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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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계무역까지 했던 원조선은 동아지중해 무역 강국
활발한 말 수출과 모피 가공업원조선은 축산업을 장려했고, 특히 말 수출을 했다. 말은 15세기까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였고, 고가의 무역 품목이었다. 한나라 무제가 장건을 우즈베키스탄(페르가나 지역)까지 파견한 목적은 흉노의 기마병을 대적할 말(한혈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기》에 따르면 바로 그 시기에 위만조선은 전쟁을 종식시킬 목적으로 태자에게 군량미와 함께 무려 5000필의 말을 한나라에 보내게 했다. 이런 목마산업은 고구려로 계승돼 중계무역까지 벌이게 했고, 발해 또한 유명한 말 수출국이었다.모피 가공업과 무역도 활발했다. 모피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몽골에 240여 년 동안 지배받았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까지 온 제일 큰 이유는 모피의 획득과 모피세 때문이었다. 베링해는 값비싼 ‘해달’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만주는 서만주 건조지대를 제외하고는 숲과 강이 발달해 생태계가 풍부하고, 훗날 제작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되지만 호랑이, 표범, 곰, 여우, 담비 등의 동물과 약초, 어류가 풍부했다. 어피 생산도 활발했지만,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 담비가죽은 근대까지도 엄청나게 고가로 팔린 무역 상품이었다. 《관자》에는 원조선이 춘추 전국시대에 산둥반도의 제(齊)나라에 문피(표범가죽)를 수출했다는 내용이 있다. 해양 무역을 벌인 증거다. 북한사학은 기원전 2세기에 단궁, 돈피, 문피, 과하마 등과 반어피 등을 한나라에 수출했다고 주장한다(홍희유 《조선상업사, 고대·중세》). 산업·기술·무역·문화 발달한 강대국또 조개 채집과 무역도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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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화려한 옥 공예품과 철 가공품…원조선의 산업과 문화는 춘추전국시대 못지않았다
한국은 1962년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서울 남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옥상의 전광판에 뜬 숫자를 확인하며 등교하던 까까머리 학창시절이 엊그제 같다. 500년간 농사만 짓던 사회가 공업과 무역을 국가 전략으로 택했다. 그 결과 2019년에는 무역액 1조달러를 넘어 세계 무역 8강,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됐다.현생 인류는 초기부터 상업을 했고, 곧 원거리 무역을 했다. 3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유적지(유럽의 중심부)에서 지중해나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가져온 조개껍데기가 발견됐다. 뉴기니와 북부 뉴아일랜드섬에 살던 사피엔스는 칼날을 대신한 흑요석을 바다 건너 400㎞ 떨어진 뉴브리튼섬에서 가져왔다. 발트해의 호박, 지중해의 조개껍데기가 1500㎞ 내륙으로 들어간 홍적세 크로마뇽인 유적지에서 발견됐다(재러드 다이아몬드 《어제까지의 세계》). 그렇다면 만주와 화북 일대, 동아지중해권에서 근거리 무역이 활발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고대 중국 능가한 원조선의 산업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주나라나 춘추전국시대라 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사회로 안다. 반면 기원전 10세기 전후의 우리는 원시적인 수준이었으며, 산업도 외국 무역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원조선은 제련술과 제철술 등 금속산업과 요업(세라믹)이 매우 발달해 뛰어나고 화려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기술력이 발전했고 지식과 경험을 활용한 실용과학 수준이 뛰어났던 결과다. 당연히 다른 분야 산업들도 동반 발전했다.광업도 발달했다. 원조선의 영토였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이 다양한 자원의 보고였기 때문이다. 1970년까지 북한 경제가 우리를 앞선 것은 일본이 건설한 중화학공업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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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현대에도 재현하기 어려운 0.3㎜ 잔무늬 청동거울…원조선 후기에는 갑옷·쇠뇌 등 철기문화 꽃피워
원조선의 청동거울은 기원전 5~4세기에 제작됐는데, 고대사회에서 거울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신물(神物)이며 정치적으로도 상징성이 컸다. 무늬선의 곱고 거친 정도에 따라서 ‘잔무늬 거울(다뉴세문경)’과 ‘거친무늬 거울(다뉴조문경)’로 나눈다. 잔무늬 거울은 실낱처럼 가는 수천 개의 선, 하늘을 상징하는 동심원, 복잡하고 정교한 기하학 무늬와 톱날 무늬로 구성됐다. 신비함과 합리성, 현란한 미의식과 기능성이 조화를 이룬 결정체였다. 반면 거친무늬 거울은 번개무늬 별무늬 방사상무늬 동심원 등이 조합돼 무늬선이 거칠며 외모 또한 투박했다. 이것은 기술력의 퇴보가 아니라 문화의 성격이 변모하고, 실용성이 높아진 시대 상황 때문이다.청동거울 대량 제작이 원조선의 전반적인 산업화에 기여한 정도는 측량할 수 없지만, 금속공학과 제련술 등을 크게 발전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청동 방울들과 장식품 등 다양한 금속제품이 제작됐고,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한참 앞선 합금·주조 기술그렇다면 원조선인들의 기술력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제작 재료인 동 주석 아연 운석 등 지하자원을 채굴하는 광업도 중요하지만, 제작하는 청동 합금기술과 청동 주조기술은 더욱 중요하다.원조선의 청동 제품들은 구리 주석 연(鉛) 아연 등을 섞은 ‘연아연청동’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청동거울을 만들 때는 무기 제작 때보다 구리에다 주석을 많이 넣고, 아연과 연의 비율을 올렸다. 그래야만 주조성과 반사효과를 높이고, 색깔도 변화시켜 장식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에 만들어진 세형 동검 등은 주석의 비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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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주조품보다 뛰어난 비파형 동검·청동거울…원조선의 정교한 합금·주조 기술 당대 최고였다
