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현실의 경계에서 삶의 갈등에 빠지다
⊙ 순수와 현실의 경계
사람들은 흔히 어린 시절을 순수한 동심의 세계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아직 현실의 냉정한 원칙들을 내면화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현실의 원칙을 흉내내면 영악하다고 생각하고,반면에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순수한 구석이 있으면,순진하고 철들지 못했다고 나무란다.
따라서 '순수'란 냉혹한 성인사회에 아직 진입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만 미덕일 뿐,현실사회에서는 오히려 천덕꾸러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을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성인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인간은 그 순수했던 마음을 송두리째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내버리고 마는가.
아니면 세속의 법칙을 이겨내고 순수함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우리와 함께 고민할 것을 요청한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인 '나',윤회중은 소위 '낙하산'이다.
원래 '나'는 다니던 회사가 합병되어 실직하고 이후로 애인도 잃었지만 그 후 젊고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을 했고 얼마 뒤에는 제약회사 사장인 장인 덕에 곧 '전무'로 승진을 앞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고 아내의 권유로 고향 '무진'으로 내려가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주인공 '나'는 전형적인 세속의 인물이다.
사랑 없는 결혼을 했고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못내 수긍하는 존재가 바로 '나'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경은 편치 못하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순수가 마침내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진(霧津).
그곳은 지명대로 안개가 짙은,따라서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방향 상실과 정체성 혼란에 빠진 분위기를 상징한다.
그가 그곳에 갔던 것은 실패를 겪거나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한 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어느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는 무진에 가서 삶의 방향을 고민했던 것이다.
⊙ 무진(霧津),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
무진에 온 날,'나'는 중학교 선생인 후배 '박'과 세무서장으로 있는 동창생 '조'를 만난다.
그리고 '조'의 집에서 '하인숙'이라는 음악 선생을 소개받게 된다.
대학시절 전공이 성악이었고 졸업연주회 때 <나비부인> 중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는 그녀는 '조'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노래를 한 곡 부르게 된다.
여선생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조금만 달싹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무서 직원들이 손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선생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었다.
<어떤 개인 날>과 <목포의 눈물>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유사성이 있을까?
무엇이 저 아리아들로써 길들여진 성대에서 유행가를 나오게 하고 있을까?
그 여자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는 작부(酌婦)들이 부르는 그것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꺾임이 없었고,대체로 유행가를 살려주는 목소리의 갈라짐이 없었고,흔히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이 없었다.
그 여자의 <목포의 눈물>은 이미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비부인> 중의 아리아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김승옥,「무진기행」
노래가 끝나자마자 중학교 후배 '박'은 그 자리를 바로 뜬다.
평소 하인숙을 사랑해왔던 '박'은 작품 속에서 순수를 표상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중학교 교사로서 세속적인 욕망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순정적인 인물인 것이다.
이에 반해 '하인숙'에게 노래를 강요하다시피 했던 세무서장 '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인숙'은 어떤 인물인가.
위의 인용된 장면에서 보듯이 그녀는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다.
'아리아'도 아니고 '유행가'도 아닌 그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녀는 순수와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정하지 못한 경계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녀에게서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무진의 냄새를 맡는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조'의 집에서 나오면서 '나'는 '하인숙'과 단 둘이 남게 된다.
이때 그녀는 '나'에게 자신을 무진으로부터 구원해서 서울로 데려가달라고 간청한다.
순수와 현실의 경계선상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그녀는 무진으로부터 이미 벗어난 '나'를 구원의 표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 역시 그녀에게서 그 옛날 무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었던 자기 자신을 떠올리며 연민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둘은 주인공이 언젠가 폐병으로 요양했었던 집에서 사랑의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다음 날 '나'에게는 아내로부터 급전이 날아들고 과거의 회환 속에 빠져 있던 '나'는 '하인숙'에게 전하려던 사랑의 편지를 이내 찢어버리고 만다.
