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지배의 메커니즘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38. 성석제「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 정치 권력의 실천 방식

정치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경찰,군대,관공서와 같이 공적 권력을 물리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억압적 국가기구이며,다른 하나는 교육이나 종교,정치,언론과 같이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은밀히 주입시켜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권위에 복종하게 하는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다.

얼마 전 교육의 문제를 논의할 때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이러한 구분은 후기 맑시스트로 알려진 루이 알튀세르의 개념이다.

전통적인 권력의 행사 방식은 주로 전자에 기댄 경우가 많았다.

경찰이나 군대와 같은 물리적 공권력을 행사하면 손쉽게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배 수단은 구성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른다.

한시적일뿐더러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여지도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는 구성원들의 신념을 일정하게 조작하여 자발적으로 지배에 순응하게 한다는 점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지배의 방식이라 할 것이다.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권력 행사방식은 전자에 기댄 경우가 많았다.

이데올로기를 전혀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정치권력은 경찰과 군대,정보기관 등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었던 것이다.

1990년대 민주화가 진척되고 국민의 의식수준과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과거의 물리적 공권력은 차츰 약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입장에 따라서는 여전히 물리적 강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누그러진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의 방식 역시 과거의 억압적인 국가기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국가기구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언론과 교육,문화와 경제 정책 등을 활용하여 구성원을 자발적으로 길들이는 것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뿐더러 동시에 효율적인 지배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조직과 관리를 통해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그것이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메커니즘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 이데올로기의 지배

성석제의 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물리적인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나아가는 과정을 풍자적인 알레고리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1차적이고 표면적인 내용은 어느 중소 도시의 조직폭력배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내용일 뿐 작품에서 전달하려는 이야기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일단 이 소설의 인물들은 한곁같이 이름이 없다.

단지 마사오,청카바,청바지,레미콘 운전사와 같은 별명이 호칭의 전부이다.

호칭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고정적으로 누군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이는 결국 이 이야기의 내용이 리얼리티를 지닌 실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황에 빗대는 우화적 형식임을 증명한다.

'개미와 배짱이'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처럼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든,어떤 사회이든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작품에서 풍자하려는 내용은 다름 아닌 인간의 권력에 관한 것이다.

일단 작품의 주요 내용이 조직폭력배가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에게 위협적일 수 있는 힘을 제거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서사적인 구성이 다른 작품들과 달리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전체적인 시간은 주인공이 차를 몰고 가다가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4.5초'라는 찰나이다.

그 시간 동안 주인공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장면을 영화의 몽타주 장면처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작품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주인공 사내는 어린 시절 우는 아이도 그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그친다는 '마사오'라는 읍내의 깡패를 우상으로 여기며 살았었다.

그는 커서 마사오처럼 되고 싶었고 그런 까닭에 건달 같은 행동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퇴학까지 당한다.

이후 존경하던 마사오가 경찰에 갑자기 검거되자 그는 소읍을 떠나 'ㄷ시'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건달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칼을 잘 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는 자기보다 사내답다는 자기 친구였던 레미콘 운전사를 아무도 몰래 해치우고 고향에 돌아와 술집을 낸다.

그리고 자기와 대적할 만한 이들을 차례차례 불러내 정성껏 대접하게 해서 적당히 안심을 시킨 다음 자기에게 굴복하게 만든다.

이를 테면 청카바를 술집으로 유인해서 흠씬 두들긴 뒤에 자기 밑에서 일을 보면 더 이상 맞지 않게 해주고,여자도 취직시켜주겠다고 하는 방식이다.

소위 무협영화라든지 르와르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정면승부는 없고 비겁한 술수만으로 사내는 상대방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이 때 상대를 굴복시킨 것은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본을 활용한 설득이었고,그것은 상대의 자발적 복종까지 이끌어내는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 신화와 전설,소문이 지배하는 현실

아래 인용문을 보면서 주인공 사내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유지하는지 더욱 자세히 확인해보자.

그때 그는 청카바를 조금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를 끌고 나가는 힘의 반은 소문이다.

소문이 무슨 상관인가,증거와 사실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그건 다른,좋은 세상 사람들 이야기다.

청카바는 소문의 진원지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도 그의 입에서는 그럴듯한 전설과 신화로 탈바꿈한다.

전설과 신화로 무장하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

"그 친구,왜 죽은 줄 알아,레미콘?"

청카바는 백길 낭떠러지에서 레미콘 트럭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내 앞에서 까불다가 그렇게 된 거야."

청카바는 잠자코 있었다.

"세상에는 우연한 사고라는 게 없어.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더라도,떨어지는 이유가 있는 거야."(중략)

마사오를 추락시키는 일은 그에게는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일이었다.

해야할 일이다.

그는 마사오를 정리하는 것으로 한꺼번에 마무리지으려고 했다.

이제 마사오의 시대가 간다.

주먹과 박치기와 발길질로 술값이나 우려내는 건달들의 시대는 가고 있다.

사업과 조직,관리의 시대가 온다.

-성석제,「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사내는 이 세계를 끌고 나가는 힘이 '사실'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실제 누가 더 물리적인 힘이 세고 누가 더 강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신화와 전설에 가까운지에 따라 권력이 형성된다는 점을 사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청카바에게 약간의 겁을 준다.

그러면 청카바는 온갖 소문으로 자신을 신화화시킬 것이고 그것은 지배를 정당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기존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을 마지막 과제로 삼게 된다.

기존 신화를 무너뜨려야만 자신을 향한 더욱 강력한 신화와 전설이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자기가 따랐던 마사오를 불러내고 결국 비겁한 방식으로 그의 팔 하나를 도끼로 자르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사내의 신화창조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오히려 비겁하다는 추문이 떠돌았고,추문의 실체를 확인하려다 우연히 외팔이 마사오를 마주하고서는 자동차를 몰고 전속력으로 도주하다가 다리 위에서 미끄러지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물리적인 억압과 지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경찰력이 동원되는 것은 흔치 않게 관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지배는 단지 물리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접하는 온갖 미디어와 교육,그리고 종교와 문화,경제정책 속에도 쉽게 눈치 채지 못한 지배의 메커니즘은 존재할 수 있다.

그것들은 실제와는 다른 허위의식과 신화,전설,그리고 소문으로 현실을 교란하고 구성원들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동엽의 시 구절처럼 우리 중에 누가 하늘을 보았다고,누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회문화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실체 없는 소문만큼은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