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에서 핵무기까지… 무기의 위력 따라 분쟁국간 승패 갈라

[Science]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무기’… 전쟁과 과학의 잘못된 만남?
최근 미국이 북한을 핵무기 보유국가로 규정했다.

미국 중국을 포함한 6개국은 다각도로 북한의 핵무기 사찰과 시료 채취를 요구하고 있지만 북한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북측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누적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대외 시위 수단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까이는 한반도, 넓게 보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인류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전쟁의 필수 요소로는 병력과 그들이 소지하는 무기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얼마나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는가가 전쟁의 승패를 갈라왔고 분쟁 당사자들 간의 힘의 불균형을 낳아왔다는 점에서 각 나라는 서로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무기 개발에 열을 올려왔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에서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지구를 몇 번 파괴시키고도 남을 분량이라고 알려져 있다.

힘을 과시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인류가 선택한 무기.

과연 무기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 고대의 무기-얼마나 빠른 속도를 내느냐가 관건

고대의 무기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이라고 꼽을 수 있는 건 로마시대에 많이 사용됐던 전차다.

전차의 모습은 이미 고전이 돼버린 영화 '벤허'에서 볼 수 있다.

기원전 1800년께 남부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용으로 본격 등장한 전차는 보병이 주전력이었던 군사작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2~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는 엄청난 힘으로 고속 기동을 할 수 있었다.

근거리에서 칼과 창을 휘둘러야 하는 보병은 전차가 대열로 돌진해오는 모습만으로도 전투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보병 위주의 군대 편제를 유지하던 주변 국가들에 전차는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이런 전차는 고대 이집트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했다.

전차로 무장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로 내려온 힉소스인들은 기원전 1680년께 이집트 남부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를 식민통치하기에 이른다.

당시 패권국으로 군림하던 이집트로서는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당시 월등한 군사과학기술을 가지지 못했던 이집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차가 치명적 무기가 된 건 바퀴 중앙으로 바퀴살이 모이는 허브형 바퀴를 장착해 견고했기 때문이다.

허브형 바퀴는 완전한 원형이었다.

따라서 험난한 길을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에도 바퀴가 찌그러지지 않았다.

기원전 2500년께 처음 등장한 전차가 원시적인 원반형 바퀴를 채택해 내구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괄목한 만한 기술적 진보였다.

전차가 싸움터에서 격하게 방향을 바꾸면서도 빠른 속도를 냈던 건 모두 허브형 바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중세와 근대의 무기-파괴력과 사정거리의 싸움

과학과 전쟁의 결합은 중세 유럽에서도 이어졌다.

프랑스와의 장장 116년에 걸쳐 백년전쟁을 치른 영국군은 크기가 2m에 달하는 거대한 활을 전투에 투입하게 된다.

이 대형 활은 1415년 프랑스 아쟁쿠르에서 갑옷으로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의 가슴에 연거푸 화살을 꽂았다.

중세시대에 기사가 유용했던 이유는 화살을 맞아도 갑옷을 입고 있어 끄떡없었기 때문이었다.

장궁의 등장으로 기사는 갑옷으로 인한 둔한 움직임으로 화살을 피할 수도 없어 무용지물이 돼갔다.

프랑스군은 1만명의 전사자를 내며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무려 200m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는 당시 보통 화살의 유효 사거리인 100m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장궁이 위력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길이가 길었기 때문이다.

활이 길어지자 자연히 활시위를 당기는 거리가 늘었고 운동에너지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화살의 관통력이 커졌다는 얘기가 된다.

사람에게 큰 부상을 입히기 위해선 150피트파운드(1파운드의 중량을 1피트 들어올리는 힘)의 힘이 필요한데 장궁은 무려 1400피트파운드의 힘을 냈다.

전쟁 후반에 대포가 실전에 배치되고 잔다르크가 등장하면서 프랑스를 구하기까지 장궁은 프랑스의 운명을 풍전등화로 몰아넣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과학이 만들어낸 군사 능력은 연달아 총알을 쏠 수 있는 기관총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 무기를 통해 적은 병력으로 식민지를 장악했다.

1898년 수단에서 현지인들과 영국군이 충돌했을 때 기관총은 그 위력을 끔찍하게 증명했다.

500명에 불과했던 영국군은 1만4000명의 현지 무장봉기 세력을 맞아 단 40분 만에 1만1000명을 죽였다.

현대전에서도 기관총은 가공할 위력으로 근접전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기관총은 1870년 영국의 기술자 하이럼 맥심이 발명했다.

기관총은 발사 후 생기는 가스를 보존해 다음 총알의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원리로 작동된다.

이에 발사 속도가 소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 현대의 무기-모든 것을 파괴하는 가공할 위력

과학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사적 성과이자 과오는 핵무기다.

핵무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힘을 드러낸 것은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였다.

미국의 B-29 폭격기가 떨어뜨린 한 발의 폭탄에 12만7000명이 죽고 도시의 60%가 파괴됐다.

이 같은 압도적 위력은 이후 지금까지 핵무기 보유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만들었다.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이 벌인 핵무기 생산 경쟁과 핵을 지렛대로 미국과 양자협상을 하려는 최근 북한의 시도는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한다.

핵무기는 폭탄의 개념을 바꿨다.

화약을 사용한 기존 폭탄들과는 폭발력의 원천부터 다르다.

우라늄235 등의 핵분열 물질 속에 있는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분열반응이 일어난다.

핵분열을 일으킨 원자핵에서는 2개의 중성자가 튀어나와 다른 원자핵에 충돌한다.

이 같은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막대한 에너지가 분출되고 이것이 핵무기의 위력을 만들어낸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무기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헬리콥터와 탱크,박격포 등이 미래 전장에서 쓰일 것을 예견하고 무기를 스케치해뒀다고 한다.

15세기에 살았던 인물의 상상력으로 그린 것치곤 현대 실제 무기들과 신기하리만큼 흡사하다.

그는 언뜻 봐서는 내용을 도무지 모르게 무기 개발기록을 공책에 거꾸로 적어두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다 빈치는 "누군가 어깨 너머에서 이 '사탄적 지식'을 훔쳐볼까 두려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과 과학의 결합을 걱정한 다 빈치의 생각을 헤아려봐야 하지 않을까.

임기훈 한국경제신문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