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면 머릿속에 기억이 저장되기 전에 잊어버려

[Science] 술을 많이 마시면 왜 '필름'이 끊기는 걸까?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겹친 12월, 유난히 술자리가 많은 시기다.

더구나 회사나 사업으로 인한 송년회를 빌미로 직장인들에게 연말은 '쓰린 속 부여잡는 한 달'이 되기 십상이다.

과음을 하다 보면 가끔 오는 현상인 이른바 필름이 끊기는 현상도 경험하기 일쑤다.

한두 번 그러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두세 번 반복되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들게 마련이다.

혹시나 기억이 없는 동안에 내가 어떤 추태를 부리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필름 절단 사고'를 한두 번쯤 겪어봤을 것이다.

또 미래의 술 소비자인 고등학생들도 술을 현명하게 마실 줄 몰라 대학 입학을 앞둔 시점이나 입학 직후 신입생 환영회 등에서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다.

술을 마시면 왜 이렇게 필름이 끊기는 걸까?

⊙ 머릿속에 저장되기도 전에 잊어버린다

필름이 끊기는 이유를 말하려면 뇌의 기억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

보통 기억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나뉘어진다.

단기기억은 1분에서 1~2시간 이내의 경험이나 감정이 뇌에 임시로 저장된 것이다.

이런 단기기억 중 중요한 부분만이 장기기억으로 바뀌는데 이 과정은 뇌의 앞쪽인 측두엽 안쪽에 있는 '해마'라는 기관이 담당한다.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지 못한 단기기억은 곧 사라지게 마련이다.

반면에 일단 장기기억으로 전환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보통 건망증이 생기는 이유는 장기기억을 꺼내지 못하거나 단기기억이 아예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지 않았던 탓인 것이 보통이다.

술을 마시다 발생하는 '필름 절단 사고'는 바로 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문제가 발생해서 일어난다.

기억이 안 나는 이유는 기억을 꺼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저장된 기억이 아예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 마시다 사라진 기억은 최면을 걸어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술자리 중간의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 것은 기억이 저장됐다 안 됐다 했기 때문이며 기억을 잃은 시간 동안 경험이 통째로 저장되지 않으면 아예 생각이 안나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주변사람들이 옆에서 술을 못먹게 해서 기억이 끊기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술을 같이 마신 사람들은 당사자가 필름이 끊겼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해마 외의 다른 부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서 술에 취한 것을 빼면 말이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저장돼 있는 중요한 기억들, 즉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은 멀쩡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계산을 하거나 집에 돌아가는 데도 전혀 이상이 없다.

오직 기억만이 사라질 뿐이다.

그럼 어느 정도 술을 마시면 기억이 끊기는 걸까?

1970년대 미국의 한 연구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통 혈중 알코올 농도 0.2% 정도에서 필름이 끊기는 것이 가장 흔하다고 한다.

이는 체중 70㎏의 남자가 25도인 소주를 한 병 반 조금 못 되게 마신 정도다(소주 한 병 반=약 500㎖).

물론 이 결과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몸 상태나 술을 마신 속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선천적으로 필름이 안 끊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다.

⊙ 필름이 끊기는 것은 뇌가 손상되고 있다는 증거다

평소 약주를 즐기시는 아버님들이나 주변의 직장인들이 하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요즘 술만 먹으면 자꾸 기억이 없어져 큰일났다"고 말이다.

필름이 끊기는 현상은 뇌가 술 마시는 중에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기억력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 상당한 위험신호다.

거기다 한 번 '끊기기' 시작하면 예전보다 쉽게 끊기는 것이 보통이다.

뇌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보내는 경고다.

하지만 애주가들은 이 경고를 무시하기 일쑤다.

이런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 기억을 못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있던 기억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는 상태가 반복되면 뇌질환 중 하나인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에 걸릴 수 있다.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은 과도한 알코올이나 다른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뇌질환이다.

크게 '베르니케 뇌증'과 '코르사코프 증후군'의 두 가지 증세로 나눠진다.

초기 급성 상태인 베르니케 뇌증은 안구운동 장애, 보행 장애 등을 보이는데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태가 발전해 뇌세포가 파괴돼 기억장애가 일어나는 코르사코프 증후군이 되면 장기기억이 점점 줄어들다가 급기야 저장된 기억도 사라진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런 점에서 알코올성 기억 장애는 치매와 비슷하다고 한다.

염두에 두어야 할 대목이다.

⊙ 건강하게 술을 마시는 법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원활한 사회 생활과 스트레스 해소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이유다.

적당한 음주는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지만 지나치면 사회생활을 망가뜨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다.

과연 건강하게 술을 마시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우선 빈속에 음주를 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득이 빈속에 마셔야 할 상황이라면 술을 마시기 전에 우유를 마실 것을 권한다.

위 속에 지방질이나 단백질이 있으면 알코올의 흡수 속도를 늦춰 준다는 것.

과음 및 폭음도 피해야 할 습관이다.

남자를 기준으로 적당 음주량은 양주 3잔이나 소주 반병 정도다.

여자는 남자의 절반이 적정량이다.

또 술자리에서는 안주와 물을 많이 먹고 '수다쟁이'가 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술과 함께 먹는 안주는 술의 독한 기운을 없애고 몸을 보호한다.

또 안주를 많이 먹으면 배가 불러 음주량도 줄어든다.

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체내에 수분이 많으면 알코올을 묽게 해 혈액 속의 알코올 농도를 낮추기 때문이다.

또 물을 많이 마시면 화장실 가는 횟수도 늘어나 소변으로 알코올을 배출할 수 있다.

술자리에 말을 많이 하면 호흡을 통해서도 10% 정도의 알코올이 배출되는 효과가 있어 술에 천천히 취하게 한다.

시인 보들레르는 "노동은 나날을 풍요롭게 하고,술은 일요일을 행복하게 한다"고 말했다.

잘 마시면 약이지만 잘못 마시면 독이 되는 술.

술의 미덕은 절제하는 가운데 있다.

※ 참고 : 혈중 알코올농도={주류의 알코올농도(%)×마신양(㎖)×0.8}÷{0.6×체중(㎏)×1000}

임기훈 한국경제신문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