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다
⊙ 아버지,권위와 질서의 상징
한 개인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본능적인 욕구를 지닌 유아는 어머니를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욕망을 충족하려는 경향을 갖는다고 한다.
소위 상상계로 불리는 이 시기에 유아에게는 욕망만이 존재할 뿐 이를 억압하는 금기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라는 존재로 인해 깨지게 된다.
어머니와 유아의 2자관계가 아버지의 개입으로 3자관계가 되면서 어머니와의 동일시는 깨지고 욕망에 대한 금기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아는 자기 자신과 어머니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아버지에게서 느끼게 되고 이후로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따르게 된다.
소위 상징계의 언어를 배우게 되고 사회적 규칙과 금기들을 익혀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 아버지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사회적 규칙과 관습을 상징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린 아이에게 아버지의 상징은 매우 견고하게 비쳐진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온갖 규율과 금기로 아이의 욕망을 가로막고 때때로 강제와 처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가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된다.
하지만 유아는 성장하게 마련이며 그 과정에서 자기 욕망을 거세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도 함께 키워가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아버지 못지않게 성장한 아이는 '부친 살해'라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하며,때로는 스스로가 부친의 위치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상징계적 지배에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존 질서가 폐기될 운명에 처하고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 혁명적 시기에 부친 살해 모티브가 종종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는 동경과 동일시의 대상인 동시에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지배자적인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불행히도 한국 현대 소설 속에 나타난 아버지는 정신분석에서 논의하는 상징계의 모델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식민지와 전쟁,그리고 이산(離散)과 군부독재,추후에 이어진 산업화를 거치는 동안 권위와 질서를 상징하는 아버지는 현실 속에 자리 잡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소설 속에서 아버지는 그저 힘없고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모방의 대상으로서도 그리고 질서의 상징으로서도 자리 잡지 못한 한낱 연민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가 바로 한국 소설의 아버지인 셈이다.
그리고 이 점은 90년대 대표적인 리얼리스트였던 김소진에 의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
김소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자전거 도둑」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겁에 질린 아버지를 대신해 도둑이라는 희생양이 되는 처지에 놓였을 뿐더러 그것으로 모자라 실제 도둑질을 했던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 일까지 경험한다.
작품 속의 아버지는 상징계의 엄격하고 규율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규율을 무너뜨린 나약한 존재로 그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김소진의 비굴한 아버지 상은 비단 이 작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김소진의 데뷔작인 「쥐잡기」에서부터 「장석조네 사람들」연작과 「개흘레꾼」,「고아떤 뺑덕어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형상화돼 왔었다.
일련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보잘 것 없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을 것이다.
「고아떤 뺑덕어멈」은 이러한 주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 작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외상 장부책에서 낯익은 여자 사진 한 장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서술자인 '나'는 사진 속의 그녀와 몹시 닮았다던 한 여자를 기억해낸다.
바로 약장수 무리에 섞여 심청전을 공연하던 '뺑덕어멈'이라는 여자였다.
공연을 접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 아버지는 약장수단 공연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심청전,그 가운데서도 뺑덕어멈이 등장하는 부분에 가장 몰입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아저씨가 아버지가 '뺑덕어멈'에게 상사증을 앓고 있다고 귀띔을 해주게 된다.
뺑덕어멈은 공연을 하면서 남정네들에게 가끔 매춘도 하는 그런 여자였는데 아버지도 그녀와의 성관계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처음에는 하릴없이 넘쳐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었지만 이내 그 일을 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아르바이트로 아버지의 화대를 마련하고 일을 성사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이 정도라면 '나'에게 '아버지'는 상징계의 모델이 될 수 없을뿐더러 그 존재마저 부정하고 싶은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다.
서술자인 '나'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진 탓일 것이다.
⊙ 가족 로망스로부터 벗어나기
현실 속에서 대개의 '아들'은 작품 속 아버지 같은 존재를 자기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이쯤 되면 이들은 지금 아버지는 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며 아버지는 어딘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거나 혹은 명예롭게 죽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서 자괴감을 극복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가족 로망스라 일컫는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위안을 주는 데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허구적인 '나'를 만들어내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 더 아버지와의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증오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환상을 좇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행히 작품 속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과거를 분명히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실상 아버지는 6 · 25 때 갓난아이와 아내를 두고 월남을 했었고 이후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 살아가던 나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두고 온 아내의 모습과 너무도 닮은 '뺑덕어멈'을 보게 되자 잊혀졌던 색욕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분 이름이 최자 옥자 분자였나요?"