한국은 많은 나라가 선망하는 국가다. ‘한류’는 선진국에서도 인기몰이 중이다. 50년 만에 세계 최빈국을 벗어나 산업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산업이 발전하고,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나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대 산업’에 대한 오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신과 저평가, 역사학자들의 편협함 때문에 이를 잘 알지 못한다. 베이징 근처에서도 발견된 원조선 유물들원조선은 어떤 종류의 산업이 발달했으며, 기술력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농업과 어업, 임업, 목축업 등 1차 산업과 성을 쌓고 도로를 닦고 거대한 고분 및 고인돌을 만드는 토목업, 조선업 등은 국가의 기간산업이다. 그런데 기술력의 정수, 응용 범위의 확장, 기타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 등을 고려하면 화공(化工)을 이용한 요업(세라믹)과 금속을 이용한 군수산업, 제사산업이 핵심이었다.원조선 전기는 청동기 문화가 발달한 시기였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大連) 근처의 강상무덤(崗上墓)과 루상무덤(樓上墓), 요하(遼河) 동쪽 지방인 요동의 정가와자 무덤들(선양 정가와자에 있는 유적), 요서의 십이대영자 무덤 등에서는 청동 단검, 청동 도끼, 청동 끌, 청동 화살촉, 수레 부속품, 마구류, 단추 등 각종 청동 제품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 가운데 원조선의 금속산업과 기술력을 알려주는 유물은 상징성이 강하고, 기능성이 높으며, 난도가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비파형 동검(고조선식 동검 또는 요녕식 동검)과 청동거울(잔무늬 거울, 거친무늬 거울)이다.고대사회에서 칼은 무기로 기능했고 정치력을 의미했으며, 상징성도 강했다. 특히 비파형 동검은 특별한 형태와 표방한 논리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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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 수륙 물류 중심지에서 일어난 백제…잇따른 정복 전쟁으로 서해 해상권 확보 나서
백제는 활발한 해양활동을 바탕으로 국가경영에 성공한 나라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멸망할 당시 인구만 해도 76만 호(약 380만 명)로 삼국 가운데 가장 많았다. 해양 활동만큼이나 해외 진출도 많았다. 663년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 패배한 뒤 백제인 다수가 일본열도로 탈출하면서 자랑스러운 역사가 안타깝게도 많이 잊혀졌다. 고구려에서 나와 새로운 국가건설기원전 20년쯤의 어느 날,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한 홀본부여의 소서노, 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군사와 백성들은 압록강 하류를 출항했다.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꾼 그들은 원조선인들의 이주와 무역로였던 연근해항로를 이용해 서해안을 내려오다 경기만 한강 하류에 상륙했다. 경기만은 넓고 작은 만들이 발달한 데다 동아지중해의 여러 항로와 연결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다. 또한 이 해역으로 흘러드는 한강은 전장 512㎞에 달하는 하계망을 이용해 내륙을 통합시키는 데 유리하며, 하류에 충적평야가 발달했다. 백제의 중추가 된 위례성<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溫祚)는 위례성(지금의 서울 강동구, 송파구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백제의 초기 국가명)를 세웠다. 서울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넓은 수계망을 이용한 수륙교통과 해양교통이 교차하면서 온갖 물품이 모여드는 물류의 허브였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1930년대까지도 서빙고까지 영향을 끼치는 밀물을 이용해 마포, 용산까지 들어왔다. 이른바 ‘하항도시’와 ‘해항도시’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닌 ‘강해(江海)도시’였다.형인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인천 문학산성 일대)로 이동해 정착했다. 인천 지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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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군단 못지 않은 정예 수군 보유한 고구려…왕성한 정복·외교활동 펼친 '해륙국가'였다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약소국의 설움 속에서 우리가 꿈꾸고 닮고 싶었던 나라의 이미지다.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한 ‘기마민족국가설’이 불을 지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는 뛰어난 무장력을 갖춘 기마군단을 운용하는 동시에 정예 수군과 왕성한 해양활동으로 이름난 ‘해륙국가’였다.한반도에선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18개의 강을 이용해 교통과 물류가 발전해왔다. 만주는 서북쪽 일부 초원과 건조 지대를 빼놓고는 송화강, 요하, 흑룡강, 모란강을 비롯한 60여 개의 강에서 큰 배들이 다녔다. 