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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카라반 교역은 고위험·고수익 벤처사업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진나라가 있었다. 진시황이 통일한 중국의 진나라와 중국인들이 대진국으로 불렀던 로마제국이다. 대진국은 ‘서쪽의 커다란 진나라’를 가리켰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는 서로 상대방이 뛰어난 문물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사막, 산맥, 협곡, 강, 초원 등 건널 수 없는 지리적 장벽과 호전적인 유목 민족들이 가로막고 있었다.중앙아시아의 방대한 자연 장애물을 넘어 1만㎞ 이상을 걸어서 그 길을 오간 사람들이 바로 카라반이다. 카라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낙타다. 낙타는 등에 혹이 하나인 더운 사막지대의 단봉낙타와 혹이 둘인 아시아 초원지대의 쌍봉낙타가 있다. 단봉낙타는 안장과 같은 하우다를 얹어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었고, 쌍봉낙타는 짐 싣는 데 주로 이용됐다. 낙타 한 마리가 100~200㎏의 짐을 싣고 하루에 50~60㎞를 갔다.낙타가 가축화된 것은 BC 2500년께다. 인간이 사막지대로 진출하면서 낙타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낙타는 온순하고 수명이 길어 30~40년은 산다. 긴 눈썹과 코 근육으로 눈과 코를 막아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딜 수 있다. 또 물과 먹이가 없어도 혹에 저장된 지방을 분해해 오래 버틸 수 있다. 사막에 최적화된 낙타는 카라반에게 컨테이너 트럭과도 같았다. 그러나 낙타로 운반할 수 있는 물품은 한정됐다. 낙타 100마리에 짐을 가득 실어도 비잔티움시대의 배 한 척이 실을 수 있는 짐의 10분의 1도 안 됐다. 카라반의 영화도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자연히 사라졌다. 근대에 들어서자 교역로 곳곳이 두절돼 잊힌 길이 됐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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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했다

    세계를 호령한 로마도 시작은 미약했다. BC 8세기 티베르 강변의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해 2세기 거대 제국을 이루기까지 1000년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가장 취약했던 것이 바다였다. 카르타고와 일전을 벌인 1차 포에니전쟁 전까지 로마는 놀랍게도 대형 전함이 한 척도 없었다.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동안에는 바다로 나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 강에서 쓰는 소형 전함 20~30척이 전부였다. 그런 로마가 대형 전함이 절실해진 건 바다로 눈을 돌리면서부터다.로마의 첫 타깃은 당시 서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가 장악한 시칠리아섬이었다. 로마는 대형 전함 100척 규모의 함대를 계획했지만 건조 기술도 해전의 노하우도 없었다. 그런데 운이 따랐는지 BC 260년 로마로 표류해온 카르타고의 5단 갤리선을 나포해 이 배를 본떠 두 달 만에 갤리선 100척을 만들었다. 로마의 탁월한 모방 능력 덕이었다.물론 배 모양은 형편없었고, 노 젓는 기술부터 배워야 했다. 해전 경험이 없던 로마 함대는 카르타고와의 첫 해전에서 비참하게 깨졌다. 심지어 사령관까지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의 빠른 갤리선은 로마 갤리선에 바짝 붙어 지나갔다. 카르타고는 그렇게 로마 갤리선의 노를 부러뜨린 뒤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옆구리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전법을 썼다.초기에 로마는 카르타고에 밀렸다. 그러나 로마인은 창의성과 실용성이 남다른 민족이었다. 정상 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코르부스를 개발했다. 코르부스는 끝에 날카로운 송곳이 달린 긴 나무판자로 일종의 잔교(다리 모양의 구조물)였다. 로마군은 카르타고 갤리선 갑판에 코르부스를 내려박아 자신들의 배와 고정시킨 뒤 정예병이 이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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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세계 경제를 바꿨다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 전쟁을 벌였다. 유럽 국가 간의 1차 세계대전이라고 할 이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인도, 북아메리카 등의 식민지를 잃었다. 그 후유증으로 1789년 프랑스혁명이 터졌고, 뒤이어 혁명전쟁과 이탈리아 원정이 전개됐다. 이런 혼란기에 나폴레옹이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나폴레옹은 혁명 에너지를 나라 밖으로 돌렸다. 나폴레옹은 개병제에 따라 징집된 150만 대군, 빠른 기동력, 알프스를 넘는 변화무쌍한 전술에 힘입어 파죽지세로 유럽을 장악해 나갔다. 이것이 2차 유럽 대전인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다. 강한 군대도 먹어야 싸울 수 있다19세기 초에도 군대의 이동 수단은 말 또는 행군이었다. 2000년 전 로마 군대와 다를 게 없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주력이 보병이었기에 기동력을 유지하려면 병사의 개인 장비를 줄이고 강행군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보급도 뒤따라야 하는데, 원정 거리가 길어질수록 보급도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전투는 총과 대포로 금방 결판이 나더라도 전쟁은 속전속결이 불가능했다.나폴레옹도 이미 이런 문제를 인식해 병참 조직을 체계화하고 병사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그는 상금을 걸고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공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병사에게 지급된 빵은 베개로 쓸 만큼 딱딱했고, 고기 야채 등은 바로 먹을 수 없었다. 이것저것 다 넣고 끓여야 그나마 먹을 만했는데, 그럴수록 행군 속도는 느려졌다. 결국 현지 조달로 방향을 틀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식량 조달이 쉬운 지역과 어려운 지역에서 전과가 달랐던 이유다.파죽지세이던 나폴레옹이 몰락한 러시아 원정이 그런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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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역면제세는 왜 중세에 활성화됐을까