"길치. 최옥분...."
"북쪽 생각이 나는 거지요."
"안 난다믄 거짓부렁이잖구. 그 아이가 살아 있다믄야……
내 아가 이름도 채 못 지어주고 나온 거 니 아니?
산다는 게 내한테는 너무 구차했다.
이곳에서 꾸역꾸역 명을 보존하믄서 살긴 살아왔는데...."
(중략) "별걸 다 묻지 않니,니가 지금?
눈에 안 뵈니깐 더 그리웠던 게지.
근데 아닌게아니라 참 고운 사람이었디.
그래 그건 인정해야 할 기야. 참 고왔디.
저,저 뺑덕어멈 구실을 했던 양반이 있었잖니?
그 양반하고 태가 아주 비슷했다구. 쯧쯧,내가 괜한 소릴 줴치고 있구나."
아버지의 눈동자를 가만가만 들여다보던 나는 그 눈빛에서 어떤 환영이 둥지를 뜨는 새처럼 불쑥 튀어오르는 걸 보았다.
순간 나는 으스스를 쳐대며 그 환영을 잡으려는 듯 두 손을 움찔 내밀려는 자세를 발작적으로 취했다.
그 눈빛,아,당신은 올가미에 치인 멧비둘기였군요.
-김소진,「고아떤 뺑덕어멈」
위의 인용문은 서술자인 '나'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이다.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가 '올가미에 치인 멧비둘기' 같은 연약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회적 관습과 규칙,질서를 내면화하게 해주는 권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상처 받고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는 후세의 모델이 되고 정체성을 규정지어 주는 동시에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기존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서 아버지는 상징계의 권위를 지닌 존재로 자리잡기가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으면서 상처받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 세대는 본받을 만한 것도 극복해야 할 것도 없는 하찮은 존재로 이해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가족 로망스에 의해 아버지를 부정하거나 교체하고 싶은 욕망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현실 속의 '나'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를 인정하는 것,도적이자,개흘레꾼이자,주책바가지인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그것으로부터 진정한 삶은 시작된다는 것을 작품은 전달하는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아버지,권위와 질서의 상징
한 개인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본능적인 욕구를 지닌 유아는 어머니를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욕망을 충족하려는 경향을 갖는다고 한다.
소위 상상계로 불리는 이 시기에 유아에게는 욕망만이 존재할 뿐 이를 억압하는 금기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라는 존재로 인해 깨지게 된다.
어머니와 유아의 2자관계가 아버지의 개입으로 3자관계가 되면서 어머니와의 동일시는 깨지고 욕망에 대한 금기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아는 자기 자신과 어머니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아버지에게서 느끼게 되고 이후로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따르게 된다.
소위 상징계의 언어를 배우게 되고 사회적 규칙과 금기들을 익혀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 아버지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사회적 규칙과 관습을 상징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린 아이에게 아버지의 상징은 매우 견고하게 비쳐진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온갖 규율과 금기로 아이의 욕망을 가로막고 때때로 강제와 처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가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된다.
하지만 유아는 성장하게 마련이며 그 과정에서 자기 욕망을 거세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도 함께 키워가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아버지 못지않게 성장한 아이는 '부친 살해'라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하며,때로는 스스로가 부친의 위치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상징계적 지배에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존 질서가 폐기될 운명에 처하고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 혁명적 시기에 부친 살해 모티브가 종종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는 동경과 동일시의 대상인 동시에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지배자적인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불행히도 한국 현대 소설 속에 나타난 아버지는 정신분석에서 논의하는 상징계의 모델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식민지와 전쟁,그리고 이산(離散)과 군부독재,추후에 이어진 산업화를 거치는 동안 권위와 질서를 상징하는 아버지는 현실 속에 자리 잡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소설 속에서 아버지는 그저 힘없고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모방의 대상으로서도 그리고 질서의 상징으로서도 자리 잡지 못한 한낱 연민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가 바로 한국 소설의 아버지인 셈이다.
그리고 이 점은 90년대 대표적인 리얼리스트였던 김소진에 의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
김소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자전거 도둑」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겁에 질린 아버지를 대신해 도둑이라는 희생양이 되는 처지에 놓였을 뿐더러 그것으로 모자라 실제 도둑질을 했던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 일까지 경험한다.