비록 사료에는 없지만 자연환경, 역사적 상황,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을 보면 고구려 시대에도 강상(江上) 수군이 활동했다. 훗날 조선시대에 와서도 효종이 청나라에 파견한 병사들은 러시아군과 송화강에서 수상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1930년대 초 일본군은 흑룡강에서 강방함대(일본 관동군의 함대)를 운영했다.3세기 오나라와 해상무역고구려는 원조선의 능력을 계승한 데다 전기부터 한반도의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요동만과 서해 북부, 동해 북부에서 활발한 해양활동을 벌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장거리 항해를 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한 사례는 3세기 전반에 처음 나타난다. <삼국지>의 주역인 조조, 유비가 차례로 죽고 손권이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233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구려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오나라에 값비싼 담비가죽 1000장, 할계피(꿩가죽), 전략물자인 각궁(고구려의 활) 등을 보냈으며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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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원조선 회복’ 나선 고구려<삼국유사>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이라고 기술했고, <수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글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247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인 왕검이 있었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적어 원조선이 고구려와 특별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또 주몽이 벌인 정복사업들을 기록하면서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평가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인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옛 질서와 체제를 회복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원조선의 질서를 회복하고 옛 영토를 수복하는 일을 일종의 국시로 삼은 것이다.끊임없이 진행한 정복전쟁고구려는 초기부터 백두산 주변에 있는 행인국, 동해북부와 연해주에 걸쳐 있는 북옥저 등을 정복했다. 뒤를 이은 임금들도 양맥·개마·구다·동옥저·갈사·조나·주나 등 크고 작은 소국을 병합했다. 대체로 백두산 지역, 압록강 남쪽 지역, 동해안 일대, 연해주 일대, 그리고 중만주의 부여 영토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한편 대외전쟁을 펼쳐 2대 유리왕 때부터 북쪽의 선비족을 공격하고, 한나라가 남겨둔 잔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5대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요동지방과 요서지방을 지나 현재의 베이징 근처와 그 이북인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했다. 뒤이어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관리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간 재위하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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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 패했지만 자의식 보존한 원조선 유민들…유사한 언어·문화·종족 바탕으로 수복전쟁 나서
근래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놓고 다른 견해가 돌출하거나 그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 독립군의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됐고, 우리는 이를 계승했다. 반면 북한은 ‘조선’을 국호로 택했다. 민족을 강조하며 ‘주체사관’을 정립한 뒤에는 단군릉을 만들고 ‘조선 계승’ 사실을 강조했다. 비록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역사의 계승성과 정통성이 체제 경쟁에서 효과적임을 알고 있다는 방증이다.불분명하게 기술된 원조선개인은 물론 나라와 민족에도 정통성과 계승성은 존재 방식과 관련해 매우 중요하다. 뿌리야말로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4000여 년 역사 속에서 수백 개의 나라가 명멸했고, 전혀 다른 종족과 언어집단들이 번갈아가며 나라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라는 이름 아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역사책에 서술했다. 지금도 ‘중화’라는 자신감을 토대로 국가를 경영한다. 일본은 고대에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고, 현재 일본도 19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만세일계’라고 하며, 기원전 660년 전부터 현재까지 한 영토에서 하나의 역사가 이뤄졌다고 계통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그러면 지금 우리는 역사 속 계승성과 정통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국립중앙박물관 앞 전시실에 설치한 연표에 고조선 조항이 들어간 것은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역사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쓴 시민들의 주장 덕분이었다. 역사책에서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부족국가’에서 출발했다고 서술