'하인숙'에게 투사된 과거의 자기 연민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서울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 서울로의 회귀,상징계로 편입하기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상상계와 상징계로 구분지어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의하면 상상계는 아직 자아의 개념이 형성되지 못한 단계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아동은 생애 처음으로 대하는 타인,곧 어머니를 자기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상계는 대개 생후 18개월까지인데 이후로 아동은 아버지의 출현에 의해 상상계로부터 벗어나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금기와 명령을 지시하는 존재이다.
아동은 아버지의 금기와 명령을 통해 비로소 사회와 문화를 학습하게 되며 그 과정은 언제나 언어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 시기에 아동은 어머니와 분리되었다는 사실에서 심한 결핍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동일시하던 어머니와 분리되면서 무의식적으로 끝없는 그리움과 욕망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진 기행」의 '나'는 자크 라캉의 개념인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에 위치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무진'은 문명사회 다시 말해 상징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벗어나야 할 공간이었고,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기억 속을 맴돌아 가끔씩 출몰하는 상상계적 몽상이었던 것이다.
'하인숙'과의 짧은 인연 역시 과거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점을 생각해보면 자아와 타인을 구별 못하는 상상계적 동일시가 한순간 작용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잊혀진 것들의 의미
「무진기행」의 '나'는 결국에 '하인숙'과 '무진'으로 대표되는 상상계적인 질서로부터 벗어나 '아내' '전무' '서울'로 대표되는 상징계적인 질서로 복귀한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가끔씩 사회로 진입하기 전,곧 '순수'로 불리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채 다시 현실로 복귀해 살아간다.
그러나 '순수',다시 말해 기존의 사회와 질서를 아직 내면화하지 못했던 상상계의 기억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문명사회가 무언가 오류가 있을 때,이를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나'는 '무진'을 벗어나지만 언젠가 '나'는 또다시 무진을 찾게 마련이고 이내 벗어나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진'은 '나'에게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부여해줄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나'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듯이 말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순수와 현실의 경계
사람들은 흔히 어린 시절을 순수한 동심의 세계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아직 현실의 냉정한 원칙들을 내면화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현실의 원칙을 흉내내면 영악하다고 생각하고,반면에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순수한 구석이 있으면,순진하고 철들지 못했다고 나무란다.
따라서 '순수'란 냉혹한 성인사회에 아직 진입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만 미덕일 뿐,현실사회에서는 오히려 천덕꾸러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을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성인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인간은 그 순수했던 마음을 송두리째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내버리고 마는가.
아니면 세속의 법칙을 이겨내고 순수함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우리와 함께 고민할 것을 요청한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인 '나',윤회중은 소위 '낙하산'이다.
원래 '나'는 다니던 회사가 합병되어 실직하고 이후로 애인도 잃었지만 그 후 젊고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을 했고 얼마 뒤에는 제약회사 사장인 장인 덕에 곧 '전무'로 승진을 앞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고 아내의 권유로 고향 '무진'으로 내려가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주인공 '나'는 전형적인 세속의 인물이다.
사랑 없는 결혼을 했고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못내 수긍하는 존재가 바로 '나'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경은 편치 못하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순수가 마침내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진(霧津).
그곳은 지명대로 안개가 짙은,따라서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방향 상실과 정체성 혼란에 빠진 분위기를 상징한다.
그가 그곳에 갔던 것은 실패를 겪거나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한 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어느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는 무진에 가서 삶의 방향을 고민했던 것이다.
⊙ 무진(霧津),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
무진에 온 날,'나'는 중학교 선생인 후배 '박'과 세무서장으로 있는 동창생 '조'를 만난다.
그리고 '조'의 집에서 '하인숙'이라는 음악 선생을 소개받게 된다.
대학시절 전공이 성악이었고 졸업연주회 때 <나비부인> 중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는 그녀는 '조'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노래를 한 곡 부르게 된다.
