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이데올로기에 희생되는 개인
⊙ 20세기 이데올로기의 비극
20세기는 이념적 차이에 의한 비극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았던 시기였다.
20세기 초에는 민족주의라든지,제국주의의 이념이 세계를 전쟁에 휩싸이게 했고,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국가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독일의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자행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일본도 난징 대학살을 저질렀다.
20세기 중반에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비극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그리고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학살 등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비극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0세기 후반에 되살아난 민족주의 망령은 보스니아 내전이나 르완다의 종족분쟁에서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것이다.
종교적 차이로 인한 분쟁 역시 폭넓게 보면 이런 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분쟁을 포함해 중동은 언제나 전운이 감돌고 그곳에서는 지금도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간다.
물리적인 요인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20세기에 벌어진 일련의 비극들은 반드시 각국의 경제적인 이익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이를테면 서로 다른 민족,종교,신념의 체계를 지녔다는 것이 갈등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이들 전쟁을 통해 본질적으로 실익을 얻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오히려 중립을 선언하면서 갈등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던 이들이 실익을 얻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도 이득이 안 되는 이 비극에는 불행히도 수많은 이들이 동원된다.
놀라운 것은 전쟁에 동원된 이들 중에는 아무런 대가와 이득이 보장된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누구보다도 폭력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 동행,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전상국의 「동행」은 자기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대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휩쓸려 파국으로 치달은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전상국은 「아베의 가족」이나 「길」연작에서처럼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갈등하며 충돌하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비슷한 시기를 다뤘던 최인훈의 「광장」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작가 전상국은 이데올로기 자체보다는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개인에게 더욱 초점을 맞춘다.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던 개인의 비극을 조명하는 것이 전상국 소설의 특징인 것이다.
작품 「동행」의 배경은 강원도의 어느 산길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키 작은 사내와 키 큰 사내이며 기본적인 줄거리는 두 사람이 산길을 걸으며 가슴 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서로 나눈다는 내용이다.
눈치 챘겠지만 「동행」은 전형적인 여로형(旅路形) 소설로 다시 말해 '길'이 소설의 전개과정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대개 여로형 소설은 처음에는 인물의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다가 중반 이후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마련인데 이 소설 역시 그러하다.
더군다나 「동행」의 경우 화자가 모든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품을 읽는 내내 묘한 긴장감과 궁금증을 놓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이들이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하는 궁금증을 계속 불러일으켜 화자가 전달하려는 내용에 더욱 집중하도록 만드는 소설적 장치가 잘 활용된 작품인 것이다.
작중 인물마저도 그저 키 작은 사내,키 큰 사내로 명명돼 있어 독자의 궁금증과 집중력은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첫 번째 이야기는 춘천 근화동 살인사건 이야기다.
철저히 객관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살인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은 이미 드러난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로에게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이거나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데 키 작은 사내 억구는 바로 춘천 사건의 살인범 '억구'였고 키 큰 사내는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내 극을 진행시켜 두 사람이 다시 눈길을 걷게 만든다.
두 번째 이야기는 키 큰 사내의 토끼 이야기다.
보득솔밭을 지나면서 키 작은 사내 억구가 예전에 토끼들이 많았었다는 말을 하자 키 큰 사내가 어린 시절 토끼 사냥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던 것이다.
그때 키 큰 사내는 새끼 토끼를 맴도는 어미 토끼에게서 강렬한 모성을 느끼고는 어미 토끼를 놓쳐버렸다고 말해준다.
세 번째 이야기는 키 작은 사내 '억구'가 어린 시절 눈을 뭉치다 자신을 놀리던 '득수'의 손등을 살점이 떨어져나갈 만큼 물어뜯어 깜깜한 광 속에 갇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여기까지는 대개 어린 시절 한두 번쯤 있을 법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키 작은 사내 억구는 '득수'에 얽힌 이야기를 아직 끝맺지 않았다.
보득솔밭을 지나 쾌 큼직한 송림 사잇길이었다,소나무 위에 얹혔던 눈이 쏴르르 떨어져 내렸다.
억구가 다시 이야길 이어 갔다.
"난 기어코 득술 죽이고야 만 겁니다. 거 왜,사변 때 말입니다.
파리 새끼 쥑이듯 사람 막 쥑일 때 말이죠.
놈을 죽일 때 보니 그놈은 왼손에 장갑을 끼고 있더군요.
차마 그걸 벗겨 버릴 순 없었는데,울화통은 더 치밀더군요.
여하튼 난 득술 죽이고야 말았다 - 이겁니다.
허나 그뿐인 줄 아슈?
육친을,즉 제 애비까지 잡아먹은 게 바로 나요. 이 최억구라는 인간입네다."
