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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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의 설계자 '핵심 브레인' 정도전…성리학 중시하며 산업 억제정책 펼쳤죠
신진사대부는 성균관과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치른 학자적 관리들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비판의식이 강한 이상주의자로, 야망을 실현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도전과 같이 신분이 한미하거나,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중소 토지만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기득권에 막혀 중간 관료에 머물렀다. 따라서 권문세족과 기존 질서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력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해 세력을 이룬 이들은 ‘내우외환’이라는 고려 사회의 위기를 통감했다. 따라서 개혁이라는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위기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과 학문적인 기반, 가계의 차이 등으로 점차 입장에 차이가 생겨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됐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서 최영이 죽고 우왕이 쫓겨나자 온건파의 위기감은 최대치로 증폭됐다. 결국 두 세력은 권력투쟁을 벌였고, 온건파의 대표였던 정몽주는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이색·길재 등을 비롯해 ‘두문동 72인’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다가 숙청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정도전이 추진한 혁명의 내용과 성격3단계는 건국에 성공한 이들이 사회를 개혁시키는 혁명 과정과 권력투쟁이다. 급진 개혁파는 다시 두 부류로 분열됐다. 하나는 힘을 장악한 이성계 이방원 등의 무장과 조준 같은 학자들이었다. 또 하나는 왕조 창업의 실질적 주역이자 혁명 이론과 정책의 근본 틀을 다진 정도전 중심의 강성 개혁자들이었다.정도전은 학식이 뛰어나고,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장량을 자처할 정도로 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