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 평등사상 앞세워 유교의 모순된 질서에 反旗
⊙ 동학은 새로운 사회질서 창조 행위?
날로 복잡해져 가는 현대사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유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각기 서로 다른 의견과 입장의 차이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과 사회적 질서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있는가?
따라서 이번 주제는 당시의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다른 입장을 가졌었던 동학에 대해 사회적 질서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는 흔히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정작 "질서란 무엇인가?" "질서는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물음을 접하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사전적으로 질(秩)은 공간적 안배를,그리고 서(序)는 시간적 차제(次第)를 의미한다.
따라서 질서는 공간적으로,그리고 시간적으로 적절하게 순서잡힌 배열을 의미한다.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각기 자신의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고,이렇게 제자리에 놓인 것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조화가 곧 질서의 아름다움이요,좋음이다.
이것이 유교사회였던 조선의 질서 개념이다.
반면에 하이에크는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생성된 것을 자생적 질서라 했으며,기업과 같이 만든 이가 확실한 조직의 질서를 인위적 질서라 일컬었다.
자생적 질서 아래에서는 최소한의 금지만 있고,그 외의 행동에는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인위적 질서 아래에서는 목적에 부합한 행동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하이에크가 주장한 자생적 질서는 인위적인 것을 부정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최상의 덕으로 생각했던 도교의 무위자연 사상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동학이 주장한 평등적 인간관은 봉건적 신분제 사회 속에서 '기존의 모순적 유교 질서에 대한 도전인가' 아니면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재창조 작업인가'에 대한 논란을 유교와 도교에서 생각하는 서로 다른 의미의 질서의 개념을 통해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을 철학적으로 재해석 해보자.
⊙ 사회질서 모순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인가
19세기 말의 조선왕조는 그 출발부터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함께 안팎으로 직면한 심각한 위기로 곪아가고 있었다.
즉 매관매직,탐관오리의 횡포를 초래한 관료기강의 문란,봉건적 신분체제의 파탄은 잔반계층·서얼·상민·공사노비 등 사회 불만계층을 형성하여 이들이 동학농민군 세력에 결집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동학은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민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동학의 사상적 바탕인 '인내천(人乃天)'과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여 신분제 사회 속에서 하층민에게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조선 정부와 지배층의 탄압 속에서도 동학의 평등사상은 상민과 천민뿐만 아니라 서얼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근대사회의 사상으로서 손색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동학은 이론 속에서 주장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분제 폐지를 전개해 나가는 실천 운동을 중시하였다.
결국 동학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만민평등의 이상을 주장하는 것으로,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 사회적 질서는 구별과 차별에서 시작된다
유교는 춘추시대 말기의 총체적(정치·경제·도덕) 질서 체계의 붕괴와 실종으로 인한 혼란과 혼돈을 극복하고자 하는 공자(孔子)의 시대적 책임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유교가 구체적인 현실 상황을 그 이념의 기반으로 삼아 사회적 질서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속에서 보면 유교(儒敎)는 강력한 신분적 계급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유교에 있어서 상하 질서관계의 성립은 기본적으로 자연적 정서에 의한 상하 관계에서 비롯되었으나,이것이 사회적 질서관계로 확대되면서 특히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상하와 주종을 구분하는 차별적 신분질서로 정착되었다.
이것이 유교적 질서인 '예(禮)'의 의미이다.
따라서 유교에서 강조하는 진정한 '예(禮)'의 의미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규범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개념이다.
그러나 사실 유교에서 주장하는 예(禮)는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했었던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주(周)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춘추시대 혼돈의 원인을 주나라의 예법인 종법제도의 몰락에서 그 이유를 찾고있다.
즉 대종(大宗)인 황제에 대해 소종(小宗)인 제후들의 반란이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춘추시대와 같은 혼돈과 무질서 속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교에서 의미하는 질서는 차별과 구별을 통한 적절한 순서와 차례이다.
이러한 차별적 질서의 의미는 공자가 주장한 '정명사상(正名思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정명사상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가 그 핵심내용인데,이것은 자신의 신분에 따른 역할의 적절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유교적 질서를 의미하는 '예(禮)'의 핵심은 다름 아닌 정명사상(正名思想)이라고 이해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조선은 유교를 근본으로 삼고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적절한 역할 수행을 질서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선사회 분위기로 비추어볼 때 만민평등을 주장하면서 신분에 따른 구별과 차별을 부정하였던 동학농민운동은 정명사상을 부정하고 예를 붕괴시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중대한 반(反)사회적 행동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 유교가 죽어야 진정한 질서가 설 수 있다
도교는 천지만물이 '도(道)'라는 형이상적 법칙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따르는 것을 질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도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교는 도의 기준을 거부하고 인간의 경험을 통한 인위적 지식을 기준으로 하여 상하·귀천·존비·미추 등에 대한 구별을 정하고 이에 따라 행위하는 것을 질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교는 이러한 인위적 제도에 크게 반발한다.