작품 속의 아버지는 상징계의 엄격하고 규율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규율을 무너뜨린 나약한 존재로 그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김소진의 비굴한 아버지 상은 비단 이 작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김소진의 데뷔작인 「쥐잡기」에서부터 「장석조네 사람들」연작과 「개흘레꾼」,「고아떤 뺑덕어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형상화돼 왔었다.
일련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보잘 것 없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을 것이다.
「고아떤 뺑덕어멈」은 이러한 주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 작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외상 장부책에서 낯익은 여자 사진 한 장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서술자인 '나'는 사진 속의 그녀와 몹시 닮았다던 한 여자를 기억해낸다.
바로 약장수 무리에 섞여 심청전을 공연하던 '뺑덕어멈'이라는 여자였다.
공연을 접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 아버지는 약장수단 공연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심청전,그 가운데서도 뺑덕어멈이 등장하는 부분에 가장 몰입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아저씨가 아버지가 '뺑덕어멈'에게 상사증을 앓고 있다고 귀띔을 해주게 된다.
뺑덕어멈은 공연을 하면서 남정네들에게 가끔 매춘도 하는 그런 여자였는데 아버지도 그녀와의 성관계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처음에는 하릴없이 넘쳐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었지만 이내 그 일을 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아르바이트로 아버지의 화대를 마련하고 일을 성사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이 정도라면 '나'에게 '아버지'는 상징계의 모델이 될 수 없을뿐더러 그 존재마저 부정하고 싶은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다.
서술자인 '나'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진 탓일 것이다.
⊙ 가족 로망스로부터 벗어나기
현실 속에서 대개의 '아들'은 작품 속 아버지 같은 존재를 자기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이쯤 되면 이들은 지금 아버지는 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며 아버지는 어딘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거나 혹은 명예롭게 죽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서 자괴감을 극복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가족 로망스라 일컫는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위안을 주는 데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허구적인 '나'를 만들어내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 더 아버지와의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증오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환상을 좇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행히 작품 속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과거를 분명히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실상 아버지는 6 · 25 때 갓난아이와 아내를 두고 월남을 했었고 이후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 살아가던 나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두고 온 아내의 모습과 너무도 닮은 '뺑덕어멈'을 보게 되자 잊혀졌던 색욕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분 이름이 최자 옥자 분자였나요?"
"길치. 최옥분...."
"북쪽 생각이 나는 거지요."
"안 난다믄 거짓부렁이잖구. 그 아이가 살아 있다믄야……
내 아가 이름도 채 못 지어주고 나온 거 니 아니?
산다는 게 내한테는 너무 구차했다.
이곳에서 꾸역꾸역 명을 보존하믄서 살긴 살아왔는데...."
(중략) "별걸 다 묻지 않니,니가 지금?
눈에 안 뵈니깐 더 그리웠던 게지.
근데 아닌게아니라 참 고운 사람이었디.
그래 그건 인정해야 할 기야. 참 고왔디.
저,저 뺑덕어멈 구실을 했던 양반이 있었잖니?
그 양반하고 태가 아주 비슷했다구. 쯧쯧,내가 괜한 소릴 줴치고 있구나."
아버지의 눈동자를 가만가만 들여다보던 나는 그 눈빛에서 어떤 환영이 둥지를 뜨는 새처럼 불쑥 튀어오르는 걸 보았다.
순간 나는 으스스를 쳐대며 그 환영을 잡으려는 듯 두 손을 움찔 내밀려는 자세를 발작적으로 취했다.
그 눈빛,아,당신은 올가미에 치인 멧비둘기였군요.
-김소진,「고아떤 뺑덕어멈」
위의 인용문은 서술자인 '나'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이다.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가 '올가미에 치인 멧비둘기' 같은 연약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회적 관습과 규칙,질서를 내면화하게 해주는 권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상처 받고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는 후세의 모델이 되고 정체성을 규정지어 주는 동시에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기존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서 아버지는 상징계의 권위를 지닌 존재로 자리잡기가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으면서 상처받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 세대는 본받을 만한 것도 극복해야 할 것도 없는 하찮은 존재로 이해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가족 로망스에 의해 아버지를 부정하거나 교체하고 싶은 욕망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현실 속의 '나'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를 인정하는 것,도적이자,개흘레꾼이자,주책바가지인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그것으로부터 진정한 삶은 시작된다는 것을 작품은 전달하는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