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의 보이는 경제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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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반달족은 어쩌다 야만의 대명사가 됐을까
8만 명이 넘는 북방 야만족 집단이 430년 지브롤터해협을 건넜다. 이 야만족의 정예병들이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로 진격했다. 히포는 북아프리카 최대 도시인 카르타고와 로마식 가도가 연결된 상업·군사 요충지였다. 그들은 히포를 지키던 로마 군대와 14개월간 공방전 끝에 결국 함락시켰다. 히포를 점령한 야만족이 바로 반달족이다. 게르만족 일파인 반달족은 본래 2~3세기께 북유럽에서 남하해 폴란드 남쪽 도나우강 유역에 살았는데, 5세기 들어 훈족의 압박과 기후 악화로 인한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부족 전체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달족은 ‘교활하지만 탁월한 왕’으로 평가받는 가이세리크의 지휘 아래 히스파니아(스페인)로 들어갔으나, 먼저 정착한 서고트족에 밀려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것이다.반달족은 5년간 마우레타니아(모로코)와 누미디아(알제리)를 평정하고 최대 도시 카르타고까지 점령한 뒤 반달왕국을 세웠다. 지브롤터해협을 건넌 지 10년 만이다. 그들은 카르타고를 거점으로 시칠리아섬, 샤르데냐섬을 수시로 약탈하고 이탈리아 본토까지 넘봤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서로마제국이 북방 훈족과 게르만족을 방어하는 데 전념하느라 남쪽을 대비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가이세리크의 반달족은 455년 수도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에 상륙했다. 이에 테베레강을 거슬러 로마에 입성했다. 겁에 질린 군중이 무기력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를 살해하자, 교황 레오1세가 가이세리크와 협상해 성문을 열었다. 반달족 병사들은 보름 동안 로마를 철저히 약탈해갔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반달족의 로마 약탈을 ‘로마 겁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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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동의어가 된 메디치 가문
중세에 위축됐던 예술과 문화에 대한 후원은 14~15세기에 되살아나며 르네상스를 열었다. 르네상스는 문자 그대로 ‘재생·부활’을 뜻한다. 르네상스가 번성한 그 중심에 이탈리아 도시국가 피렌체공화국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1400년께만 해도 두드러진 집안이 아니었다. 가문의 창시자 격인 조반니 데 메디치는 삼촌인 비에리 메디치가 교황청 환전 업무를 하던 메디치은행을 인수했다. 그리고 2년 뒤 상업이 번성한 피렌체로 옮겨왔다. 당시 피렌체에는 은행이 70개가 넘었다. 이때 은행은 지금처럼 거대 금융회사가 아니라 대부업자를 가리켰다. 조반니는 나폴리 귀족과 8년간 거래했는데, 이 귀족이 추기경을 거쳐 1410년 로마 교황 요한 23세가 됐다. 요한 23세는 메디치은행에 교황청의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는 주거래은행의 특권을 주었다. 그러자 메디치은행은 16개 도시에 지점을 둔 최대 은행으로 부상했다. 모험대차로 ‘피렌체의 국부’ 칭호 얻어1415년 요한 23세는 콘스탄츠공의회에서 폐위돼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조반니는 떼일 각오를 하고 그에게 벌금 낼 돈을 빌려주었다. 이 대출은 고스란히 손해가 됐지만, 조반니는 고객과의 신뢰를 끝까지 지킨 금융업자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 덕에 후임 교황도 교황청 자금을 다시 메디치은행에 맡겼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 과정과 비슷하다.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신뢰와 신용을 지킨 것이 성공의 요체인 셈이다.메디치 가문이 급성장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피렌체 권력자들과의 마찰이 커졌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 자금 거래가 끊기며 위기를 맞았다. 1429년 조반니가 사망한 뒤 장남 코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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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국제금융그룹, 로스차일드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근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이 최후의 일전에 돌입했다. 같은 날 런던증권거래소에서는 무수한 투자자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군이 이기면 투자한 영국 국채로 돈방석에 앉지만, 지면 깡통을 찰 수도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이날 저녁이 되자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졌다. 그러자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파견한 정보원이 브뤼셀로 달려가 배를 갈아타고 영국해협을 건넜다. 이튿날 새벽, 영국 포크스턴 해변에 도착해 직접 부두로 나온 네이선 로스차일드에게 편지 한 통을 전했다. 그는 봉투를 뜯어 훑어본 뒤 런던증권거래소로 달려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윽고 네이선이 눈짓을 하자 그의 거래원들이 영국 국채를 팔아치웠다. 이 모습을 본 투자자들도 너도나도 팔자고 나섰다. 몇 시간 뒤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짓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이를 태연히 지켜보던 네이선이 눈짓을 하자, 거래원들이 반대로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웰링턴 장군의 특사가 승전보를 갖고 런던에 당도한 것은 이틀 뒤였다. 