인(仁)과 예(禮)와 같이 유교에서 주장하는 질서의 개념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이것은 인간이 모든 만물의 본성인 자연스러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통한 편견과 지배계층의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기준이기 때문에 구별을 강조하는 유교적 질서 자체는 모순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노자의 "대도(大道)가 쓰러졌기 때문에 인의가 생긴 것이다(大道廢有仁義)"는 주장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따라서 도교는 인간이 타고 태어난 천성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질서이고,인간의 경험적 지식이나 편견으로 인해 만들어진 구별이나 차별을 통한 유교적 질서는 진정한 질서를 부정하는 거짓된 질서라고 생각한다.
결국 도교의 무위(無爲) 사상의 시작은 유교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제도·규범·문화 등 모든 인간의 인위적 요소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장자의 제물론 또한 만물은 도의 기준에 따라 모두 평등하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애초에 모든 만물은 평등했으나 인간이 잘못된 지식을 기준으로 구별을 만들었고,이것이 사회적 갈등과 혼돈의 원인이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서로를 구별하지 말고 차별하지 않는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을 진정한 질서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의 차별적 신분제도 자체가 인간의 잘못된 지식에 의해 만들어진 모순이기 때문에 신분제도라는 구별을 통해 만들어지는 조선의 사회적 질서 또한 모순적 질서이다.
이런 맥락에서 만민평등을 주장한 동학 농민운동은 반(反)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지식에 의해 잘못 이끌어진 유교의 모순적 질서를 바로잡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질서를 재창조하기 위한 긍정적 행위로 평가되어야 옳을 것이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
<용어정리>
공자의 '예(禮)'
공자는 내면적 '인(仁)'의 실천을 위하여 '예(禮)'라는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란 전통적·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이다.
유교에서 예법이나 형식을 중요시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 입각해서이다.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공자는 주장한다.
정명사상(正名思想)
공자는 자로라는 제자가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냐고 물었을 때,"반드시 명(名)을 바로 잡겠다"라고 하여 정치에 있어 정명(正名)의 중요함을 피력했다.
또 정치에 대하여 "임금은 임금답고,신하는 신하다우며,어버이는 어버이답고,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고 가르치며 명분과 그에 대응하는 덕이 일치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정명사상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명분에 해당하는 덕을 실현함으로써 예(禮)의 올바른 질서가 이루어지는 정명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위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
유가(儒家)는 목적 추구의 의식적 행위인 유위(有爲)를 제창하였으나,도가는 이를 인간의 후천적인 위선(僞善) 미망(迷妄)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는 무위를 제창하였다.
또 역설적으로 '무위에서야말로 완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뒤 도가뿐만이 아니라 유가도 무위를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 고차적인 자연행위,완성적 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중세 예술론의 근본개념이 되었다.
⊙ 동학은 새로운 사회질서 창조 행위?
날로 복잡해져 가는 현대사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유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각기 서로 다른 의견과 입장의 차이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과 사회적 질서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있는가?
따라서 이번 주제는 당시의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다른 입장을 가졌었던 동학에 대해 사회적 질서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는 흔히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정작 "질서란 무엇인가?" "질서는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물음을 접하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사전적으로 질(秩)은 공간적 안배를,그리고 서(序)는 시간적 차제(次第)를 의미한다.
따라서 질서는 공간적으로,그리고 시간적으로 적절하게 순서잡힌 배열을 의미한다.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각기 자신의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고,이렇게 제자리에 놓인 것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조화가 곧 질서의 아름다움이요,좋음이다.
이것이 유교사회였던 조선의 질서 개념이다.
반면에 하이에크는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생성된 것을 자생적 질서라 했으며,기업과 같이 만든 이가 확실한 조직의 질서를 인위적 질서라 일컬었다.
자생적 질서 아래에서는 최소한의 금지만 있고,그 외의 행동에는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인위적 질서 아래에서는 목적에 부합한 행동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하이에크가 주장한 자생적 질서는 인위적인 것을 부정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최상의 덕으로 생각했던 도교의 무위자연 사상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동학이 주장한 평등적 인간관은 봉건적 신분제 사회 속에서 '기존의 모순적 유교 질서에 대한 도전인가' 아니면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재창조 작업인가'에 대한 논란을 유교와 도교에서 생각하는 서로 다른 의미의 질서의 개념을 통해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을 철학적으로 재해석 해보자.
⊙ 사회질서 모순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인가
19세기 말의 조선왕조는 그 출발부터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함께 안팎으로 직면한 심각한 위기로 곪아가고 있었다.
즉 매관매직,탐관오리의 횡포를 초래한 관료기강의 문란,봉건적 신분체제의 파탄은 잔반계층·서얼·상민·공사노비 등 사회 불만계층을 형성하여 이들이 동학농민군 세력에 결집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동학은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민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동학의 사상적 바탕인 '인내천(人乃天)'과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여 신분제 사회 속에서 하층민에게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조선 정부와 지배층의 탄압 속에서도 동학의 평등사상은 상민과 천민뿐만 아니라 서얼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근대사회의 사상으로서 손색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동학은 이론 속에서 주장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분제 폐지를 전개해 나가는 실천 운동을 중시하였다.
