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재산권 보호가 확실해야 제대로 작동한다"
[기획] 제27회 다산경제학상 수상자 이승훈 교수 특별강연
정년 퇴임을 눈앞에 둔 나이에 다산경제학상을 받으니 영광스럽고 기쁘다.

대학생 시절 나는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가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물림돼 내려오는 빈곤만 떨쳐버릴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없어질 것 같았다.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한국의 가난과 빈곤 퇴치 문제를 탐구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1990년대 중반 태국 방콕에서 열린 유엔 산하기관의 행사에 참석하면서 개발경제학 문헌을 많이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국내 시장이 미성숙한 개발도상국이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해외 선진국 시장을 활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주도형 개발 전략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외국에서 차관을 도입하더라도 그걸로 사업을 꾸려 나갈 유능한 기업가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유능한 기업가가 없으면 제대로 된 기업이 있을 수 없고 기업이 없으면 국민 개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려고 해도 일자리를 가질 수가 없다.

곧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경제 개발의 핵심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소수의 특정 기업을 집중 지원하는 방식으로 기업과 기업가를 키워 나갔다.

나는 이 같은 정책을 '선별 기업 지원적 개발 정책'이라고 하는데,이 정책은 소수의 대기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견인하도록 하는 바탕이 됐다.

그 과정에서 소위 '재벌그룹'이 생겨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재벌을 독재정권에 협력한 대가로 온갖 특혜를 받은 부조리한 집단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성과를 내는 재벌에 대해서만 정부의 지원이 선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문제는 소수 재벌을 중심으로 한 개발 정책이 경제력 집중과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 등 몇 가지 부작용을 남겼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당면한 문제의 본질은 결국 단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부작용이다.

재벌 문제뿐만 아니라 노사관계와 규제개혁,중소기업 문제 등 많은 것이 선별적 기업 지원 정책에서 기원했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개발 체제가 남긴 부작용의 폐해가 경이적인 성취마저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선별적 기업 지원 정책은 이제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우리 사회의 제도와 관행 곳곳에 잔재가 남아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한 잔재의 뿌리에 천착해 올바른 해법을 찾는 것이 경제학계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재벌 중심의 개발 정책이 부작용을 낳았다고 해서 기업 활동을 제약하고 시장의 기능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재벌 체제의 문제가 시장 경쟁과는 무관한 기업 지배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행 공정거래법은 대단히 도착적이다.

나는 재벌 문제를 경쟁 정책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공정거래법을 통해 시장 경쟁을 활성화하겠다고 하기 전에 재산권 보호 장치를 확립해야 한다.

공정거래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한테 기대어 무임승차하는 일을 막자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재산권이 제대로 보호돼야 한다는 얘기다.

재산권이 불완전하게 규정돼 있고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면 공정거래법도 제 기능을 할 수 없고 시장경제는 실패한다. 따라서 경쟁 질서의 확립도 결국은 재산권 보호 문제로 연결된다.

모든 시장 실패의 원인은 재산권의 실패이므로 그 해법도 재산권 복원에서 찾아야 한다.

재산권이 확립되면 인간의 이기심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 생산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되고 이는 곧 시장 실패 문제도 해결된다는 뜻이다.

재산권 보호에 관해서 어려운 것이 특허와 같은 지식재산권이나 요즘 많이 언급되고 있는 첨단 금융상품에 대한 재산권을 획정하는 문제다.

이러한 것들은 관련 법을 만들고 재산권을 보호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에서는 해당 시장이 형성되기도 어렵다.

재산권 보호 제도가 발달한 선진국은 적절한 건전성 규제와 시장 규칙을 만들어서 지식재산권이나 첨단 금융상품이 거래될 수 있는 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자유방임이 아니라 정부가 규칙을 만들어 규제하는 가운데 운영되는 시장이므로 이러한 시장을 '인공시장'이라고 부른다.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전통적으로 국영기업이나 공기업이 독점하던 전력산업과 같은 분야에도 인공시장을 만들고 시장 경쟁 원리를 도입해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산업자원부 산하 전기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 전력산업에도 그러한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백면서생의 한계만 절감하고 아쉽게 물러났었다.

시장은 자유방임만으로 잘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재산권 보호 장치를 확실히 마련한 뒤라야만 제 기능을 다 한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체험한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재산권 보호와 더불어 사회안전망과 기초적인 사회복지 제도를 완비한 체제를 '인간적 시장경제'라고 규정한다.

지금은 인간적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재산권 구조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시장 경쟁에서 탈락한 낙오자까지도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를 통해 함께 품고 가는 따뜻한 시장경제이면서 각 개인이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짐으로써 소위 '복지병'이 나타나지 않는 효율적인 시장경제의 이론적인 토대를 완성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앞으로 이 꿈을 실현한다면 오늘 다산경제학상이 내게 부과한 책임을 일부나마 수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리=유승호 한국경제신문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