네이선은 그사이에 영국 국채로 20배의 차익을 챙겼다.네이선의 일화는 프랑스 작가 발자크가 처음 언급한 뒤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계경제를 좌우한다는 음모론의 소재가 되었다.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그 배후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고, 가문의 총재산이 무려 6경원에 달하고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주무르며 비밀결사인 프리메이슨의 일원이라는 음모론이 지금도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골동품상에서 최초의 국제금융그룹으로로스차일드는 ‘붉은 방패(rot schild)&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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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중세 해상무역 '모험대차'에서 진화
영국 옥스퍼드대 앞에 처음 들어선 커피하우스가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대유행을 했다. 이 가운데 금융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템스강변에 들어선 로이즈 커피하우스다. 런던에는 왕립거래소가 있었지만 허가받은 소수의 중개인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렇지 못한 중개인은 왕립거래소 주변에 들어선 커피하우스로 모여들었다. 커피하우스가 보험, 증권거래의 중심이 된 배경이다.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선착장 근처여서 선주, 선원, 무역상, 보험업자, 조선업자 등이 모이기 쉬웠다. 정부기관도 부근에 즐비했다. 자연스레 무역과 항로, 선박과 유럽의 정치 상황 등 온갖 정보가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왔다.큰 수익을 거둔 로이즈 커피하우스의 주인 에드워드 로이드는 중심가인 롬바르드가의 훨씬 넓은 건물로 가게를 옮겼다. 그는 차별화된 서비스도 제공했다. 벽면 게시판에 선박의 출항·도착 시간, 화물 정보 등을 게시한 것이다. 로이드는 1696년부터 아예 로이즈 뉴스를 발행해 종합 정보를 제공했다. 이것이 173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로이즈 리스트’의 전신이다. 보험과 유사한 중세 모험대차 거래해상무역 발달과 궤를 같이하는 해상보험은 로이즈 커피하우스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바다는 예측 불허다. 폭풍으로 배가 난파하고 역풍을 만나 표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선주와 화주(화물 주인)는 전 재산을 날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중해 교역이 활발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해상무역의 위험을 덜기 위한 수단으로 ‘모험대차’가 생겨났다. 모험대차란 선주와 화주가 항해에 앞서 배나 화물을 담보로 일정 기간 돈을 빌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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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햇빛과 공기에 물린 세금, 창문세
부인 메리 2세와 함께 영국의 공동 왕위에 오른 네덜란드 출신 윌리엄 3세는 국가 재정 확충이 시급했다. 그의 왕위 계승에 반발한 아일랜드 구교도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재정을 늘리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더 걷는 것이다. 윌리엄 3세가 새로 도입한 것은 일종의 재산세인 ‘창문세’였다. 건물의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을 물린 것이다.영국에는 창문세 이전에 난로세가 있었다. 찰스 2세는 집집마다 설치된 벽난로에 세금을 부과했는데 난로 한 개에 연간 두 번 물렸다. 난로세는 일종의 부자 증세였다. 잘사는 집일수록 난로가 많다고 봤다. 하지만 곧바로 조세 저항에 부딪혔다. 난로세를 매기려면 세금 징수관이 집 안에 들어가 난로 개수를 조사해야 해 사생활 침해 논란이 벌어졌다.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3세는 성난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난로세를 폐지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전체 세금 수입의 10분의 1을 차지하던 세목이 빠지자 재정에 구멍이 났다. 이때 고안한 세금이 창문세다. 창문은 밖에서 셀 수 있어 사생활 침해 논란도 피할 수 있었다.창문세는 잘사는 집일수록 비싼 유리 창문이 많다는 점에 착안한 세금이다. 하지만 그것은 걷는 쪽의 생각일 뿐이었다. 창문세가 시행되자 도시마다 창문을 합판이나 벽돌로 막아버리는 집이 속출했다. 가뜩이나 우중충한 날씨에 창문까지 가리게 된 영국인들은 우울증을 호소했다. 이 때문에 창문세는 ‘햇빛과 공기에 물리는 세금’이라는 오명으로 기록됐다. 오늘날 영국에서 창문이 있어야 할 곳이 가려진 건물은 창문세를 징수하던 17~19세기 때 지은 집으로 보면 거의 틀림없다. 세금이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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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화폐가 신뢰를 잃으면 휴지와 다름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는 걷은 돈보다 더 쓴다. 경제가 파탄나는데도 로마의 군인황제들이 저질 은화를 발행한 것도 돈이 급했기 때문이다. 국가 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군대를 유지하고 복지사업을 펴고 호화생활을 하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세금은 저항이 컸고 정복 지역이 줄어 세금이 쪼그라드는 판이었기에 조폐소에서 귀금속 함량을 줄여 그 차익, 곧 시뇨리지(화폐 액면가에서 제조비용을 뺀 차익)를 챙기는 것은 세금 징수보다 손쉬운 일이었다.은화의 실질 가치가 낮아졌으니 물가가 뛰는 인플레이션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3세기에 로마의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5~6%로 추정된다. 