결국 동학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만민평등의 이상을 주장하는 것으로,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 사회적 질서는 구별과 차별에서 시작된다
유교는 춘추시대 말기의 총체적(정치·경제·도덕) 질서 체계의 붕괴와 실종으로 인한 혼란과 혼돈을 극복하고자 하는 공자(孔子)의 시대적 책임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유교가 구체적인 현실 상황을 그 이념의 기반으로 삼아 사회적 질서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속에서 보면 유교(儒敎)는 강력한 신분적 계급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유교에 있어서 상하 질서관계의 성립은 기본적으로 자연적 정서에 의한 상하 관계에서 비롯되었으나,이것이 사회적 질서관계로 확대되면서 특히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상하와 주종을 구분하는 차별적 신분질서로 정착되었다.
이것이 유교적 질서인 '예(禮)'의 의미이다.
따라서 유교에서 강조하는 진정한 '예(禮)'의 의미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규범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개념이다.
그러나 사실 유교에서 주장하는 예(禮)는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했었던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주(周)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춘추시대 혼돈의 원인을 주나라의 예법인 종법제도의 몰락에서 그 이유를 찾고있다.
즉 대종(大宗)인 황제에 대해 소종(小宗)인 제후들의 반란이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춘추시대와 같은 혼돈과 무질서 속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교에서 의미하는 질서는 차별과 구별을 통한 적절한 순서와 차례이다.
이러한 차별적 질서의 의미는 공자가 주장한 '정명사상(正名思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정명사상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가 그 핵심내용인데,이것은 자신의 신분에 따른 역할의 적절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유교적 질서를 의미하는 '예(禮)'의 핵심은 다름 아닌 정명사상(正名思想)이라고 이해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조선은 유교를 근본으로 삼고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적절한 역할 수행을 질서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선사회 분위기로 비추어볼 때 만민평등을 주장하면서 신분에 따른 구별과 차별을 부정하였던 동학농민운동은 정명사상을 부정하고 예를 붕괴시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중대한 반(反)사회적 행동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 유교가 죽어야 진정한 질서가 설 수 있다
도교는 천지만물이 '도(道)'라는 형이상적 법칙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따르는 것을 질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도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교는 도의 기준을 거부하고 인간의 경험을 통한 인위적 지식을 기준으로 하여 상하·귀천·존비·미추 등에 대한 구별을 정하고 이에 따라 행위하는 것을 질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교는 이러한 인위적 제도에 크게 반발한다.
인(仁)과 예(禮)와 같이 유교에서 주장하는 질서의 개념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이것은 인간이 모든 만물의 본성인 자연스러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통한 편견과 지배계층의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기준이기 때문에 구별을 강조하는 유교적 질서 자체는 모순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노자의 "대도(大道)가 쓰러졌기 때문에 인의가 생긴 것이다(大道廢有仁義)"는 주장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따라서 도교는 인간이 타고 태어난 천성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질서이고,인간의 경험적 지식이나 편견으로 인해 만들어진 구별이나 차별을 통한 유교적 질서는 진정한 질서를 부정하는 거짓된 질서라고 생각한다.
결국 도교의 무위(無爲) 사상의 시작은 유교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제도·규범·문화 등 모든 인간의 인위적 요소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장자의 제물론 또한 만물은 도의 기준에 따라 모두 평등하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애초에 모든 만물은 평등했으나 인간이 잘못된 지식을 기준으로 구별을 만들었고,이것이 사회적 갈등과 혼돈의 원인이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서로를 구별하지 말고 차별하지 않는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을 진정한 질서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의 차별적 신분제도 자체가 인간의 잘못된 지식에 의해 만들어진 모순이기 때문에 신분제도라는 구별을 통해 만들어지는 조선의 사회적 질서 또한 모순적 질서이다.
이런 맥락에서 만민평등을 주장한 동학 농민운동은 반(反)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지식에 의해 잘못 이끌어진 유교의 모순적 질서를 바로잡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질서를 재창조하기 위한 긍정적 행위로 평가되어야 옳을 것이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
<용어정리>
공자의 '예(禮)'
공자는 내면적 '인(仁)'의 실천을 위하여 '예(禮)'라는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란 전통적·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이다.
유교에서 예법이나 형식을 중요시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 입각해서이다.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공자는 주장한다.
정명사상(正名思想)
공자는 자로라는 제자가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냐고 물었을 때,"반드시 명(名)을 바로 잡겠다"라고 하여 정치에 있어 정명(正名)의 중요함을 피력했다.
또 정치에 대하여 "임금은 임금답고,신하는 신하다우며,어버이는 어버이답고,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고 가르치며 명분과 그에 대응하는 덕이 일치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정명사상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명분에 해당하는 덕을 실현함으로써 예(禮)의 올바른 질서가 이루어지는 정명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위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
유가(儒家)는 목적 추구의 의식적 행위인 유위(有爲)를 제창하였으나,도가는 이를 인간의 후천적인 위선(僞善) 미망(迷妄)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는 무위를 제창하였다.
또 역설적으로 '무위에서야말로 완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뒤 도가뿐만이 아니라 유가도 무위를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 고차적인 자연행위,완성적 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중세 예술론의 근본개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