결국 이용당했더란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동네의 천더기로 따돌림당하던 자기를 빨갱이들이 용하게 이용했더란 것이다.
무슨 위원회 부위원장이니 하는 감투를 떠억 씌워서 그래 결국 자기 부친까지 참사를 당하게 하고 만 것이었다. (중략)
그 밤,부친은 죽창에 찔려 죽고,어쩌다 자긴 이렇게 여기 살아 있다고 억구는 또 고개 오르기를 멈추며 조용히 한숨을 몰아쉬는 것이었다. (중략)
"그 날 밤,난 집을 빠져 나와 뒷산으로 치뛰며 아버님의 비명을 들었수다.
득수 동생놈이,잡았다! 하고 소릴 치더군요.
잡았다,하고 말입네다 그래두 이놈은 살겠다고 정갱이까지 빠져드는 눈길을 맨발로 달아나구 있었죠."
전상국 「동행」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억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민군에 의해 어느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득수'를 죽이게 된다.
'파리 새끼 쥑이듯 사람 막 쥑일 때'라는 억구의 말에서 당시 도를 넘어선 광기와 폭력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억구는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그저 이용당했다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 자신도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로 그는 산길에서 큰 키의 사내에게 춘천 근화동 살인사건도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자기 아버지를 죽창으로 찔러 죽였던 득수의 동생 득칠을 얼마 전 춘천에서 죽였다는 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억구는 득수를 죽이고 동생 득칠도 죽이고 또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아버지의 산소에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이다.
⊙ 배타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이데올로기는 신념의 체계다.
불행하게도 그런 까닭에 이데올로기는 자기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비판적 접근도 쉽지가 않다.
어느 이데올로기도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지닌 폐쇄성과 배타성은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경향이 많다.
진정으로 불행한 것은 이성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목적보다는 그 폐쇄성과 배타성을 먼저 익힌다는 사실이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추종자들처럼 말이다.
「동행」의 '억구'를 생각해보라.
그가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을 어느 만큼 이해했겠는가를.
결국 '억구'는 거대한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격류에 휩쓸렸을 뿐 어떤 선택이나 판단도 할 수 없는 힘없고 나약한 개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비판과 관용의 정신이다.
자기가 받아들인 이데올로기도 그 실천과정에서 오류와 모순이 나타날 수 있다는 비판적인 태도와 상대방이 지닌 신념의 체계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그것이 곧 비극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20세기 이데올로기의 비극
20세기는 이념적 차이에 의한 비극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았던 시기였다.
20세기 초에는 민족주의라든지,제국주의의 이념이 세계를 전쟁에 휩싸이게 했고,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국가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독일의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자행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일본도 난징 대학살을 저질렀다.
20세기 중반에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비극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그리고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학살 등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비극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0세기 후반에 되살아난 민족주의 망령은 보스니아 내전이나 르완다의 종족분쟁에서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것이다.
종교적 차이로 인한 분쟁 역시 폭넓게 보면 이런 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분쟁을 포함해 중동은 언제나 전운이 감돌고 그곳에서는 지금도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간다.
물리적인 요인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20세기에 벌어진 일련의 비극들은 반드시 각국의 경제적인 이익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이를테면 서로 다른 민족,종교,신념의 체계를 지녔다는 것이 갈등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이들 전쟁을 통해 본질적으로 실익을 얻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오히려 중립을 선언하면서 갈등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던 이들이 실익을 얻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도 이득이 안 되는 이 비극에는 불행히도 수많은 이들이 동원된다.
놀라운 것은 전쟁에 동원된 이들 중에는 아무런 대가와 이득이 보장된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누구보다도 폭력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 동행,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전상국의 「동행」은 자기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대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휩쓸려 파국으로 치달은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전상국은 「아베의 가족」이나 「길」연작에서처럼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갈등하며 충돌하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비슷한 시기를 다뤘던 최인훈의 「광장」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작가 전상국은 이데올로기 자체보다는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개인에게 더욱 초점을 맞춘다.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던 개인의 비극을 조명하는 것이 전상국 소설의 특징인 것이다.
작품 「동행」의 배경은 강원도의 어느 산길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키 작은 사내와 키 큰 사내이며 기본적인 줄거리는 두 사람이 산길을 걸으며 가슴 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서로 나눈다는 내용이다.
눈치 챘겠지만 「동행」은 전형적인 여로형(旅路形) 소설로 다시 말해 '길'이 소설의 전개과정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대개 여로형 소설은 처음에는 인물의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다가 중반 이후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마련인데 이 소설 역시 그러하다.
더군다나 「동행」의 경우 화자가 모든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품을 읽는 내내 묘한 긴장감과 궁금증을 놓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이들이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하는 궁금증을 계속 불러일으켜 화자가 전달하려는 내용에 더욱 집중하도록 만드는 소설적 장치가 잘 활용된 작품인 것이다.