해마다 6%씩 오르면 물가는 12년마다 두 배가 된다. 군인황제시대는 곧 경제와 민생 붕괴였다.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정치·경제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순도 100%인 새 은화를 만들어 화폐가치를 안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화폐 시스템의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서 새로 발행한 은화도 곧 사라지고 물가는 더 올랐다. 급기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가격통제 칙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물가는 법으로 누른다고 내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는 더 위축됐고, 사람들은 못 믿을 화폐 대신 물물교환으로 돌아섰다.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306년 순금으로 새 금화 솔리두스를 만들고, 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는 과정에서 금을 대부분 가져가 예전 수도 로마는 쇠퇴하고 말았다.시뇨리지는 ‘인플레이션 세금’으로 불린다. 화폐 발행량을 부풀릴수록 물가는 부풀어 오른다. 군인황제들이 불량 은화의 시뇨리지로 국고를 채운 대가가 물가 폭탄이었다.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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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도 맹자도 '적정세율은 10%'
구약시대의 유대민족은 재산이나 소득의 10분의 1을 신에게 바치는 ‘십일조’ 관습이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재산의 10분의 1을 바쳤고, 그의 손자 야곱은 하느님이 무엇을 주든지 그 10분의 1을 반드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십일조의 기원이다.중세 유럽의 교회는 주민들에게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세로 징수했다. 유대교 관습에서 비롯된 십일조를 점점 신자의 의무로 강조하다가 아예 세금으로 강제 징수한 것이다. 교회세는 17~18세기 근대에 들어서야 폐지됐다. 1만여 년 전 농업혁명 이후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적의 침입을 막을 군대가 필요했다. 수시로 전쟁에 동원되는 병사들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기에 공동체에서 이들의 생계를 위해 곡물을 걷어준 것이 세금의 기원이다. 최초의 조세체계는 BC 3000년 이집트에서최초의 조세체계는 BC 3000년께 고대 이집트에서 등장했다. 이집트 고분벽화에는 세금 징수원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고대 국가의 백성은 군주의 소유물로 여겨졌고, 백성은 군주에게 공물이나 노역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기꺼이 내는 사람은 없다. 조세 저항을 최소화하는 해법은 세금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금은 내세와 영혼 구원에 대한 대가였던 셈이다. 종교를 담당하는 사제계급에는 면세의 특권이 주어졌다. 1799년 나폴레옹이 발견한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석에 적힌 글귀는 신전의 세금 면제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국가가 세금을 걷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명목은 생명 보장이었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것을 잃고 노예가 됐던 시대에 군주는 백성에게 세금을 걷는 대신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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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무역으로 어떻게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을까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해적선 블랙펄호의 선장 잭 스패로는 늘 술에 절어서 산다. 조니 뎁이 연기한 스패로는 흐리멍텅한 눈에 흐느적대며 걷다 가도 상황이 바뀌면 잽싸게 달려가는 유쾌한 인물이다. 스패로 같은 해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술이 바로 럼이다. 럼의 별칭이 ‘해적의 술’ ‘선원의 술’이기도 하다.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당밀을 발효해 증류시켜 만든 게 럼이다. 럼은 위스키, 보드카 같은 증류주답게 무척 독하다. 알코올 도수가 최하 40도다. 럼의 색깔은 투명한 것부터 짙은 갈색까지 다양한데, 오크통에 넣어 숙성시키는 기간과 럼에 캐러멜을 섞는 정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악마의 창조물’ 설탕과 노예무역럼에 대해 말하다 보면 설탕의 역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커피나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게 자연스럽지만 근대 초기까지도 설탕은 비싸고 귀한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다. 설탕은 17세기 초 포르투갈 선교사가 중국의 차를 네덜란드에 전하며 유럽으로 퍼졌다.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차 문화가 만개한 곳은 영국인데, 1662년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영국의 왕 찰스 2세와 결혼한 이후 널리 퍼졌다. 18세기에 영국이 해양 패권을 장악하면서 인도 등 동인도산 홍차와 카리브해의 서인도산 설탕이 대거 유입됐다. 신대륙에서 설탕이 들어온 뒤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이 산업혁명 이후 중산층에도 퍼졌다.유럽인이 설탕을 처음 접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때다. 그의 군대가 인도에서 단맛이 나는 식물인 사탕수수를 발견해 가져왔지만, 유럽에는 재배할 곳이 없었다. 카라반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