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나 구리 같은 금속은 전기가 아주 잘 통한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휴대폰이나 TV 같은 전자제품을 뜯어보면 금속으로 만들어진 부품과 회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우리가 흔히 '플라스틱'으로 알고 있는 고분자 물질은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대신 상당히 가볍고 단단해 전자제품 케이스나 생활용품 등으로 많이 활용된다.

그런데 최근 이광희 부산대 교수팀이 금속과 성질이 거의 같은 플라스틱을 개발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플라스틱은 많은 분자들로 구성된 아주 기다란 사슬들이 모여 있는 고분자의 일종이다.

플라스틱이나 고무 같은 고분자는 원래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지만 특정한 경우에는 전기를 잘 흐르게 하기도 한다.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으로 알려져 있는 전도성 고분자가 바로 그것이다.

전도성 고분자는 1970년대 후반 미국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의 앨런 히거 교수 등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첫 전도성 고분자는 폴리아세틸렌이라는 물질이었다.

폴리아세틸렌 그 자체는 부도체 또는 반도체지만 여기에 요오드를 입히면 금속에 버금갈 정도로 높은 전기 전도성을 갖게 된 것이다.

히거 교수는 이 연구 업적으로 2000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후 많은 전도성 고분자가 연구됐으나 금속과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론 전혀 다른 성질 때문에 폭넓게 실용화되기 힘들었다.

특히 전도성 고분자 발견 후 '이를 금속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도 30여년간 지속돼 왔다.

이광희 교수는 이석현 아주대 교수와 공동으로 순수한 금속의 성질을 나타내는 플라스틱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이 같은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전도성 고분자 활용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이 연구 결과는 영국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렸다.

이 교수팀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합성법을 이용해 기존의 전도성 고분자와는 완전히 다른 '폴리아닐린'이라는 고분자 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소재는 플라스틱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높은 전기 전도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전기 저항이나 광학적 전도율 등에서 실제 금속과 아주 흡사한 성질을 보인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기존 전도성 고분자는 낮은 온도에서 전기가 잘 통하는 금속과 달리 특정 온도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반면 이번에 개발된 폴리아닐린 전도성 고분자는 순수한 금속과 동일한 전기적 물성을 보일 뿐만 아니라 전기 전도도 역시 기존 전도성 고분자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금속이나 세라믹으로 된 무겁고 딱딱한 각종 전자 부품을 가볍고 유연하면서 값도 싼 플라스틱 부품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적용될 수 있는 분야가 둘둘 말 수 있는 두루마리 컴퓨터 화면 같은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다.

두루마리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부품을 유연하고 가벼운 소재로 만들어야 한다.

화면 기판이나 빛을 내는 발광 부품 소재로는 플라스틱을 쓰면 되지만 투명 전극과 같은 핵심 부품들은 금속이나 세라믹 등 딱딱한 소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현재 나온 초기 연구용 디스플레이 모델들이 잘 구부려지지 않아 사실상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로 보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연구로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나 입는 컴퓨터는 물론 가볍고 유연한 유비쿼터스(이동형) 전자제품을 실용화할 수 있게 됐다고 연구팀은 설명한다.

이 교수는 "이 소재는 플라스틱 전극이나 플라스틱 회로,플라스틱 배터리를 포함해 전기전자 소자 전반에 응용될 수 있다"며 "거의 플라스틱만으로 만들어지는 이른바 '올 플라스틱' 전자 제품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네이처는 이 교수팀의 연구에 대해 "플라스틱이 진짜 금속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이번 연구가 전도성 고분자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했다.

장원락 한국경제신문 과학기술부 기자 wr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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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 고분자 물질 종이펄프·녹말·단백질
합성 고분자 물질 나일론·합성고무·합성수지

고분자(Polymer)는 적은 양의 분자를 기본으로 하는 일반 저분자 물질과 달리 아주 긴 분자 사슬을 기본으로 하는 물질이다.

플라스틱이나 고무,섬유와 같은 물질이 바로 이런 고분자에 속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천연 고분자 물질로는 펄프,녹말,단백질,송진,천연 고무 등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합성 고분자 물질로는 나일론,합성 고무,합성 수지 등이 있다.

플라스틱은 일반적으로 합성 고분자 물질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플라스틱은 가볍고 유연해 일상생활용품의 소재로 많이 사용된다.

또한 전기가 통하지 않아 절연체로도 활용된다.

전도성 고분자는 이러한 고분자의 본래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 전기까지 통하는 플라스틱이다.

그래서 가볍고 유연하면서 값도 싼 플라스틱의 성질과 전기가 잘 통하는 금속의 성질을 모두 갖춘 미래 소재로 각광받아 왔다.

장래에는 금속을 대체할 수도 있을 것으로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실제로 전도성 고분자는 이미 꽤 많이 실용화돼 있다.

컴퓨터의 스크린 보호기나 반도체성 고분자인 발광다이오드(LED) 등으로 개발되고 있다.

또한 플렉서블 디스플레이와 이동전화용 디스플레이 등으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