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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처리수 vs 오염수', 과학은 왜 괴담에 밀리나

    지금 우리는 ‘언어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두 개의 말을 지켜보고 있다. ‘처리수 대(對) 오염수’가 그것이다. 이들은 서로 언중(言衆)의 선택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세력싸움을 하는 중이다. 어느 쪽이 살아남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두 말에는 이미 정치적 프레임이 씌워져 있기에 ‘언어의 순수성’을 따질 시기는 지났다. 하지만 적어도 말을 들여다보고 판단할 잣대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중 하나가 ‘과학의 언어’와 ‘시적 언어’의 구별이다.‘과학’보다 ‘정치’에 휩쓸리기 쉬워언어에도 스펙트럼이 있다. 말과 글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과학의 언어’에서 ‘시적 언어’까지 광범위한 표현 방식이 존재한다. 가령 ‘눈(雪)’을 설명하면서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結晶體)’라고 한다면 그는 과학의 언어로 말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눈은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도 하고 ‘서글픈 옛 자취’이며 ‘추억의 조각’인가 하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이기도 할 것이다(김광균의 시 ‘설야’). 이는 ‘시적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과학의 언어는 엄격하고 정교하며 객관적인 쓰임새를 요구한다. 그에 비해 시적 언어는 수사적 표현이 풍부하고 개인적이며 주관적, 감상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 ‘언어의 스펙트럼’에 따라 서로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 국어사전은 어디쯤에 있을까? 은 ‘과학의 언어’로 말한다. 앞서 살핀 ‘눈’에 대한 풀이가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국어사전이 언제나 과학의 언어를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정치적 언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