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고 구부려도 원래의 상태 기억하고 되돌아가

지난 23일 독일 프라운호퍼 공작기계 및 성형 기술 연구소의 귄터 나우만 박사 연구팀은 하나의 와이어만 있으면 충분히 주유구 뚜껑을 열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개발했다고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메커니즘의 작동원리는 이렇다.

잠긴 주유구 뚜껑에 연결된 와이어를 통해 전류를 보내어 뚜껑을 가열한다.

올라간 온도로 인해 형상기억 합금이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가고자 수축하게 되고 결국 주유구 뚜껑이 열리게 되는 원리다.

현재 우리 생활에서는 형상기억 합금이 많이 쓰이고 있다.

형상기억 합금의 역사와 그 쓰임새는 어떨까?

⊙ 형상기억 합금의 역사

[Science] 형상기억합금, 살아있는 생물체와 다름없네!
형상기억 합금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1938년 미국 하버드대학의 그래냉거 교수와 MIT의 무래디언 교수에 의해서였다.

그 후 1951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리드 교수팀이 금-카드뮴 합금과 인듐-티타늄 합금의 형상기억 효과를 발견해냈다.

이후 많은 학자들은 여러 가지 합금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형상을 기억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장 큰 발견은 1960년 미국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해군 병기 연구소에서 이뤄졌다.

1963년 우연한 기회에 뵐러 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에 의해서 니켈(Ni)-티타늄(Ti) 합금이 뛰어난 형상 기억성을 가진다는 것이 발견된 것.

연구팀이 합금을 실험하던 도중 우연하게 니켈과 티타늄을 합친 조각을 담뱃불 근처에 접근시켰을 때 시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연구팀은 처음 이 현상을 발견했을 때 재료를 잘못 다뤄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실험 때 니켈-티타늄 합금을 가열하자 다시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 후 학계 및 산업계의 큰 관심을 끌면서 형상기억 합금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수행되기 시작했다.

고온 및 저온에서의 결정구조 등에 대해 연구가 진행됐고 1969년 해저 케이블용 관에 사용됨으로서 처음 경제적으로 실용화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개발되고 응용된 형상기억 합금은 니켈, 구리, 철, 아연, 알루미늄을 이용한 것들을 포함해 수십가지가 있으나 현재까지는 가장 형상기억 능력이 좋은 합금은 니켈-티타늄 합금으로 알려져 있다.

⊙ 형상기억 합금의 용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브래지어에 쓰이는 '메모리 브라와이어'다.

피부에 닿으면 처음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이 새로운 브래지어는 세탁 때마다 휘고 구부러지는 브래지어 와이어로 고민하던 여성들에게는 획기적인 제품이있다.

메모리 브라와이어는 보통 합금보다 10배 이상 큰 형상기억 합금의 초신축성 때문에 착용할 때 늘어난 와이어가 체온에 의해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피부느낌의 형상기억 합금 마우스도 개발됐다.

일반적으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던 기존 마우스와는 달리 형상기억 합금으로 제작된 새로운 마우스는 사용하는 사람의 손모양을 기억하고 있다가 사람이 사용할 때 손의 체온에 의해 가장 사용하기 편한 모양으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게 돼 있다.

또 마우스 표면을 인간의 피부와 흡사한 느낌의 재질로 제작해 손에 착 달라붙는 부드러운 느낌을 낼 수도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더우면 자동으로 소매가 올라가는 셔츠가 선보이기도 했다.

형상기억 합금인 니티놀 섬유 1가닥과 나일론 섬유 5가닥이 한 올의 실로 구성된 이 셔츠는 온도에 따라 소매의 길이가 조절되고 다림질도 필요 없다.

특정온도가 될 때마다 처음 만들어졌던 모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몇 ㎝씩 짧아지도록 설정된 것이다.

온도가 높은 낮에는 셔츠 소매가 올라가 반팔이 되고 추운 밤에는 긴팔로 바뀐다.

또한 섬유에 주름이 잡히거나 구겨져도 입기만 하면 체온에 따라 옷이 처음 상태로 펴지므로 애써 다림질할 필요가 없다.

의료분야에서도 많은 부분에서 형상기억합금을 이용하고 있다.

현재 병원에서도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없는 치료에 형상기억 합금을 이용하고 있다.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사람의 몸 속으로 형상기억합금을 투입하는 방법이다.

사람의 혈관 속으로 조그맣게 뭉쳐진 형상기억 합금을 넣는다.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서 합금이 펴지면서 손상받은 신체연결 부위나 골격 그리고 등뼈가 휜 것 등을 펴주거나 지지해 주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우주과학에도 형상기억 합금은 쓰이고 있다.

형상기억 합금에 주로 쓰이는 니티놀(Nitinol·니켈과 티타늄을 거의 절반씩 섞은 합금)로 위성안테나를 만든 뒤 특정 온도에 가열하면 이 모양이 그대로 기억된다.

이 안테나는 일상온도에서 뭉쳐놓거나 찌그러뜨리면 그대로 있지만,특정 온도 이상으로 열을 가하면 어느새 위성안테나의 모습으로 복원된다.

이로 인해 부피를 크게 줄일 수 있어 형상기억 합금 안테나는 1969년 인간이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 이후로 우주탐사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기계부품을 죄거나,체온에 의해 치아를 단단히 묶어주는 치열교정용 와이어에 사용되는 등 형상기억 합금의 응용분야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 형상기억 합금의 미래

최근에는 형상기억 플라스틱도 개발되어 실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폴리우레탄을 이용한 형상기억 플라스틱은 형상기억 합금에 비해 제조원가가 10분의 1밖에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볍고 다양한 형태로 만들기 쉬워 의료용에서부터 화장품, 섬유 등 응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

또 형상기억 플라스틱의 경우 열수축에 의한 회복력이 낮고 또한 재료 자체의 인장강도가 작으므로 열로 인해 수축되는 튜브나 필름으로 사용할 때는 큰 장점이 된다.

필름이 수축되었을 때 안쪽 물품의 모양대로 늘어나 밀착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형상기억 합금은 인체 친화성이 높고 탄성이 높은 데다 진동을 흡수하는 능력 등 인체 조직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로 인해 인공근육, 혈관 확장용 그물망 등 의료 용구 생체재료와 바이오 분야에 접목될 경우 향후 세계적으로 수천억원대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형상기억 합금은 만들기가 쉽지 않아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 단점이다.

조만간에 형상기억 플라스틱이 상용화되고 고온에도 견딜 수 있는 형상기억 합금이 나타나면 그동안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 왔던 금속이나 다른 재료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기훈 한국경제신문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