작중 인물마저도 그저 키 작은 사내,키 큰 사내로 명명돼 있어 독자의 궁금증과 집중력은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첫 번째 이야기는 춘천 근화동 살인사건 이야기다.
철저히 객관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살인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은 이미 드러난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로에게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이거나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데 키 작은 사내 억구는 바로 춘천 사건의 살인범 '억구'였고 키 큰 사내는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내 극을 진행시켜 두 사람이 다시 눈길을 걷게 만든다.
두 번째 이야기는 키 큰 사내의 토끼 이야기다.
보득솔밭을 지나면서 키 작은 사내 억구가 예전에 토끼들이 많았었다는 말을 하자 키 큰 사내가 어린 시절 토끼 사냥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던 것이다.
그때 키 큰 사내는 새끼 토끼를 맴도는 어미 토끼에게서 강렬한 모성을 느끼고는 어미 토끼를 놓쳐버렸다고 말해준다.
세 번째 이야기는 키 작은 사내 '억구'가 어린 시절 눈을 뭉치다 자신을 놀리던 '득수'의 손등을 살점이 떨어져나갈 만큼 물어뜯어 깜깜한 광 속에 갇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여기까지는 대개 어린 시절 한두 번쯤 있을 법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키 작은 사내 억구는 '득수'에 얽힌 이야기를 아직 끝맺지 않았다.
보득솔밭을 지나 쾌 큼직한 송림 사잇길이었다,소나무 위에 얹혔던 눈이 쏴르르 떨어져 내렸다.
억구가 다시 이야길 이어 갔다.
"난 기어코 득술 죽이고야 만 겁니다. 거 왜,사변 때 말입니다.
파리 새끼 쥑이듯 사람 막 쥑일 때 말이죠.
놈을 죽일 때 보니 그놈은 왼손에 장갑을 끼고 있더군요.
차마 그걸 벗겨 버릴 순 없었는데,울화통은 더 치밀더군요.
여하튼 난 득술 죽이고야 말았다 - 이겁니다.
허나 그뿐인 줄 아슈?
육친을,즉 제 애비까지 잡아먹은 게 바로 나요. 이 최억구라는 인간입네다."
결국 이용당했더란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동네의 천더기로 따돌림당하던 자기를 빨갱이들이 용하게 이용했더란 것이다.
무슨 위원회 부위원장이니 하는 감투를 떠억 씌워서 그래 결국 자기 부친까지 참사를 당하게 하고 만 것이었다. (중략)
그 밤,부친은 죽창에 찔려 죽고,어쩌다 자긴 이렇게 여기 살아 있다고 억구는 또 고개 오르기를 멈추며 조용히 한숨을 몰아쉬는 것이었다. (중략)
"그 날 밤,난 집을 빠져 나와 뒷산으로 치뛰며 아버님의 비명을 들었수다.
득수 동생놈이,잡았다! 하고 소릴 치더군요.
잡았다,하고 말입네다 그래두 이놈은 살겠다고 정갱이까지 빠져드는 눈길을 맨발로 달아나구 있었죠."
전상국 「동행」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억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민군에 의해 어느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득수'를 죽이게 된다.
'파리 새끼 쥑이듯 사람 막 쥑일 때'라는 억구의 말에서 당시 도를 넘어선 광기와 폭력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억구는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그저 이용당했다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 자신도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로 그는 산길에서 큰 키의 사내에게 춘천 근화동 살인사건도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자기 아버지를 죽창으로 찔러 죽였던 득수의 동생 득칠을 얼마 전 춘천에서 죽였다는 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억구는 득수를 죽이고 동생 득칠도 죽이고 또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아버지의 산소에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이다.
⊙ 배타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이데올로기는 신념의 체계다.
불행하게도 그런 까닭에 이데올로기는 자기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비판적 접근도 쉽지가 않다.
어느 이데올로기도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지닌 폐쇄성과 배타성은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경향이 많다.
진정으로 불행한 것은 이성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목적보다는 그 폐쇄성과 배타성을 먼저 익힌다는 사실이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추종자들처럼 말이다.
「동행」의 '억구'를 생각해보라.
그가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을 어느 만큼 이해했겠는가를.
결국 '억구'는 거대한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격류에 휩쓸렸을 뿐 어떤 선택이나 판단도 할 수 없는 힘없고 나약한 개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비판과 관용의 정신이다.
자기가 받아들인 이데올로기도 그 실천과정에서 오류와 모순이 나타날 수 있다는 비판적인 태도와 상대방이 지닌 신념의 체계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그것이 곧 비극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