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뱀·개구리·해파리 독도 잘쓰면 훌륭한 약
[Science] 毒과 藥은 백짓장 한장 차이?
TV 사극이나 조선시대를 다룬 영화를 보면 익숙한 장면이 있다.

바로 죄인의 처형 방법 중 사약을 먹여 절명(絶命)시키는 것이다.

대충의 스토리는 이렇다.

하얀 사기그릇에 담긴 약을 들이미는 집행관 앞에서 죄인은 발버둥치다가 억지로 약을 먹고 삶을 마감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떨리는 손으로 약을 받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형 집행 방법 중 사약을 받는 것은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는 사람이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때 쓰인 사약은 물론 독약이다.

주성분은 '부자'라는 한약재.

부자에 들어있는 '아코니틴'이라는 식물성 독은 신경전달물질의 움직임을 방해해 신경과 근육을 마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한방에서는 이 부자를 약재로 쓰기도 한다.

부자의 껍질을 벗기고 쌀뜨물에 넣는 작업을 거친 뒤 다른 약재와 함께 끓이면 독성은 줄어들고 진통과 염증을 억제하는 정 반대의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으로만 알고 있던 물질이 오히려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두 얼굴을 가진 독(毒)은 무엇이 있을까.

⊙ 복어독과 뱀독…이것도 약으로 쓰인다

지난 4월 경기 광주의 고속도로변에 세워진 차량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두 남자는 복어독을 먹었다고 한다.

경찰은 그들이 피로회복제로 복어독을 마셨을 가능성을 꼽기도 했다.

복어는 미식가들이 즐겨찾는 생선으로 철갑상어의 알인 캐비어, 송로버섯, 거위의 간인 푸아그라와 함께 세계 4대 진미로 꼽힌다.

하지만 복어의 알과 피, 내장에는 테트로도톡신(tetrodotoxin)이란 독이 들어 있다.

이 독의 독성은 무려 청산가리의 13배에 달해 불과 1∼2㎎ 정도로도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다.

1987년 발생한 KAL기 폭파사건 때 자살한 북한공작원도 복어독이 든 앰플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동의보감에도 "제대로 손질하지 않고 먹으면 죽을 수 있다. 살엔 독이 없으나 간 알엔 독이 많으므로 간, 알, 등뼈 속의 검은 피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기술돼 있다.

'복어 한마리에 물 서말'이란 말이 있는데 복요리를 할 때 다량의 물로 피를 충분히 씻어내라는 뜻이다.

이렇듯 무서운 독으로 알려진 복어독은 역설적이게도 신경통이나 관절통에 쓰이는 진통제의 원료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말기 암환자의 진통제로도 쓰이고 있다.

뱀독도 마찬가지다.

뱀독을 이용해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예방하는 연구는 2002년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옥스퍼드와 버밍엄, 리버풀대 공동연구팀은 영국심장재단(BHF)의 후원을 받아 뱀독의 심장병과 뇌졸중을 예방할 수 있는 성분을 규명한다는 목표 아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뱀독은 암을 치료하는 데도 이용되고 있다.

특히 이 분야에서는 우리 과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2002년 정광회 연세대 의과학과 교수 연구팀은 국내에 서식하고 있는 맹독을 가진 뱀인 까치살모사(칠점사)의 독에서 강력한 항암 물질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살모사 독에서 추출한 '삭사틸린'이라는 단백질은 동물 실험에서 암 전이를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폐암 대장암 흑색종양 전이를 강하게 억제하는 효과가 있으며 독성시험 결과 인체에 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연구팀은 삭사틸린을 만드는 유전자를 효모의 DNA에 삽입해 이 물질을 대량 생산하는 데도 성공했다.

⊙ 개구리나 해파리 독도 약이 된다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사는 독개구리 중에는 한 마리분으로도 10여명을 죽일 정도로 맹독을 가진 종류가 있다.

그런데 이 독도 잘 쓰면 훌륭한 약이 된다.

보통 암은 말기에 이르면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데 아스피린 등의 일반 진통제는 듣지 않기 때문에 모르핀을 투여하게 된다.

하지만 모르핀은 마약 성분인 만큼 부작용도 크다.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고 장의 운동을 방해해 극심한 변비를 일으킨다.

또 중독성이 강해 장기간 투여할 경우 육체적, 정신적으로 폐해가 심하다.

미국 아보트연구소 연구팀은 1998년 모르핀을 대체할 새로운 진통제로 독개구리에서 추출한 물질 '에피바티딘'을 기반으로 한 '에피페도바테스 트리컬러'라는 약을 개발했다.

에피바티딘의 진통 효과는 모르핀보다 200배 강한 반면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거의 없다.

개구리 독은 원래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냥을 하거나 적을 죽일 때 사용하는 맹독이지만 잘 다루면 사람의 고통을 줄이는 약제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개구리 독은 진통제말고도 쓰임새가 많다.

미국 국립 당뇨소화신장질환연구소의 존 달리 박사팀은 개구리 피부에서 추출한 독으로 천연 모기약을 개발했다.

이 모기약은 화학 모기약보다 훨씬 효과가 뛰어나다.

다만 사람이 직접 사용하기에는 독성이 너무 강해 사람에 대한 독성을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이 외에도 개구리 독에 항균 및 항바이러스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져 다양한 약재로 사용하기 위한 연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던 사람들을 독침으로 쏴서 지독한 고통을 주는 골치 아픈 해파리의 독도 약용으로 쓸 수 있다.

2005년 중국 과학원 연구팀은 해파리 촉수에 있는 독을 이용해 복숭아흑진딧물 등의 해충을 퇴치하는 방법을 연구해 효과적인 살충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해파리 촉수의 독을 썼을 때 해충의 치사율이 최고 98%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독은 특이하게도 해충에만 반응하고 사람의 몸에는 쌓이지 않아 기존 살충제의 치명적인 약점이던 '인체 내 축적'이라는 문제를 해결했다.

연구진은 해파리를 이용해 화학 살충제보다 효과는 뛰어나고 부작용은 적은 자연 살충제를 만드는 연구를 계속 하고 있다.

200여종의 해파리 가운데 식용은 단 4종류로 나머지는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안 돼 바닷가에 널려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해파리를 유용한 자원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어떤 독은 분명 건강과 생활에 도움을 주는 야누스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독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독이라는 선입견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독이 약이 된다는 엉뚱한 믿음하에 독을 마시면서 죽음과 삶 사이에 줄타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독과 약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임기훈 한국경제신문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