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과 신뢰가 부재하는 사회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23. 서정인「후송」
⊙ 소통하지 못하는 문화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대부분 군대에 간다.

남북으로 분단된 채 여전히 서로에게 군사적 긴장을 늦추지 않는 한반도에서 징병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군 복무가 젊은이들에게 그다지 바람직한 사회 ·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많은 부분에서 군대도 민주적인 절차와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상급자의 명령 한 마디가 결정적일 때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과거 군대 내에서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나 소통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절차적 합리성이 무시된 상황에서 상호 소통은 의미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호간의 신뢰도 기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통적 권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상 타인의 견해를 무시하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상호 신뢰를 쌓기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설사 신뢰를 쌓는다 해도 그것은 공식적인 것이 아닌 비공식적인 친분에 다름 아니었다.

서정인의 데뷔작 「후송」은 이와 같은 군대 내 문제점을 파헤치는 동시에 군대로 표상되는 당시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작품 「후송」은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폭이 비교적 넓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개인이 지닌 특수성이 한국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과 위계적인 조직 내에서 개인의 의견이 쉽사리 무시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어떤 절차적 합리성보다도 상급자의 판단이 우선시되며 동료 사이의 신뢰는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눈에 띈다.

또한 이런 환경 속에서 개인은 고독과 단절감을 느낀 채 극단적인 소외를 경험한다는 점도 작품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 '티나이투스'-소통의 바로미터

「후송」의 주인공은 포병 장교 성 중위이다.

그는 군대에서 근무한 지 20개월이 되는 즈음에 '티나이투스'라는 희귀한 귓병을 앓게 된다.

무료한 군대 생활에 지친 그는 무심결에 45구경 권총으로 빈 깡통을 향해 150발을 쏘았었는데 그 이후로 귓속에서 소리가 나는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빈 깡통'은 성 중위의 의미 없는 삶,빈 껍데기뿐인 삶을 상징하고 그의 과도한 사격 행위는 무의미한 삶에 대한 분노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귓병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통과의례적인 고통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그의 귓병이 타인이 지각할 수 없는 질병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질병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뢰 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로서 기능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인이 성 중위를 어느 만큼 신뢰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셈이다.

외상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티나이투스' 증상은 말 그대로 성 중위를 얼마만큼 신뢰하느냐에 따라 질병이 될 수도 있고 꾀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군의관은 성 중위의 귓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군의관은 매번 '후송 불요'라는 판정을 내렸고 사병들이 흔히 그렇듯 성 중위도 꾀병을 부린다고 의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성 중위가 분명히 귀가 아프다고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참모장은 포 사격장으로 파견 근무를 명하기도 한다.

개인의 사정이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군대와 군대로 표상되는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대목인 것이다.

물론 조직 구성원 사이에 서로의 의견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도 분명히 파악할 수가 있다.

시간이 지나 사단 군수처로 전속된 성 중위는 다행스럽게 같은 대학 출신 의무 참모를 자주 접하게 되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 개인적으로 의무 참모와 친숙해졌을 때 성 중위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자신의 질병이 '티나이투스'라는 희귀 병이라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된다.

얼마 후 성 중위는 의무 중대로 군의관을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그때 의무 참모의 말을 전하자 군의관은 예전과는 다르게 후송 상신을 해 주겠다고 태도를 바꾸게 된다.

환자 성 중위는 신뢰할 수 없었지만 의무 참모의 권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 중위의 바람대로 후송이 쉽사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 불신과 권위

성 중위는 일단 의무 참모의 배려 덕에 육군 수도병원에서 오디오미터라는 기기를 가지고 4000 사이클에서 청력이 저하되며 4케이시(소리 단위)의 소리가 귀에서 난다는 사실을 입증받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 중위의 후송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후로도 의무 중대와 야전병원을 거쳐 겨우 제17후송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의심과 확인의 절차를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후송 절차를 밟을 때 가장 요긴했던 것은 성 중위의 증상 그 자체가 아니라 상급 병원에서 발급한 병상 일지의 권위 덕분이었다.

불신은 여전했고 권위는 강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17후송병원 역시 성 중위에게 해 줄 수 있는 치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일종의 신경 외상입니다. 포병 장교에게 많지요."

군의관은 병상 일지를 덮었다.

그리고 계속했다.

"적당한 치료법이 없어요. 약물도 별로 없고… ···. 오디날이란 약이 시장에 나와 있긴 한데 별루 신통하질 못해요." (중략)

"수도병원이 시설이 젤 나아요. 오디오미터도 부속 병원과 수도병원에밖에 없습니다."

"그리로 후송 보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쎄,이 청력표 의견란에도,"

군의관은 병상 일지에 첨부된 청력표를 펼쳤다.

"특별 치료를 위해서 수도육군병원에 후송 입원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 의견과 여기서의 후송 방향과는 별 문젭니다." (중략)

"입원 환자에게 적당한 치료 방책이 없으면 후송시키는 거 아닙니까?"

"입원은 내가 시켰지만 후송은 내가 안 시켜요. 후송심사위원회라는 것이 있어요. 군 사령부 의무 참모부에서도 나오지요. 그리고 개인 후송도 없어요. 다 집단 후송입니다."

"그렇지만 담당 군의관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거의 결정적일 텐데요?"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보장은 못한다 그 말씀이에요."

- 서정인,「후송」

위의 언급처럼 현실적으로 성 중위의 귓병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은 '수도병원'이었다.

그러나 군의관은 자신이 어떤 치료도 할 수 없으면서도 수도병원으로 후송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또한 후송 자체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언급을 하며 환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성 중위는 또다시 관료주의의 벽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작품의 결말에서 성 중위는 그가 원하던 수도병원으로 끝내 후송되지 못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부산으로 내려간다.

물론 수도병원에 환자가 넘쳐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군의관들은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인 성 중위에게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의사라면 치료를 위해 애를 써야 하겠지만 작품 속의 군의관들에게서 이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권위에 길들여져 자율성을 상실한 까닭이고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 때문일 것이다.

⊙ 신뢰와 열정과 자유

언젠가 제너럴 일렉트릭의 전 회장인 잭 웰치는 "관료주의는 생산성의 적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그는 조직은 신뢰,열정,자유가 가득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힘주어 이야기했었다.

조직 구성원 사이의 신뢰를 구축하고,그들이 소신껏 일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도록 격려하며 불필요한 과정과 절차를 제거하게 되면 타성은 사라지고 자율이 자리 잡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작품 「후송」에서 성 중위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관료주의다.

어느날 환자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그러나 「후송」에서 성 중위는 무려 여섯 단계나 되는 후송 절차를 밟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병원이 아닌 엉뚱한 지방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 과정에서 성 중위의 개인적인 특성은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그가 겪었던 소외와 단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또한 그 어떤 군의관에게서도 환자를 고치기 위한 노력이나 환자에 대한 책임의식을 찾아볼 수 없는 점도 문제적이다.

일반적으로 작품 「후송」은 군대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작품의 현재적인 의미는 우리 사회에 상호 신뢰와 소통의 자율성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