여선생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조금만 달싹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무서 직원들이 손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선생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었다.
<어떤 개인 날>과 <목포의 눈물>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유사성이 있을까?
무엇이 저 아리아들로써 길들여진 성대에서 유행가를 나오게 하고 있을까?
그 여자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는 작부(酌婦)들이 부르는 그것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꺾임이 없었고,대체로 유행가를 살려주는 목소리의 갈라짐이 없었고,흔히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이 없었다.
그 여자의 <목포의 눈물>은 이미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비부인> 중의 아리아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김승옥,「무진기행」
노래가 끝나자마자 중학교 후배 '박'은 그 자리를 바로 뜬다.
평소 하인숙을 사랑해왔던 '박'은 작품 속에서 순수를 표상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중학교 교사로서 세속적인 욕망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순정적인 인물인 것이다.
이에 반해 '하인숙'에게 노래를 강요하다시피 했던 세무서장 '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인숙'은 어떤 인물인가.
위의 인용된 장면에서 보듯이 그녀는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다.
'아리아'도 아니고 '유행가'도 아닌 그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녀는 순수와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정하지 못한 경계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녀에게서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무진의 냄새를 맡는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조'의 집에서 나오면서 '나'는 '하인숙'과 단 둘이 남게 된다.
이때 그녀는 '나'에게 자신을 무진으로부터 구원해서 서울로 데려가달라고 간청한다.
순수와 현실의 경계선상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그녀는 무진으로부터 이미 벗어난 '나'를 구원의 표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 역시 그녀에게서 그 옛날 무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었던 자기 자신을 떠올리며 연민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둘은 주인공이 언젠가 폐병으로 요양했었던 집에서 사랑의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다음 날 '나'에게는 아내로부터 급전이 날아들고 과거의 회환 속에 빠져 있던 '나'는 '하인숙'에게 전하려던 사랑의 편지를 이내 찢어버리고 만다.
'하인숙'에게 투사된 과거의 자기 연민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서울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 서울로의 회귀,상징계로 편입하기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상상계와 상징계로 구분지어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의하면 상상계는 아직 자아의 개념이 형성되지 못한 단계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아동은 생애 처음으로 대하는 타인,곧 어머니를 자기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상계는 대개 생후 18개월까지인데 이후로 아동은 아버지의 출현에 의해 상상계로부터 벗어나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금기와 명령을 지시하는 존재이다.
아동은 아버지의 금기와 명령을 통해 비로소 사회와 문화를 학습하게 되며 그 과정은 언제나 언어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 시기에 아동은 어머니와 분리되었다는 사실에서 심한 결핍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동일시하던 어머니와 분리되면서 무의식적으로 끝없는 그리움과 욕망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진 기행」의 '나'는 자크 라캉의 개념인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에 위치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무진'은 문명사회 다시 말해 상징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벗어나야 할 공간이었고,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기억 속을 맴돌아 가끔씩 출몰하는 상상계적 몽상이었던 것이다.
'하인숙'과의 짧은 인연 역시 과거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점을 생각해보면 자아와 타인을 구별 못하는 상상계적 동일시가 한순간 작용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잊혀진 것들의 의미
「무진기행」의 '나'는 결국에 '하인숙'과 '무진'으로 대표되는 상상계적인 질서로부터 벗어나 '아내' '전무' '서울'로 대표되는 상징계적인 질서로 복귀한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가끔씩 사회로 진입하기 전,곧 '순수'로 불리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채 다시 현실로 복귀해 살아간다.
그러나 '순수',다시 말해 기존의 사회와 질서를 아직 내면화하지 못했던 상상계의 기억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문명사회가 무언가 오류가 있을 때,이를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나'는 '무진'을 벗어나지만 언젠가 '나'는 또다시 무진을 찾게 마련이고 이내 벗어나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진'은 '나'에게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부여해줄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나'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듯이 말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