    영어에서 프리랜서(freelancer)는 특정 집단이나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 직업인을 총칭한다. 우리말로 프리랜서라고 쓰지만 영어로는 ‘프리랜스(freelance) 작가’ ‘프리랜스 배우’처럼 쓰는 게 일반적이다. 프리랜서는 고용주가 누구든 상관없이 맡겨진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 일이 있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므로 정해진 직장이 없고, 일이 없으면 보수도 없다.현대의 프리랜서는 자유 계약직이지만, 그 어원에는 흥미롭게도 중세 역사가 녹아 있다. 프리랜서는 ‘free’와 ‘lancer’의 합성어다. 랜서는 ‘랜스(lance)를 쓰는 사람’, 즉 중세의 용병을 가리킨다. 랜스는 로마제국 후기에 군대에서 사용한 짧은 투창인 ‘랑케아(lancea)’가 어원이다. 중세 기사들이 마상 시합 때 손에 들고서 마주보고 달리며 일합을 겨룰 때 쓰는 게 랜스다. 그러나 정작 중세 때는 프리랜서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영국 작가 월터 스콧이 쓴 소설 《아이반호》에서 중세 용병들을 ‘프리랜스’로 지칭한 것이 시초다. 이 소설에서 사자왕 리처드의 귀환에 동요하는 존 왕의 한 가신이 소집한 용병들을 프리랜스라고 부르며 “그 창은 어떤 주군에게도 헌신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그 유래다. 기사는 소년 시절부터 기사에게 필요한 무예 학문 예의범절 등을 익혀 실력이 쌓이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말과 갑옷은 워낙 비싸 아무나 갖출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주로 귀족의 자제들이 기사가 됐지만, 말과 장비를 유지할 경제력이 없으면 빚에 쪼들렸다. 이 때문에 용병 모집은 고급 백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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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무상복지 정책은 왜 실패했을까

    리들리 스콧 감독이 2000년 제작한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로마제국의 17대 코모두스 황제는 실존 인물이고, 막시무스 장군은 실제 인물을 토대로 한 가공 인물이다. 코모두스는 오현제(五賢帝)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부친이 황제일 때 태어나 다음 황제가 된 최초 인물이다. 그전까지는 주로 조카, 양자, 부하 등이 황위를 이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쓴 스토아학파(금욕주의)의 철학자이기도 해서 ‘철인황제’란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코모두스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황제로 로마 역사에 기록되었다. 코모두스는 어려서부터 공부보다 검투와 격투기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그는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레스로 분장하고 검투사로 나서기도 했다. ‘빵과 서커스’라는 번영의 역설지중해 최강국인 로마제국은 왜 급전직하로 추락했을까? 어리석고 힘만 센 황제 한 명이 천년 제국을 망칠 수 있을까?로마가 급성장한 전반기에는 검약과 강건함,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똘똘 뭉친 나라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바다로 진출하던 BC 8세기에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작은 도시 국가로 뒤늦게 출발했지만, 카르타고와 세 차례나 포에니전쟁을 치르며 집정관과 귀족 자제 등이 수십 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당연시된 나라였다.하지만 안정기에 접어들자 로마는 ‘번영의 역설’에 직면했다. 번영의 끝은 곧 쇠퇴의 시작이었다. 본래 로마인은 소식을 했지만, 점점 과식과 폭식을 즐겼다. 또 검투사들의 잔혹한 싸움에 열광했다. 곳곳에 들어선 공중목욕탕, 폼페이유적에서 발견된 홍등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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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패권 쟁탈…전쟁은 수익성 높은 장사였다

