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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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아편은 서구제국의 고수익 사업…중국 4000만명 중독
‘아편(opium)’은 메소포타미아가 원산지로, 중국에선 아랍어 ‘아프염(af-yum)’이나 ‘아푸용(a-fu-yong)’을 음역해 ‘아편’ 또는 ‘아부용’이라고 표기했다.아편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뒤 동인도회사를 매개로 주요 교역 품목이 됐다. 애초에 포르투갈인들이 인도 중부에서 생산되던 아편을 인도 고아를 통해 마카오로 운반해 팔았다. 영국은 이 같은 아편의 생산과 수출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확대했다. 중국의 차와 비단, 도자기를 원했지만 중국 시장을 뚫을 힘이 없었던 영국 상인들은 아편을 무기로 중국 시장의 관문을 강제로 열었다.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판 방식은 노골적이면서도 교묘했다. 인도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은 인도에서 대량으로 아편을 재배한 뒤 검은색 축구공만 한 크기로 만들어 ‘약’이라고 쓰인 나무 상자에 넣어 중국으로 밀수했다.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볼링공 모양으로 만들어서 대량으로 공급한 것이다. 중국에서 아편은 약품으로만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중국의 아편 수입량을 보면 1770년대 연평균 200상자였던 것이 1780년대엔 연평균 1000상자로 증가했다. 1800~1809년 3871상자이던 아편 거래가 1811년에는 5000상자를 넘었다. 이는 또다시 1820~1829년에 1만311상자로 늘었고, 1830~1839년에는 2만2941상자로 급증했다. 1838년 한 해에만 4만 상자 이상이 쏟아져 들어왔다.19세기 첫 30년 만에 거래량이 여덟 배 늘어난 아편은 당시 세계에서 단일 상품으로는 최고의 교역 물품이었고, 영국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던 은을 회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중국의 은 보유액은 1793년 7000만 냥에서 1820년 1000만 냥으로 급감했다. 1814~1850년 사이에 청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