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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전행랑·백화점에서 옴니채널까지…유통산업 끝없는 진화

    우리는 고려시대까지도 화폐가 제대로 쓰이지 않을 정도로 유통산업의 발전이 더뎠다. 조선시대에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해서 상업을 낮게 평가했다. 국내 유통산업이 2019년 기준 134조1132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7.9%를 차지하며 전체 취업자의 14%를 고용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짧은 기간 선진 제도의 도입과 혁신을 거듭한 덕분이다. 상설시장에서 복합쇼핑몰까지우리나라에 상설시장이 생긴 것은 조선 개국 때로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숭례문(남대문) 주변에 ‘시전행랑(市廛行廊)’을 설치하면서부터다. ‘팔지 않는 물건이 없다’는 남대문시장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육의전으로 대표되는 시전상인에게만 물건을 팔 수 있는 권리(금난전권)를 부여하는 등 유통을 억제하는 정책을 썼다. 18세기 후반 정조 때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면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허용되고 1897년 남대문시장이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거듭났지만, 여전히 5일장과 보부상이 전국의 유통을 담당했다.쌀장사와 종이 수입으로 큰돈을 번 박흥식이 1931년 서울 공평동에 세운 화신백화점은 한국 첫 백화점으로 일제시대 일본 상인들이 장악한 국내 유통산업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켰다. 박흥식은 화신연쇄점을 모집해 전국에 350개의 가맹점을 두는 등 프랜차이즈 사업을 도입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연쇄점은 같은 종류의 상품을 파는 점포를 여러 지역에 개설해 유통비용을 낮춘 사업모델이다.슈퍼마켓은 1970년대 초 서울 한남동에 개점한 한남슈퍼가 첫 출발이다. 옷 식품 잡화 등 한 품목만 취급하는 동네 가게와 달리 다양한 상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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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통개혁 부르짖은 박제가…"길이 없으니 물자교환 안돼"

    박제가, 유통혁명을 부르짖다일찌감치 유통과 물류의 중요성을 알아본 조선시대 학자가 있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은 박제가(朴齊家·1750~1805)입니다. 조선 영조·정조 시대 때 활약했던 실학파(혹은 북학파) 학자 중 한 명입니다. 박제가는 유통이 개선되어야 조선의 나랏살림이 그나마 나아진다고 봤습니다. 그가 정조에게 올린 ‘북학의(北學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조선의 유통과 물류의 개혁을 갈구했는지를 알 수 있어요. 한 대목을 읽어볼까요?“영동 지방에는 꿀은 생산되나 소금이 없고, 평안도 관서 지방에는 철은 생산되나 감귤이 없다. 산골에는 팥이 흔하고, 해변에는 창명젓과 메기가 흔하다. 영남지방에는 좋은 종이가 나오고, 보은에는 대추가 많고, 한강 입구 강화에는 감이 많은데…백성들은 이런 물자를 서로 풍족하게 교환하여 쓰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동서로 1000리, 남북으로 3000리로 작은데 물가가 고르지 않다…물자를 교환할 도로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도로와 수레가 없으니 물자가 교환되지 않는다오늘날 경제용어로 말하면, 이렇다 할 유통망과 물류망이 없으니까 각 지방에서 나는 농산물과 특화물이 서로 거래되지 않고, 결국 모두가 곤궁하게 산다는 박제가의 절규입니다. 조선시대에 ‘배달의민족’이 있었으면, 각 지방이 도로로 잘 연결돼 있었다면, 물품들을 실은 수레(지금의 자동차)가 쌩쌩 달릴 수만 있었다면…. 박제가는 조선의 도로와 수레 사정이 당대 선진국인 청나라보다 훨씬 못한 것에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개혁방안을 정조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박제가의 개혁안은 정조의 우유부단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