    ‘초콜릿 복근’이 선명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여심을 흔드는 카리스마의 레오니다스 왕은 프랭크 밀러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2007년 영화 ‘300’의 상징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 온다’란 광고 카피로 유명한 이 영화는 BC 480년 그리스-페르시아전쟁의 격전지였던 테르모필레전투를 그린 작품이다.고대 페르시아 전성기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에 패퇴해 죽은 다리우스 1세의 복수를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 대군은 그리스계 식민 도시를 제압한 뒤 헬레스폰투스해협(현재의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그리스로 들이닥쳤다. 이에 맞서 그리스 연합군의 1차 방어선으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용사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에 포진했다.영화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이 불굴의 용기로 방어하다 전멸하고 페르시아군은 후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다르다. 선봉에 선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 300명 외에 다른 폴리스들이 보내온 4000명의 병사가 후방을 맡았다. 이들은 페르시아군을 사흘간 저지했지만, 그리스의 배신자가 페르시아군에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줘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자 레오니다스 왕은 떠날 병사들은 떠나게 하고 스파르타 300명, 테스피아이와 테베의 병사 등 1400명으로 맞섰다. 그러나 급습을 당한 후방의 테베 병사 400명이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나머지 병사들은 앞뒤로 몰려든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원 전사했다.테르모필레 협곡을 통과하면서 군사 2만 명을 잃은 페르시아군은 평원을 지나 아테네에 입성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지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인구를 억제해야 할까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마냥 인구가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는 이런 문제에 일찌감치 주목했다. 그는 성공회 성직자 출신으로 케임브리지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가 1798년 《인구론》을 발표하기 직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는 전쟁 작황부진 식량 폭동 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18세기 말에 산업혁명으로 팽배하던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은 《인구론》을 발표했다.맬서스는 인간의 강한 성욕 때문에 인구 증가를 막기 어렵다고 보았다. 인구는 25년마다 두 배로 증가하는 반면, 식량 생산은 천천히 증가해 파국을 맞는다는 것이다. 식량이 늘면 인구가 늘어 노동력이 증가하지만 곧 인구 포화로 임금이 떨어지고 식량이 비싸진다. 임금이 싸지면 지주들은 농업 노동자를 더 고용하게 되어 다시 식량 생산이 늘지만 ‘먹는 입’이 더 빨리 늘어 또 식량 부족에 직면한다. 이런 악순환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을 ‘맬서스 함정’이라고 한다. 생산성 향상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소득이 정체되고,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맬서스 함정맬서스 함정은 생산을 토지에 의존했던 산업혁명 이전에는 일리 있는 분석이었다. 14세기 중반에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줄었을 때 임금이 크게 오른 것이나, 16세기 이후에 인구가 늘면서 임금이 떨어진 것과 같은 사례가 즐비했기 때문이다.맬서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인구가 곧 부로 간주되던 농경사회에서는 다산이 미덕이었다. 경제 성장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설사 성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인구 증가에 의한 것이었을 뿐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다.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세계의 일꾼이었던 중국인 '쿨리'…그들은 19세기 경제지도를 바꿨다

    1872년 7월 9일, 일본 요코하마항에 페루 선적의 마리아루즈호가 기항했다. 마카오를 출발해 페루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수리를 위해 입항한 것이다. 이튿날 밤, 이 배에서 남자 한 명이 몰래 뛰어내려 옆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으로 옮겨갔다.영국 해군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일본 관리에게 넘겼다. 일본 정부는 타국 상선에 간섭할 수 없다며 그를 마리아루즈호 선장에게 인계했다. 뒤이어 또 다른 남자가 탈출해 영국 군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배에서 엄청난 학대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급기야 영국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마리아루즈호를 조사했다. 이 배에 실린 화물은 다름 아닌 232명의 청나라인이었다. 그들은 페루의 농장과 계약을 맺고 일하러 가던 저임금 노동자였다. 노예와 다름없던 ‘쿨리’의 참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라가 쇠하면 국민이 고생쿨리는 ‘머슴, 일꾼’을 뜻하는 인도 힌디어의 ‘kuli’에서 유래했다. 영어로 ‘coolie’인데, 해외에서 일하는 저임금 계약노동자를 가리킨다. 쿨리는 19세기 후반 중국인이 겪은 고통의 상징과도 같다.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이었던 청나라 황실은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 나라가 쇠하면 국민이 온갖 고초를 겪기 마련이다. 쿨리가 그런 경우였다.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1857~1858년)에서 패한 뒤 중국인 노동자의 해외 송출을 공식 허용했다.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요구 사항이었다. 쿨리는 주로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19세기 들어 중국 인구가 급증했는데 경작지는 잦은 가뭄으로 되레 줄었다.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이 돈벌이를 하러 해외로 나갔다. 지금도 세계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