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마약과 같다"…중독땐 역효과
[Science] 극한의 고통 넘어서면 달리는 쾌감 '러너스 하이'
영화 '말아톤'을 보면 지체장애 청년인 초원이가 나온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얼룩말과 마라톤이다.

장애로 아무것도 못하지만 달리기만은 예외다.

그는 얼룩말처럼 달리고 싶어한다.

결국 그는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달리는 이른바 '서브스리(Sub-Three)'기록을 세운다.

실제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운동으로 건강을 챙기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운동은 역시 달리기가 으뜸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달리기에 중독성이 있다고 말한다.

평소에 운동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아한 이야기다.

담배도, 술도, 마약도 아니고 숨차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달리기에 중독이라니?

'달리기 애호가'들은 달리기가 바로 마약이라고 말한다.

30분 이상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경쾌한 느낌이 드는데 이를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나 '러닝 하이'(running high) 또는 '운동 하이(exercise high)'라고도 한다.

러너스 하이에 도달하면 오래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을 것 같고 계속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한다.

러너스 하이의 지속시간은 짧게는 4분, 길면 30분 이상 가기도 한다.

러너스 하이를 경험하고 있을 때 의식 상태는 헤로인이나 모르핀 혹은 마리화나를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고 때로는 성적인 절정감인 오르가슴에 비교되기도 한다.

러너스 하이를 이야기할 때 주로 달리기를 예로 들지만 수영 사이클 야구 럭비 축구 스키 등 장시간 지속되는 운동이라면 어떤 운동에서든 러너스 하이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마라톤 선수들이 훈련을 할 때 극한의 고통을 넘어서 35㎞ 지점쯤 되면 러너스 하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 러너스 하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Science] 극한의 고통 넘어서면 달리는 쾌감 '러너스 하이'
그렇다면 운동 중에 러너스 하이는 왜 오는 걸까?

과학자들이 러너스 하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캘리포니아대 심리학자인 아널드 J 맨델이 1979년 정신과학 논문 '세컨드 윈드(Second Wind)'를 발표하면서부터다.

그 뒤 러너스 하이를 경험할 수 있는 운동 시간과 강도, 방법 등에 대한 연구와 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운동 시에 증가하는 베타 엔돌핀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베타 엔돌핀은 우리 몸에서 생성되는 신경물질로 구조와 기능이 마약과 유사한 성질을 갖고 있다.

베타 엔돌핀은 특히 운동 시 5배 이상 증가하는데 그 효과는 일반 진통제의 수십 배에 달한다.

과학자들은 운동을 할 때 생기는 젖산 등 체내에 누적되는 피로물질과 관절의 통증을 감소시키기 위한 보상작용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추측해왔다.

그러나 러너스 하이를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고 학자들 사이의 의견차가 커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다른 학자들은 뇌 척수 등 중추신경계의 화학적 전달물질인 오피오이드 펩티드(아편과 같은 중독성 화학물질)에 주목하기도 했다.

오피오이드 펩티드는 아편, 모르핀, 헤로인 등 마약과 유사한 구조와 기능을 갖고 있다.

운동을 하면 오피오이드 펩티드가 많이 분비되면서 러너스 하이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최근 러너스 하이와 엔돌핀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뮌헨공과대학 핵의학 헤닝 뵈커(Henning Boecker) 교수팀은 운동 중 생성되는 엔돌핀의 존재를 처음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연구진은 10명의 육상선수를 대상으로 2시간 장거리달리기 전후에 뇌 상태를 단층촬영해 조사했다.

교수팀은 뇌 속에서 진통물질 수용체와 결합하는 엔돌핀과 결합을 억제하는 방사성물질 18F디프레노르핀을 사용했다.

뵈커 교수는 뇌 속에서 엔돌핀 생산량이 많아지면 주입한 억제제와 뇌 속의 엔돌핀이 직접 반응하기 때문에 18F디프레노르핀과 진통물질 수용체의 결합은 줄어든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2시간 정도 달리기 전과 후의 영상을 비교하자 18F디프레노르핀과 진통물질 수용체의 결합이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장거리를 달리면 체내에서 통증을 줄이는 물질의 생산량이 증가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

또한 진통물질이 생산될 때 영향을 받는 뇌의 영역은 감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앞쪽 전두엽과 변연계에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는 달리기를 한 뒤 행복감과 만족감이 높아지는 것 역시 엔돌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시간 달리게 되면 우리의 뇌는 신체가 고통을 잊고 오랫동안 달리게 하기 위해서 엔돌핀을 분비하게 되는데 이것이 도를 지나치면 이 엔돌핀이 주는 쾌감을 못 잊어 몸이 피곤하더라도 달리기를 계속하게 되는 원리다.

한편 장거리 달리기가 우울증을 줄이는 증거를 찾는 과학자들도 있다.

대뇌에서 생성되는 물질 가운데 특히 노르에피네프린이 부족하면 우울한 기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운동을 일정시간 지속하면 노르에피네프린의 분비가 증가하면서 우울증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 러너스 하이를 느끼려면?…즐겁게 운동하는 방법

통증과 우울증을 달리기로 날려버릴 수 있다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러너스 하이를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힘겹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느리거나 빠르지 않게 달려야 한다.

심장 박동수는 1분에 120회 이상은 되어야 한다.

보통은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러너스 하이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보자가 러너스 하이를 겨냥해 처음부터 무리하게 달리는 것은 몸에도 무리가 가고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피해야 한다.

점차로 달리는 거리와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쁨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자칫 마약에 빠지는 것처럼 러너스 하이에 중독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러너스 하이를 느껴본 사람은 그 상태를 느끼고 싶어 자칫 운동 중독에 빠질 수 있다.

하루라도 달리지 않으면 불안해하거나 짜증을 내게 되고 무리하게 달리다가 인대가 손상되거나 근육이 파열되는 경우도 있다.

어디서 달리든 상관은 없지만 스포츠 의학자들은 불쾌한 곳만은 피하라고 지적한다.

숲길 둔치 등 쾌적한 환경에서 달릴 때 몸속 생물학적 반응이 제대로 나타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러너스 하이는 오지 않는다.

마라톤 선수들도 올림픽이나 대회 등 다른 선수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할 때는 러너스 하이를 결코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러너스 하이는 여유있는 마음으로 달리기에 몸을 맡길 때 찾아오는 기쁨이다.

역시 운동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임기훈 한국경제신문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