문이든 군사든간에 많은 이들은 더 나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자신이 바라는 국가에 대한 원망(願望)은 개인적 야망과 함께 맞물려,많은 이들로 하여금 전전긍긍 밤을 지새우게 하였고 주린 배에도 열에 달뜬 눈을 한 그들을 울게 하기도 웃게 하기도 하였다.
모국의 위대한 미래를 위해 대국굴기(大國屈起)를 꿈꾸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았고 그들이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밀어 올린 국가 또한 여럿이었다.
그중 이웃나라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일본은 대국굴기의 꿈을 무척이나 효율적으로 달성한 국가이다.
근 · 현대에 걸친 일본의 족적과 현재를 이해하자면 메이지 유신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한다.
일본은 본시 '난학(欄學)'이라는 네덜란드 학문이 형성될 만큼 외부 세계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여타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막부 역시 쇄국정책을 펼친다.
그러한 와중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우라가에 대항하여 강제 조약을 체결하자 일본의 봉건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전통적 세계관을 붕괴시킨 개항 사건이 발생하자,일본은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대대적 탐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 과감한 선택을 하였다.
아시아 국가이기를 거부하고 서양이 되고자 하면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흡수하였던 것이다.
서구적 근대화를 지향하는 '메이지 유신'의 기조를 정립한 이래 일본은 국가 발전을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다.
사회 내부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개혁 정책을 거듭 실시하고 군사와 경제의 발전을 추구한 결과,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개방한 지 22년 뒤에 일본은 한국의 문호를 개방한다.
하지만 앞에서 일본이 '효율적'으로 국가를 성장시켰다고 말했지만 '성공적'이라는 표현은 굳이 쓰지 않은 이유는 그 이후의 행보에 대한 평가 때문이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국가의 번영을 추구하는 군국주의 전략을 취한다.
계속된 대외침략으로 국가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타국으로부터 획득한 전쟁배상금으로 자국의 운영을 활발하게 꾸렸다.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는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국가전략이 마련된다.
환태평양 지역에 걸친 제국을 건설하고자 한 일본은 무력 제패를 꿈꾸던 다른 주축국들과 결탁하여 세계대전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활을 건 국가 전략은 실패하고 만다.
1945년 9월2일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아래 항복 문서에 서명하던 일본은 맥아더 장군에게서 페리 제독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역시나 '효율적'인 나라였다.
패전 이후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에서 20년 만에 경제를 부흥시키고 한동안 연 10%를 넘는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그 이면에는 6 · 25 전쟁이라는 우리나라의 아픔이 일본에는 군수품 생산공장을 가동하게 된 역설적 상황과 함께,냉전 구도 하에서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이라는 우방의 혜택이 있었다.
하지만 조건의 유리함을 따지더라도 일본은 분명 괄목할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룩해냈다.
이러한 단기간의 국가 재건이 가능했던 이유는 메이지 유신 이래 100여년 넘게 발전해온 일본의 국가전략이 변함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일본 사회의 하드웨어는 사라졌지만 정신적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은 전후 일본경제가 빠르게 발전하게 된 원동력으로 다시금 작용하면서 메이지 유신 100주년이 되는 1968년,일본은 미국과 소련에 이은 세계 3대 경제강국으로 자리를 잡는다.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짜와의 짧은 간격을 생각한다면 대국을 향해 나아간 일본의 행보는 정말이지 효율적이고 놀라운 데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근 · 현대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라고 평가되는 이가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지성이자 근대화의 선구자,계몽사상가이며 게이오 대학을 창립한 교육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원래 난학을 공부하였으나 세상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20대에 영어를 새로 배운다.
그리고 1860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던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1861년에는 막부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약 1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이런 경험으로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작가로 성공하였고,저작물 수입을 바탕으로 게이오 대학을 창설하였다.
정부 각료로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핵심 정치가들과 교류하면서 당대 여론의 향방을 결정한 그는 일본 근대 지식인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또한 김옥균,박영효 등 한국의 개혁파들조차도 그를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당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동양의 혁명가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되기를 꿈꿨던 춘원 이광수는 그의 묘지를 다녀와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태서의 신문화로써 침체한 구사상,구제도를 대(代)해야 할 줄을 확신하고 단연히 지(志)를 결(決)했으니 천(天)이 일본을 복(福)하려 하시매 여사(如斯)한 위인"이라는 것이다.
어색하지 않은 한글로 풀어보면,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여 내린 위대한 인물이라는 평가이다.
하지만 이광수는 친일파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하니 그렇다 치고,개화파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이 품고 있는 독소에 거부감을 강하게 느꼈어야 정상이다.
메이지 유신의 골자인 서구적 근대화는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에 입각하는데,이 탈아론은 '아시아 멸시관'이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3월16일 '파괴는 건축의 시작이다'라는 제목으로 시사신보에 실린 탈아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일본은 오늘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벗어나 우리의 운명을 서구의 문명 국가와 함께 하는 것이 낫다. 중국 및 조선 역시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필요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대우하면 된다. 나쁜 친구를 소중히 하는 사람은 그 친구의 나쁜 평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친구(惡友)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한국과 중국에서 무수한 비판을 받는다.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을 짓밟고 파탄으로 몰아넣은 우리 민족 전체의 적'(백기완,<항일민족론>)이라는 평판은 대만에 비하면 오히려 낫다.
대만에서는 '가장 증오할 민족의 적'으로 불린다.
그리고 서양만이 문명의 총화라고 여기고 동양에게 결별을 고했던 후쿠자와 '탈아입구(脫亞入歐)' 사상 덕분에 일본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의 한쪽이 되지도 못하였고 아시아 국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자국민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세계 다른 국가와 여타 조직에 속한 이들의 행복에는 무관심한 일본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나라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문명론 개략(1875)'을 읽으면서 이율배반적인 그의 사상을 편린이나마 맛보도록 하자.
☞ 기출 제시문 (서울대학교 2008학년도 인문계 모의논술)
지금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 모조리 유럽을 목표로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또 모름지기 그쪽의 문명을 채택함에 우리의 인심과 풍속을 살펴 그 국체(國體)에 따라 정치를 준수하고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 취사선택해야 적절한 조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명에는 밖으로 드러나는 사물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의 구별이 있는데,밖으로 드러나는 문명은 취하기가 쉽고,그 안에 담겨 있는 문명은 찾아내기 어렵다.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는 어려운 쪽을 먼저 하고 쉬운 쪽을 나중에 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1875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