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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겉도는 청년고용 쿼터제도…규제 없애야 고용 늘어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 정부가 무슨 조치든 취해야 한다는 여론도 거세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정부가 내놓은 게 의무고용할당제나 청년인턴제, 청년추가고용장려금 등이다. 고용 쿼터제와 정부보조금 방식을 혼용한 것들이다. 예컨대 청년인턴제는 중소기업이 청년을 인턴으로 고용할 때 급여의 일부를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다.인턴 기간이 끝난 뒤 기업에서 해당 인턴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면 시행처에 따라 취업 장려금을 지원해 주기도 한다. 그 밖에 정부에서는 고용 촉진책을 만들어 기업이 더 많은 청년을 고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문제는 이런 식의 단편적인 정책이 효과가 있는지 여부다. 국민의 혈세가 나가는 만큼 분명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턴 기간이 종료된 뒤 정규직 고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턴을 고용한 뒤 기존 직원을 해고하고 내보낸 직원의 일을 인턴에게 시키는 얌체 기업이 있다는 씁쓸한 소문도 들린다. 청년 고용을 위한 제도를 악용하는 일부 기업의 행태도 잘못됐으나, 본질적으로 보자면 그러한 고용 정책으로는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청년도 살리고 기업도 살리는 방책청년 고용이 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아니 그보단 고용이 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기업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고 사내에 유보금만 쌓아둔 채 일자리를 만들지 않아서인가? 그렇지 않다. 기업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유기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어 끊임없이 성장하고 진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이가 밥을 먹어야 쑥쑥 자라듯 기업도 성장하려면 고용해야 한다. 고용하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 찬란한 황금문화 꽃피우며 부국강병 이뤄내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남진한 이후, 신라와 가야는 고구려의 기술을 습득해 비로소 기마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이나 함안의 말이산 고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철제갑옷, 철제투구, 말투구, 말방울, 말갑옷 등의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뚫음무늬 금관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말한다. 아름답고, 뛰어난 금관들이 6점이나 발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황금의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 조상은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금을 좋아했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귀족이 금·은으로 모자와 옷을 장식했으며, 고구려인은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어 금·은 같은 재물이 없어진다고 기록했다.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의 귀족이 저택과 모자 의복을 금·은·구슬로 치장하고, 금목걸이·금귀고리·금가락지 등의 장신구를 소유했다고 썼다. 또 무덤에서는 금동등자, 금동재갈, 안장, 금동화살촉 등이 출토됐다.그런데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 1941년에는 평양 진파리 6호분에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이 나왔다. 동명왕릉에서는 심엽형 보요와 금실 100여 점을 비롯한 금관 장식품이 출토됐다. 4세기 말~5세기 초 고분인 평양 용산리 7호 무덤에서 절풍 모양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는 관테 둘레와 세움 장식이 하나로 이어진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 출토됐는데, 청동 위에 아말감 도금을 했다. 당연히 수은을 채취해 정교하게 이용하는 화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손영종 《조선수공업사》). 광개토태왕릉에서 직경이 0.2㎜가 채 안 되고 표면에 요철 문양이 새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강 이남 소국 연합체 '삼한'에서 갈라져 나온 가야…남동해안에 무역선·사신선 머문 여러 국제항 만들어

    모든 정치력이 한데 모인 중앙집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지역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권력을 분산한 지방분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청동기 이후 인류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고, 지금도 한국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된다.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존속했다. 전기에는 백제, 신라와 자웅을 겨뤘다. 가장 먼저 일본 열도로 진출했고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였다. 하지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이루는 데 실패해 일찍 멸망했다.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四國)시대’라는 용어를 만들지 못한 가야의 성공과 실패는 해양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유타국 허황옥 설화가야를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원래 이름은 ‘구야’ ‘가라(加羅)’였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가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에는 ‘가야’ ‘가라’ ‘게야’ 등의 지명이 있으며 보통 ‘韓’으로 표기된다. 후에는 1870년대에 일본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한 ‘정한론’처럼 한국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됐다. 건국과 발전의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은 데서 이 같은 다양성이 나온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건국설화가 두 개 실려 있다. 하나는 9간(干, 칸)이 구지봉에서 여섯 개의 알이 담긴 금합을 받았는데, 하나는 수로왕이 됐고, 나머지는 5가야의 주인이 됐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신비하고 실체를 알기 힘든 허황옥(許黃玉) 이야기이다. 48년 7월 27일,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망산도(지금의 창원 인근)에 닿았다. 배에는 돌탑과 20여 명의 종자, 16세의 여인과 오빠가 있었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경주, 수로 교통 발달한 해항 도시…초기부터 일본 혼슈 진출

    신라는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4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자체 통일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초기부터 가야는 물론 왜 세력의 침공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학자들은 신라가 고대국가로 늦게 발전한 원인을 영역이 동남부 내륙지방에 국한돼 고립됐고, 수도가 교통이 불편한 분지였다는 데서 찾는다. 항구 도시 경주의 선택정말 그럴까?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한전(韓傳)에 따르면 진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들은 산둥(山東)이나 랴오둥(遼東) 등의 해안가에 살았던 동이족들로 뱃길을 이용해 서해를 건너왔으며, 후에는 중국 지역과 무역을 벌였다. 또 변진(가야의 전신)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건너 제주도의 주호, 일본 열도의 왜 등과 철 등을 무역했다. 그렇다면 진한을 계승한 신라는 초기부터 교역망과 해양 활동 능력이 발달했을 것이다.수도인 경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큰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가 우물과 관련된 여인(水神)과 결혼해 건국한 땅이다. 이런 신령성 때문에 ‘금성(金城·신령스러운 도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경주는 실제로는 지정학적이고 지경학적인 가치가 풍부했으며, 이는 해양 활동과 깊이 연관돼 있다. 국가 항구로 사용된 감포경주시에서 북쪽으로 형산강을 따라가다 보면 포항 영일만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아달라왕 때인 157년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제사집단이 일본 열도를 향해 출항한 ‘도기야’가 있다. 또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을 넘어서 내려가면 감포가 있다. 면적은 좁지만 직선 거리로는 경주와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